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할매의 고향집 친구들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진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조회수6

좋아요0

시골 고향집 양지바른 뒤뜰에 장독대가 있다. 키 큰 놈 작은 놈, 뚱뚱한 놈 마르고 길쭉한 놈, 생김새도 제각각의 장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느 놈은 금방 들어왔는지 반질반질 때깔이 곱고, 어느 놈은 산전수전 다 겪고 세파에 시달렸는지 상처투성이다.
한낮 따스한 햇살을 찾아 막 부엌에서 나온 등 굽은 할매가 오늘도 집 안의 유일한 말동무가 있는 장독대로 가 장독 옆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버릇처럼 이야기를 건넨다.
상처뿐인 장독의 지나온 세월이 어찌했는지 궁금하여 혼자 중얼거리며 대화를 한다.
어디서 태어나 어찌어찌 살다 여기까지 왔는지, 몸에 새겨진 상처는 무슨 사연을 담고 있는지…. 철사로 이리저리 감싼 몸의 상처는 전쟁터에라도 나갔다 온 것인지 궁금한 모양이다.
“얘야? 대답 좀 해 보거라.”
“갓 시집온 빤질빤질한 새 장독보다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너의 지나온 세월이 궁금하구나.”
할매는 장독대에 앉아 벌써 반나절을 장독들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변함없이 유일한 대화의 상대는 시골집 양지바른 뒤뜰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런저런 모양의 장독들이 유일한 말동무다.
자식 숫자와 같은 일곱 장독들 중 제일 몸집이 크고 온몸엔 주렁주렁 훈장을 단 집 안에서는 ‘대장 장독’이라 불리는 녀석이 할매와 제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친구이다. 삶의 연륜이 비슷해서일까? 아님 큰아들처럼 듬직하고 세파에 시달려 온 삶 속에 녹아 있는 사연 사연들이 가슴에 닿아서일까?
대장 장독에는 큰 금이 세 개가 있다. 무척 아팠을 것 같다. 마치 수술 부위를 실로 꿰매듯 철사로 단단히 묶인 채 있다. 세 개의 금은 시대가 달랐는지 접착 부위의 색깔이 서로 다르다.
할매는 치마자락 끝을 움켜잡고 눈가로 가져가 고인 눈물방울을 훔친다. 녀석의 지나간 상처의 사연은 알지 못해도 할매는 가슴으로 이해하며 눈물로 대장 장독과 대화를 이어간다.
제일 최근에 생긴 금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는지 핏빛 색깔이 여전히 남아 있다.
두 해 전 겨울 어느 추운 날 밤 갑자기 밖에서 쩍 소리가 들려 동이 트자 장독대로 나가보니 대장 장독 몸에 큰 칼로 벤 듯 금이 가 있다. 아마도 간밤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날카로운 찬바람에 칼자국이 난 것이다.
술 주정뱅이 남편이 서너 날에 걸쳐 장독 대장의 몸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베인 자국에 접착을 하고 큰 몸뚱이를 이리저리 굴리며 상처에 붕대를 감듯 철사줄로 단단히 고정해 저민 상처를 치료했다.
그리고 석 달 뒤 늦겨울날 남편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할매는 그날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내쉰다. 할매는 가슴에 새겨진 깊은 상처로 숨이 막히나 보다. 어쩌면 대장 장독의 상처와 할매의 가슴속 상처는 같은 시기에 생긴 것으로 할매와 대장 장독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아는 사이이니 말없이도 대화가 가능한가 보다.
평생 남편에 대한 할매의 기억이란 술주정뱅이라는 것뿐이다. 젊은 시절 매일 밤 모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와 한풀이를 하거나, 혹가다 야수처럼 할매 몸에 올라타 정액을 쏟아내며 욕정을 불태우고는 고목나무 쓰러지듯 잠에 떨어지던 남편의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래도 마음이 여려 때론 말없이 잔정을 줄 때도 있어 그나마 자그마한 위안으로 삼고 평생을 살아왔다.
할매는 아직 핏기가 사라지지 않은 대장 장독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질 때마다 죽기 전 대장 장독을 정성스레 치료해 주던 남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그리워한다.
할매는 잠깐 졸음에서 깨어난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기억을 날려버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평생 일터인 쓰러져 가는 부엌으로 향한다. 부엌에는 장작불 숯검둥이에 검게 찌든 낡은 찬장과 부뚜막에 앉아 있는 무쇠 가마솥이 전부다. 하지만 이들 숯검둥이 때 묻은 찬장, 부뚜막에 앉은 검은 가마솥, 그리고 뒤뜰 장독대에 있는 상처투성이 장독이 할매와 같이 사는 유일한 친구들이다.
숯검댕이가 된 할매의 가슴속과 같이 까맣게 찌들은 찬장 그리고 검은 솥은 볼 때마다 위안이 되는 할매의 유일한 친구이며, 온몸을 철사로 칭칭 감고 버티며 살아가는 양지바른 뒤뜰의 상처뿐인 장독이 할매의 하나뿐인 말동무다.
낮 시간 잠깐 할매에게 햇살을 비추어 주며 위로를 해주던 해님도 할매가 부엌 일터로 가자 서산 너머로 얼굴을 감춘다.
할매의 시골집에는 적막이 흐르는 고요뿐이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세 친구들이 숨어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또 그다음 내일도 같이 살아간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