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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토끼, 토슬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영호(서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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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마을 도서관이야.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어린이 열람실 앞 의자지. 난 이곳의 마스코트야. 맞아, 난 의자에 앉아 있는 토끼지. 내 옆자리는 사진 찍기 좋은 명당이야. 그래서 어린이 열람실을 처음 방문하는 아이들은 꼭 내 옆에 한 번씩 앉아 보지. 찰칵! 그럼 함께 온 가족이 사진을 찍어주는 게 일종의 코스야.
하얗고 반질반질 윤기 나는 몸에, 발그레한 볼 터치. 헤벌어진 입에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 파란색 나비넥타이를 매고, 두 손에는 책을 들고 있지. 그러니 이 앙증맞은 토끼님 옆에 앉아 글을 읽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어. 그런데 누구 하나 내 옆에서 책을 읽지 않아. 아마 열람실 밖이라서 그런가 봐.
의자 오른쪽에는 시청각실이 있어. 오늘도 시청각실에서는 선생님이 그림책을 화면에 띄워 놓고 다양한 목소리로 읽어주나 봐. 문이라도 열고 하면 좋을 텐데 언제나 문은 꼭 닫혀 있어. 내 목구멍처럼. 책 읽어주는 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아. 몸이 가닐가닐, 귀가 근질근질. 하지만 내 두 발은 꽁꽁 묶여 있어. 아니 붙어 있지, 바닥에 찰싹.
“토끼야, 무슨 책 읽어?”
“에이, 가짜 책이잖아.”
맞아. 내 책은 가짜야. 글자가 없어. 꼬물꼬물 지렁이 물결만 그려 놓았어.
나도 글을 배우고 싶어. 책을 읽고 싶다고. 서당 개는 삼 년 만에 풍월을 뗐대. 난 오 년째 까막눈이야.

 

“슬기야, 사진 찍자.”
오늘도 난 배경일 뿐이겠지. 슬기라는 아이도 슬쩍 내 책을 훔쳐봤어. 마음 같아서는 책을 덮고 싶어. 창피해.
“우아, 토끼는 글자를 읽을 줄 아나 봐. 글자가 있어.”
‘어?’
“엄마, 토끼가 진짜 책을 읽고 있어요.”
슬기는 아직 글을 모르나? 꼬부랑 지렁이가 글자로 보이나 봐.
“정말?”
엄마가 다가왔어. 이제 들통이 나겠지. 슬기도 다시는 나를 책 읽는 토끼로 안 볼 거야. 거짓말쟁이로 알 게 뻔해.
“엄마, 무슨 책이에요?”
“음, 어디 보자. 오, 토끼 나라 글자네.”
슬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책을 함께 보았어. 슬기 엄마가 천천히 내 책을 읽어 나갔지.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책을 좋아하는 귀여운 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었어요.”
‘뭐지?’
나도 뒷이야기가 궁금했어.
“슬기야, 토끼 이름이 뭘 것 같아?”
“음, 토끼랑 슬기를 합해서 토슬이요.”
“오, 어떻게 알았지? 맞아, 토슬이!”
엄마는 슬기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어. 그리고 다시 내 책을 읽기 시작했지.
“토슬이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도서관에서 살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책도 실컷 빌려 보았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읽은 재미있는 책을 토슬이에게 들려주기도 했지요. 토슬이는 똑똑한 토끼가 되어 이렇게 도서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우아, 귀엽고 똑똑한 토슬이. 좋아요!”
나도 슬기가 좋았어.

 

“엄마, 오늘도 토슬이 책 읽어주세요.”
“오, 토슬이가 오늘은 또 다른 책을 읽고 있었구나.”
“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네?”
슬기네 엄마는 매일같이 내 책을 읽어주었어. 난 행복했지. 하지만 진짜 책이 아닌걸. 그럴수록 나도 책을 읽고 싶어졌어. 가짜 책 말고 진짜 책. 나도 책을 읽어주고 싶어.

