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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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옛날, 사이좋기로 소문 난 나라가 있었어요. 너른 평야에는 윤기가 흐르는 쌀이 있었고 밭에는 시금치, 당근, 도라지 등 싱싱한 채소가 자랐어요. 마을 뒤 야산에는 고사리, 버섯 등 산나물들이 풍성했지요. 이들은 이 나라의 주민들이에요. 주민들은 함께 어우러져 맛있는 비빔밥을 만드는 것을 가장 즐거워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는 곳마다 싸움을 일으키는 심술바람이 찾아왔어요. 심술바람은 주민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샘났어요. 그리고 자기 힘이 얼마나 센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심술바람은 파릇파릇한 시금치를 찾아가 속삭였어요.
“네 녹색 옷을 보면 저절로 힘이 불끈 생겨. 네겐 젊어지게 하는 묘약이 들어 있지?”
시금치가 어깨를 으쓱했어요.
“물론! 난 활기차고 힘이 있어. 누구나 좋아하는 최고의 건강식이지.”
“그러니 모두 널 왕처럼 받들겠구나.”
“왕? 왕은 아니야. 난 그냥 이 나라의 주민 중 하나일 뿐이지.”
“저런, 왕처럼 대접받아도 좋을 텐데….”
시금치는 갑자기 서운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주민들은 한 번도 자기를 칭찬해 준 일이 없었거든요.
심술바람은 당근을 찾아갔어요.
“네 옷 색깔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구나. 모두들 네 옷이 곱다고 부러워하지?”
“내 고운 색이 없으면 비빔밥은 인기가 없을걸. 하지만 아무도 날 부러워하진 않아.”
심술바람은 살랑살랑 날씬한 몸을 흔들고 있는 도라지를 찾아갔어요.
“별처럼 아름다운 도라지! 네 피부는 어쩜 그리 하얗니? 넌 사람들의 병에 쓰는 귀하신 몸이기도 하지. 이 나라 주민들 가운데 으뜸이야.”
“그래? 그런데 우리 주민들은 나를 몰라 줘. 난 그저 주민 중 하나일 뿐이지.”
“그건 네 잘못이지. 네가 자랑을 해야 남들도 알아주는 거야.”
도라지는 심술바람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숲 입구 풀섶에는 고사리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어요. 심술바람이 물었어요.
“야, 고사리. 넌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어떤 주민들은 내가 우중충한 색깔이라며 싫어해. 날 보면 입맛이 떨어진다나?”
“넌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내잖아. 비빔밥에 없어서는 안 되지. 네 몸값을 높여 봐.”
심술바람은 나라를 헤집고 다니며 다른 주민들을 흉보고 다투도록 부추겼어요. 훈훈했던 나라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어요. 심술바람은 신이 났지요.
‘크크크, 내 한마디에 주민들 마음이 달라졌어. 난 역시 힘이 세다고.’
심술바람은 따뜻한 햇살 아래서 몸을 살찌우고 있는 쌀을 찾아갔어요.
“야, 꼬맹아, 내가 다녀보니 주민들이 난리가 났어. 자기가 비빔밥 나라의 주인공인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이야.”
“왜 갑자기? 우린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인데….”
심술바람이 시치미를 떼었어요.
“나도 모르지. 마음이란 바람처럼 자주 변하는 거야. 너도 생각해 봐. 아무리 재료가 훌륭해도 네가 없으면 비빔밥이 안 되잖아? 네가 제일 중요한데 너를 알아주는 주민들이 없지 않니?”
“물론 내가 없으면 안 되지. 난 혼자도 많은 사랑을 받아. 하지만 여럿이 어울릴 때가 더 재미있고 좋은걸.”
안타까운 생각에 꼬맹이 쌀은 채소들이 있는 밭으로 갔어요. 예전에 그곳은 푸르름이 넘치고 활기찼죠. 그런데 주민들은 잔뜩 토라진 얼굴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파릇파릇 생기가 넘치던 시금치는 누릇누릇 갈색 옷을 입었고요, 도라지는 별꽃이 무거운 듯 머리를 힘없이 축 늘어뜨리고 있었어요.
꼬맹이 쌀이 외쳤어요.
“여러분 나는 작은 쌀알이지만 비빔밥 나라에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주민이죠. 여러분도 다 귀한 역할을 하는 주민이고요. 우린 혼자서도 훌륭하지만 함께 어울릴 때가 더 행복하고 빛이 나요. 우리 서운한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뭉쳐봐요.”
