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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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마당에는 길냥이가 두 마리 살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길냥이는 아니다. 언제부턴가 마당을 드나들던 어미고양이가 임신하여 새끼 네 마리를 우리 집에서 낳았다.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어미는 떠났고 한 마리는 차에 치여 죽고, 또 한 마리는 제 발로 집을 나갔다. 결국 두 마리만 남아 지금껏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얼룩무늬가 있어 얼룩이, 온몸이 노란빛이라 노랑이라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녀석들은 신기하게도 우리 식구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밖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다가도 이름을 부르면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온다. 눈에 띄지 않다가도 식구들 발소리가 들리면 어느새 현관 앞에 와 앉아 있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얼룩이의 배가 남다르게 불룩한 것을 발견했다. 살이 쪘다기엔 배만 불룩한 것이 아무래도 임신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지나 배가 홀쭉했다. 새끼를 어디에 낳았을까 궁금했다.
수돗가 쪽에는 비를 막으려 차양을 쳐둔 자리가 있었고, 고양이들을 위해 그 안에 박스를 놓아두었다. 안에는 수건이나 다 해진 옷가지를 넣어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해주었다. 하루는 별생각 없이 그 자리를 들여다보니, 눈도 채 뜨지 못한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박스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며칠 후 다시 가보니 세 마리가 엄마 젖을 나눠 물고 있었다. 고양이는 새끼가 사람 눈에 보이면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해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당분간은 그쪽에 가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사람이 고양이 생각하다가 더위에 지친 것이다. 박스 바로 옆에 에어컨 실외기가 있었는데, 에어컨을 틀면 그 소음과 바람에 고양이들이 놀랄까 봐 도무지 켤 수가 없었다. 연일 기승을 부리는 더위 속에서도 녀석들 때문에 땀 흘리며 버티다 보니, 마음 한편으로는 ‘어떻게 다른 곳으로 슬쩍 옮겨줄 수 없을까?’ 하는 궁리가 싹트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새끼도 궁금하고, 박스를 옆으로 밀어볼 양으로 가보았는데 고양이들이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없다. 아마 어미 고양이가 내 기척을 눈치채고 피신시킨 모양이다.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박스를 딴 곳으로 옮겨놨다. 새끼는 어미가 알아서 잘 키울 것이고, 우리는 이제 마음 편히 에어컨을 켤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어미는 집에 와 챙겨둔 밥을 먹고는 새끼들에게로 가는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리던 지난 7월의 일이다. 폭우에 고양이가 걱정되어 현관문 앞 처마 깊숙한 곳에 새 박스를 마련해 주었다. 퇴근 후 돌아오니 남편이 들뜬 목소리로 고양이 보았냐고 물었다. 박스 속을 들여다보니 세 마리의 새끼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느새 제법 자란 녀석들에게 어미는 젖을 물리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새끼들을 한 마리씩 입에 물어 날랐을 어미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가 해코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리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로부터 새끼를 지키겠다는 모성이 그 녀석을 다시 우리 집으로 이끈 것이리라.
그 새끼고양이들은 사람 관계로 따지면 나한테는 손자뻘이다. 그래서 그런지 참 예쁘기만 하다. 딸아이는 “엄마 아빠는 사람 손자는 못 보고 고양이 손자는 보네”라며 놀린다.
그 뒤로도 비가 많이 쏟아졌지만, 어미와 자식이 그 속에 편안하게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비가 올 것을 알아채고 안전한 처소를 찾아든 어미고양이가 참으로 영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끼들이 자라니 박스가 좁아 보였다. 하지만 상자를 어떻게 교체해 줄 방법이 없었다. 어미가 알아서 하겠지 염려하는 마음은 있지만 ‘이제 네 힘으로 새끼들을 잘 키워라’라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고양이들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 나중에 살펴보니 어미는 새끼들을 풀밭 넘어 더 넓고 편한 곳으로 옮겨두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 그 후로도 어미는 새끼들을 위하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기는 정성을 보였다.
어미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짐승임에도 그 새끼를 위하는 마음이 감동적이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떠올랐다. 이 어미고양이 역시 새끼를 위해서라면 세 번이 아니라 위험이 있을 때마다 몇 번이고 이사하는 ‘묘모 삼천’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숭고한 뒷모습 위로, 요즘 우리 사회 부모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 자식 귀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희생은 꺼린다. 집에서 밥해 주는 것이 번거로워 꼭 저녁까지 어린이집에서 먹여달라는 사람도 있다. 집에서 다쳐서 오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시설에서 놀다가 조금만 다치면 선생님들을 죄인처럼 몰아붙인다. 자식을 키우는 고통과 책임보다는 나의 편안함이 우선시되는 세상이다. 보니, 희생을 피하려 아예 아이를 낳지 않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마음으로 정을 주기보다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내 자식만 소중하다고 여기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점점 작아진다 그러면서도 미래의 일을 걱정한다.
아이들의 거울인 어른들의 세계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름 없는 길고양이의 지극한 희생정신 앞에서, 사람인 우리가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며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