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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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이다. 팻말을 들여다보니 개양귀비로 불리는 관상용이라고 적혀 있다. 농염한 여인의 속눈썹처럼 꽃술이 유난히 길고 아름답다. 서너 장의 붉은 꽃잎은 고운 결의 시폰 천같이 하늘거린다. 그냥 꽃이 아닌 무한한 신비를 담고 있는 요정 같은 자태다.
이름 모를 병이 나에게 처음 나타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새벽 4시쯤에 눈알이 빠지듯 쑤시고 아팠다. 아침이 되면 눈이 아픈 것은 수그러들고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이 어찌나 심한지 데굴데굴 굴러야 할 정도였다. 오후가 되면 신기하게 아픈 게 없어지고 멀쩡해졌다. 방과 후에 병문안을 온 친구들이 꾀병으로 결석한다고 놀렸지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었다.
아들 다섯은 고스란히 다 건졌지만, 딸은 셋을 낳았으나 나 혼자 살아남았다. 어머니는 노심초사하면서 부산에서 소문난 ‘성분도 병원’ ‘메리놀병원’ 등으로 데리고 다녔는데 병명이 가는 곳마다 달랐다. 한 열흘 동안 병원에 다니면 아픈 증세가 없어졌다. 일 년에 한두 번 또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이름난 한의원도 찾아다녔다. 단골로 다녔던 ‘고태박한의원’ ‘편작한의원’ 그 이름들을 기억함은 고통이 뇌리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달이는 냄새조차도 싫은 한약이었지만, 아픈 것만 낫게 해준다면 어린 나이에도 못 먹을 약이 없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 늘 신에게 기도했다.
‘내일 새벽엔 눈알이 빠지듯 하는 통증이 제발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다행히 무사하면 아, 살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 번도 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같은 증세가 반복되었다. 큰 병원도 한의원도 일시적이었을 뿐 병을 뿌리뽑진 못했다. 하물며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는 무당도 있었지만 안 된다는 서슬 같은 아버지의 엄명이 나를 지켰다.
병고에 시달리고, 극심한 편식 때문에 중학교 1학년 때의 몸무게가 29kg이었다. 민물고기가 들어간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했고 조금만 먹으면 전부 토했다. 돼지고기도 못 먹었다. 멍게 해삼 같은 해산물은 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내 반찬은 별도로 만들어주었는데 도대체 무얼 먹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그 시절엔 보기 드물게 180센티가 넘는 장신이었다. 유전 인자는 어디로 갔는지 키도 자라지 못해서 사진을 보면 늘 맨 앞줄에 여윈 조그만 계집애가 눈만 커다랗게 뜨고 앉아 있는 게 바로 나였다. 경남에서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에 시험으로 합격해서 당당하게 들어간 걸 보면 그 와중에 공부는 어떻게 했을까 의문이다.
방학만 되면 내가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보낸 외가로 달려갔다. 남 형제 다섯이 북적거리고 장죽대로 늘 담배를 피우는 친할머니와 함께 방을 써야 하는 내 처지는 그곳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손녀가 올 날을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하루하루를 연필로 지워 나가며 날짜를 세는 외할머니의 사랑은 기다림이었다.
우물물로 씻어서 피부가 거칠어진다는 내 투정에 일하는 애를 시켜 냇물을 길어오게 해서 세숫물, 목욕물로 데워주었다. 토종꿀도 놋그릇에 받아서 손녀에게 늘 먹였고 꿀에 잰 인삼이며, 정과, 산자 같은 군것질거리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외가에서 하필 그 병이 도졌다. 병원에 가려면 십 리 산길을 걸어서 읍내로 나가야 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아프다고 우는 손녀를 바라보던 할머니는 감춰둔 비약을 꺼냈다. 약을 구하기 어려웠던 두메산골에서 마을 사람들은 뒷마당 잡초 사이에 양귀비를 몇 포기 심어서 그걸 삶고 졸여서 아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할머니는 위급할 때 쓸 요량으로 간신히 구해 기름종이에 싸서 농 안 깊숙이 보관하고 있었다. 조금 떼어서 숟가락에 물로 개어서 먹게 했는데 통증이 사라졌는지 편하게 잠을 잔 모양이다.
그런데 손녀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읍내에서 모시고 온 한의사가 급소에 침을 놓고 깨어날 수 있게 정성을 쏟았다. 할머니는 쌀을 갈아서 쌀물을 계속 입에 떠 넣고, 미나리즙을 내어 쉴 새 없이 넘기게 했다. 정작 당신은 밥은커녕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뜬눈으로 손녀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의 사랑이 하늘에 닿았던지 사흘 뒤 깨어났다. 할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내가 자칫했으면 내 강생이를 죽일 뻔했구나!”
좀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할머니의 눈물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새벽에 눈알이 빠지듯 고통스러운 예고가 있으면 영락없이 오전에 가슴을 칼로 저미듯 아팠고, 오후면 멀쩡해지던 희한한 병. 일시적으로 통증만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후로 반세기가 넘게 흘러갔지만 그런 증세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10년 동안 현대의학으로도 한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한 병을 아편이라는 비약이 고친 셈이다. 진통제 용도로 쓰이는 약이 내 병을 낫게 한 기적이 되었지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그 수수께끼를 아직도 풀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대로 병을 안고 살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무당이 시키는 대로 신내림을 받았다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초나라 항우의 애첩이었던 우미인이 항우가 유방 군대에 포위되어 사면초가에 이르자 항우가 지은 시에 맞춰 노래를 부른 후 자결했다. 그녀의 무덤 위에 핀 꽃을 꽃 양귀비, ‘우미인초’라고 부른다고 한다.
‘무슨 꽃으로 문지른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미당의 시를 읽으면 시어가 주는 의미를 떠나서 나는 가슴이 얼얼해지면서 애절함에 눈물이 난다. 내 가슴은 무슨 꽃으로 문질렀던 것인가. 어쩌면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꿈을 꾸고 있다가 양귀비꽃이 깨워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한 여인은 죽어서 꽃이 되었고, 그 꽃나무로 말미암아 나는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