고사리가 뚝뚝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난 주민들이 내 옷 색깔을 흉보며 필요 없대서 속상했어.”
시금치가 힘없이 말했어요.
“혼자 잘난 척하면 뭐 해? 함께 어울릴 때가 외롭지 않아 좋더라.”
도라지는 여전히 토라져서 나서 말했죠.
“내 쌉쌀한 맛이 싫다고 한 주민 누구야? 내가 얼마나 몸에 좋은 보약인지 알아?”
도라지 말에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어요.
“난 아니야.”
“나도 그런 말한 적 없거든.”
시금치가 말했어요.
“혹시, 심술바람 아닐까? 심술바람이 내게 속삭였거든. 넌 아름다우니 잘난 척을 해도 된다고.”
모두가 가만히 생각했어요.
“그러고 보니 심술바람이 우리 마음을 휘저어 놓았구나. 우리는 심술바람의 꼬드김에 넘어간 거야.”
꼬맹이 쌀이 말했어요.
“참, 우리 고추장을 찾아가 보자.”
고추장은 주민들을 보자 버럭 화를 냈어요.
“너희들! 내가 매워서 비호감이라고 했다며?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좋아하는 거 몰라? 내가 없으면 비빔밥 맛이 날까?”
모두들 고개를 저었어요.
“네가 없으면 아무 맛이 없을 거야. 우린 심술바람의 장난질에 넘어갔어.”
그때 까치 소식통이 날아왔어요.
“얘들아, 특종 소식이야. 이웃 나라에 비빔밥을 좋아한다는 임금님 있잖아. 그 임금님이 비빔밥을 드시러 온단다. 얼른 준비해야 해.”
시금치가 중얼거렸어요.
“그동안 미운 생각을 하느라 몸들이 망가졌어. 예전 같은 맛을 낼 수 있을까?”
꼬맹이 쌀이 말했어요.
“그래도 노력해 보자. 음식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정성도 중요하니까.”
당근이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잠깐! 저기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던 나무 숟가락이 안 보이네. 나무 숟가락은 늘 우리를 맛있게 버무려 주었잖아?”
비빔밥 나라 주민들은 숟가락을 찾아 나섰어요. 까치가 꽁지를 까딱이며 물었어요.
“무얼 그리 열심히 찾고 있니?”
고사리가 나무 숟가락을 찾는다고 하자 까치가 말했어요.
“아, 그 숟가락! 어제 심술바람이 저 바위 밑으로 몰고 가는 걸 봤는데….”
정말 바위 밑에는 나무 숟가락이 얼굴을 처박고 있었어요. 나무 숟가락은 주민들을 보자 한숨을 쉬었어요.
“휴, 다시는 너희들을 못 보는 줄 알았네. 어제 심술바람이 나를 한방에 여기까지 날려 보냈지 뭐냐?”
이웃 나라 임금님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어서 빨리 서두르자. 그런데 누군가가 빠진 것 같아. 누구지?”
고추장이 소리쳤어요.
“아, 향긋한 참기름! 고소한 김가루! 어디 갔어?”
멀리서 참기름과 김가루가 헐레벌떡 뛰어왔어요.
“짠! 향긋한 참기름 대령!”
“짠! 고소한 김가루 대령! 우린 너희들이 싸움만 하길래 이 마을에 필요 없는 줄 알았어. 그래서 이웃 마을에 일자리를 구하려고 갔었지.”
하얀 도자기 대접에 쌀밥이 다소곳하게 놓였어요. 그 위에 갖가지 나물들이 무지개색으로 둘러서고 마지막으로 김가루와 참기름이 뿌려졌어요. 그때 까치가 다시 나타났어요.
“잠깐! 이것이 빠지면 이상하지.”
까치는 비빔밥 가운데 알 한 개를 톡 떨어뜨렸죠.
나팔 소리와 함께 왕과 신하들이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한 신하가 자개상 위에 완성한 비빔밥 그릇을 얹어 임금 앞에 올렸어요. 신하가 나무 숟가락을 들었어요.
숟가락이 주문을 외웠어요.
“이제 내 차례군. 얍! 쓰윽∼ 쓰윽∼ 맛있게 섞여라. 얍!”
비빔밥 주민들은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했어요.
“보기 좋고 영양도 만점 비빔밥!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린 가장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