 

어느 날인가 슬기가 책 한 권을 들고 열람실을 나왔어. 오늘 빌린 그림책인가 봐. 그런데 내 옆에는 이미 동호가 앉아 있었지. 친구냐고? 아니야, 동호는 내 친구가 아니라고. 나를 괴롭히고 골탕 먹이기 위해 태어난 못된 아이란 말이야. 조금 전에도 젤리를 내 입에 넣으려다가 자꾸 흘러내리니까 내 콧잔등을 세게 때렸어. 난 눈물이 핑 돌았지. 걔가 그런 애야.
맞다, 슬기. 슬기야, 도망가! 동호가 너도 괴롭힐지도 몰라. 그런데 슬기는 동호 앞에 우두커니 섰어.
“오빠, 나 토슬이 옆에 앉으면 안 돼요?”
슬기의 입술이 모이고 눈가가 축 처졌어. 비를 쫄딱 맞은 새끼고양이 같았지. 동호가 얼른 옆으로 비켜 앉았어. 슬기 얼굴이 환하게 빛났지.
“고맙습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도 슬기는 꾸벅 허리를 굽혔어.
“토슬아, 오늘은 내가 책 읽어줄게.”
슬기가 어느새 글자를 배웠나 봐. 슬기는 내게 그림책을 보여주며,
“토슬이가 살았어요.”
다음 장을 넘기며,
“슬기도 살았어요.”
또 다음 장에서는,
“엄마도 살았어요.”
그리고 동호한테 물었어.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슬기의 그림책을 빼꼼 훔쳐보던 동호가 깜짝 놀랐어.
“나? 도, 동호야.”
“아, 동호 오빠도 살았어요.”
슬기는 한참을 알고 있는 이름들을 빌린 책 속에 살게 했어. 선생님도, 친구들도, 꽃도, 구름도.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책을 덮었지. 요 녀석, 책을 마음대로 읽은 거였구나. 슬기가 고마웠어. 너무 귀여웠지. 슬기는 그림책을 동호에게 넘겼어. 그리고 말똥말똥 반짝이는 눈으로 오빠를 올려다보았지. 동호도 책을 읽기 시작했어.
“도, 동호가 살았습니다.”
“할머니도 살았습니다.”
“스, 슬기도 살았습니다.”
“토끼도….”
“아니, 토슬이!”
“아, 토슬이도 살았습니다.”
동호도 슬기를 따라 책을 마음대로 읽었지. 동호가 책을 덮자 슬기가 또 고개를 숙였어.
“책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날, 동호는 낱말 공부 그림책을 들고 슬기를 기다렸어.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동호는 슬기가 오기 전에 그림책을 더듬더듬 읽으며 준비했지. 잘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사서 선생님을 찾아갔어. 글자를 알아서 나오는 동호의 미소가 참 눈부셨어.
슬기가 읽는 이야기와 그림도 서서히 맞아가기 시작했지. 슬기도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거야. 오! 진짜로 나에게 책을 읽어주게 된 거지. 나도 틈틈이 글자를 익혔어. 동호가 읽을 때 한 번, 동호가 슬기한테 읽어줄 때 한 번, 슬기가 읽을 때 또 한 번. 똑같은 책을 세 번씩이나 읽었더니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어.
토, 끼라는 글자도 익혔고, 토, 순, 이라는 내 이름도 익혔어. 슬기의 슬자는 익히는 데 좀 오래 걸렸지만. 내 마음도 어느새 풀렸나 봐. 동, 호라는 글자도 익혔으니까. 히히. 너무 행복했어. 하지만 그럴수록 이제 나도 진짜로 이야기를 읽어주고 싶었어.

 

그런데 며칠 후였어.
“토슬아, 나 이사 가야 한대.”
슬기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어.
“토슬이 네 목소리도 듣고 싶은데. 그래서 오빠랑 내가 너한테 선물을 준비했어. 나 대신 다른 아이들한테 책 많이 읽어줘. 약속!”
슬기는 책을 들고 있는 내 손에 새끼손가락을 갖다 댔어. 따뜻해. 슬기는 동호한테도 인사했어.
“오빠, 그동안 책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하트가 크게 그려진 카드를 동호에게 내밀었지. 쭈뼛거리며 카드를 받는 동호가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어. 슬기가 가면 난 또 혼자겠지. 동호도 더는 책을 읽어주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난 도서관 입구를 지키는 장식품에 불과하잖아.

