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순미(서초)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조회수6

좋아요0

주변이 산과 논밭으로 둘러싸인 외진 곳이었다. 그곳에 덩그러니 저층 아파트 16개 동이 있었다. ‘영남들국화아파트’였다. 역곡역으로 출발하는 주민 전용 버스 2대가 교통수단이었다. 신혼부부인 우리는, 그 아파트 맨 끝자락에 자리한 1동 5층 꼭대기 16평에서 삶의 둥지를 만났다.
새소리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부엌 창문을 열면 찾아오는 이 없는 무연고 공동묘지가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묘는 명절이면 더욱 쓸쓸했다.
그는 아침이면 부엌 창문을 열고 묘지를 바라보며 정중히 인사했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지만 나는 그처럼 대범하지 못했다. 묘지에서 나온 혼령이 집 안을 둘러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와 둘이 있을 때는 더욱 무서웠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꾀를 내어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여기는 단지 남자와 여자가 살고 있어.”
남자는 직장에 출근하며 푸른 청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듯 당당했다. 하지만 여자는 이웃 하나 없는 섬에 갇힌 회색빛 삶이 전개되었다.
아침밥을 꼭 먹어야 한다는 남자가 출근 후, 여자는 아이와 둘이 동굴 안에 갇힌 토끼와 여우가 되었다. 온종일 집 안에서 가는 시간을 부여잡고 하루를 동동거렸다.
어쩌다 아이가 감기에 걸리는 날은 여자가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날이었다. 여자는 포대기로 아기를 감싸서 업고 끈을 돌려서 앞쪽으로 단단히 동여맨 후 힘차게 계단을 내려갔다.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아파트 버스를 타고 ‘역곡’이나, 버스를 다시 갈아타고 ‘광명’으로 향했다. 여자는 아이를 업고 오가면서 세상 사람들과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는 그 시간이 싫지 않았다.
언젠가 여자는 아이를 업고 흰눈 쌓인 논두렁 길을 걸어서 부천의 ‘세종병원’을 다녀오기도 했었다. 왕복 3시간이 필요했다. 아이와 허둥지둥 병원으로 갈 때는 온갖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마음도, 진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햇살이 비치는 숲길을 걷는 것처럼 발이 자유로웠다. 길을 걸으며 여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삶은 그런 거라고, 덤불 속을 헤쳐 길을 찾아가듯 나만의 길을 개척해 가는 것이라고.
평상시에도 수압이 낮아서 졸졸 나오는 수돗물이었다. 아이의 무명 기저귀를 빨 때면 더욱 심하다고 느꼈다. 가능하면 기저귀는 모아놨다가 자정 무렵 한꺼번에 빠는 날이 많았다. 깊은 밤중 ‘덜덜덜’ 탈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가끔은 단수(斷水)가 되는 날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의 분유를 탈 물과 목욕 씻길 물이 필요했다. 양동이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가 지하에서 양수기로 퍼올리는 물을 받아 들고 전력을 다해 5층까지 들고 올라왔다. 그때는 그런 세상이었다.
남자의 출근길도 만만치 않았다. 이른 아침 마을버스를 타고 역곡역으로 나가서 지하철 1호선 경인선을 타고 대방역에 내려서 여의도에 있는 회사까지 걸어 다녔다. 발 디딜 틈이 없는 지옥철에서 사람에 부대끼다 보면, 잘 다려입은 하얀 와이셔츠가 구김이 가득한 채로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폭설이 내리는 겨울날은 남자에게 더욱 특별했다. 쌓인 눈으로 마을버스가 ‘하우고개’를 넘지 못했다. 그 눈을 다 치우고 나서야 버스는 출발했다. 그래서 남자는 1시간 반가량의 출근길을 정오에 출근하게 되는 쑥스러운 시간을 맞이할 때도 있었지만, 그를 타박하는 직장동료는 없었다.
따뜻한 봄날이나 서늘한 가을날에는 아파트 입구의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남자의 출근길 동행이 있었다. 딸과 둘째를 임신한 여자가 배웅했다. ‘아빠 가지 말라’고 떼를 쓰는 딸을 달래고 남자는 버스에 오르게 되는 날도 있었다. 삶은 고단해도 웃음으로 사는 맛이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4년 5개월을 살았다. 딸 둘을 낳고 막내로 아들을 임신하며 ‘영남들국화아파트’를 떠나 28평 고층아파트로 이사했다.
이제 ‘영남들국화아파트’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36층의 고층아파트가 세워져 새로운 주민을 맞이한다.
우리 부부에게 그곳은, 신혼의 꽃향기가 흐르는 공간을 넘어 40여 년의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자양분이며, 함께 걸어가는 인생길에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용기와 열정을 심어주었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