 

다음 날,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다가왔어. 다시 색칠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쩌면. 이사하는 건가? 잘못하면 폐기 처분이 될지도 몰라. 내 옆에 있던 소원나무도, 나무의자도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이젠 내 차례인가 봐. 그래도 슬기한테 이런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야.
영차!
아저씨들이 나를 들어 올렸어. 역시, 가는 거구나. 그래도 행복했어. 토끼 중에 나만큼 책 냄새를 많이 맡아본 친구도 없을 거야. 그거면 됐어. 내 평생소원이었던 글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되잖아.

 

그런데 아저씨들은 나를 멀리 옮기지 않고 한 뼘 정도 앞으로만 옮겨다 놓았어. 난 부끄러웠지. 내가 그렇게 무거웠나? 난 밥도 안 먹는데.
그런데 갑자기 한 아저씨가 내 뒤통수를 만지는 거야. 이럴 때는, 맞아, 슬기가 읽어주었던 책에 있었어.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아저씨가 내 작고 도톰한 입술을 만졌어.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지만 목소리는 내 안에서만 맴돌았지. 어, 그런데 가만 보니 내 귀에 뭔가가 걸리더니 입 앞까지 이어졌어. 이거, 마이크잖아. 이사 가는 게 아니었나? 내 지렁이 책 위로는 번호가 달린 새 판도 놓였지.
아저씨들은 또 책에서부터 내 팔, 어깨, 목을 지나 다시 뒤통수까지 안마하기 시작했어. 뭐지? 곁눈질해 보니 얇은 전선이야. 잠깐 내 몸 이곳저곳이 간질간질하더니 작업이 금세 끝났나 봐. 아저씨들은 나를 원래 자리로 옮겨놓고는 내 책 위에 얹은 판에서 2번을 눌렀어.
“아기 돼지 삼 형제. 포동포동하게 살찐 아기 돼지 삼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잘 나오네요.”
아저씨들은 흐뭇하게 웃으며 사라졌어.

 

잠시 후, 사서 선생님이 표지판을 들고 왔어. 얼른 읽어보았지.
“도서관 바꾸기 아이디어 대상, 책 읽어주는 토슬이! -강동호, 이슬기 작품.”
표지판은 내 왼쪽에 자리를 잡았어.
이게 바로 슬기가 말한 선물인가 봐. 난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지 뭐야. 
내 책을 들여다봤어. 번호 옆에 책 제목이 쓰여 있었어. 1번 토끼와 거북이부터 6번 금도끼 은도끼까지. 내 책은 글자로 가득하게 되었지. 사서 선생님도 번호를 하나하나 눌러보며 내 목소리를 확인했어.
“잘 나오네. 이것 말고도 번호 책이 다섯 개나 더 있으니까 2주일에 한 번씩만 바꿔도 석 달은 걸리겠네.”
사서 선생님은 반달 입을 한 채 열람실로 들어갔어.

 

“우아, 토끼가 책을 읽어준대.”
오랜만에 난 다시 인기를 얻었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하기로 했어요.”
장난꾸러기들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
이제 나는 책 읽어주는 토끼가 됐어. 슬기야, 고마워. 나중에라도 꼭 한번 놀러 와야 해. 내가 진짜로 책 읽어줄게. 그리고 너와 한 약속처럼 다른 아이들에게 책 열심히 읽어주고 있을게.
내가 책 읽어주기를 끝낼 때면 동호가 슬며시 내 옆에 앉아. 그리고 이번에는 동호가 나에게 책을 읽어주지. 이제 동호는 더는 말썽쟁이, 장난꾸러기가 아니야. 내 친구거든. 책 친구. 책 벗!

 

얘들아, 너희들도 책을 읽으며 꿈을 꿔 봐.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지거든. 그리고 도서관으로 놀러 와. 함께 책 읽자. 책 읽어주는 토끼, 토슬이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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