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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주의보

한국문인협회 로고 신동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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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 색깔의 하늘은 티끌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태양은 작열하고, 달구어진 대지는 메말라 있어 미세한 바람에도 흙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물이 흘러야 할 도랑도 바싹 말라 있어 그곳에 뿌리를 박은 초목들도 시들시들 맥을 추지 못했다. 군데군데 웅덩이에 생을 마감한 물고기들이 널브러져 있어 떼죽음한 주검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주유천하를 직업 삼은 그도 처음 본 광경이었다. 그는 요의(尿意) 때문에 단잠을 깼다.

 

그는 그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여행작가였다. 처음 그의 꿈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이었다. 외무고시에 합격한 아버지는 평소 여행을 즐겼으므로 초임 때부터 내직보다는 외직을 선호했다. 그러나 약골 집안 내력 때문인지 건강에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정년이 멀었는데도 병치레를 많이 했는데, 의사들은 일종의 회향병(懷鄕病)이라고 진단했다. 정년퇴직 후 곧바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기 싫어 진로를 바꾸었다. 외시 공부를 집어치우고 행시에 전념하여 5급 공채에 합격, 관료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의 관료 생활은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다. 각종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표창도 받았다. 50대 초입에 서기관이 되었으니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 무렵 총선이 있었다. 그의 고향 선거구는 대대로 야당 강세 지역이었다. 집권 여당은 선거 때마다 설욕을 다짐했지만 투표함을 열어 보면 역시였다. 당에서는 이번만은 참신하고 장래가 엿보이는 지역 출신 인재를 내세우면 승산이 있다고 그를 꼬드기며, 억지로 그의 옷을 벗겨 전략공천으로 내리꽂았다. 그러나 결과는 뻔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신출내기가 최다선인 야당 중진을 당해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당에서는 그를 방기한 듯싶었다. 그는 염량세태(炎겆世態)의 인심에 환멸을 느꼈다. 자신처럼 순진하고 맷집이 약한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들면 낭패 보기 십상이라는 자각도 하였다. 그는 비정한 정치판에 뛰어든 자신을 자조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출구를 찾아 노심초사했다. 길이 있었다. 평소 글재주가 뛰어났고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다니며 지구촌 곳곳을 섭렵하였으므로 여행작가로서의 조건을 갖춘 터였다. 그 분야의 등용문도 통과했다.

 

친족 여행
그는 여행작가로서의 첫 출발, 일종의 출정식을 특이하게 하고자 기획 중이었다. 직계가 아니면 친족도 남 보듯 하는 각박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무너지는 윤리를 정립하는 차원에서 솔선수범을 보이고 싶었다. 근친을 점검해 보니 대략 20여 명 정도였다. 프로그램을 짜 보았다. 학생층이 많았으므로 방학 기간, 유흥지보다는 학구적인 곳, 거리 역시 가까운 지역, 3박 4일 일정, 경비는 그의 부담…. 정리된 조건을 친족들에게 제시하였더니 대찬성이었다. 여행 대상지를 고르는 일 역시 그의 몫이었다. 여러 지역 중에 베트남의 티앤무 사원이 적당할 성싶었다. 베트남 민주화투쟁의 본거지였던 티엔무 사원은 5·18 민주 성지 광주와 닮았고, 인근에 응우엔 왕조의 도읍지였던 후에가 위치했는데 후에는 신라의 고도 경주와 연을 맺고 문화적인 교류를 시행 중인 터라 안성맞춤이었다. 집 가까운 M공항에서 다낭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도 마련되어 있어 멀리 인천공항까지 가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베트남의 역사를 일별했더니 한국과 유사점이 많았다. 양국 모두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서글픈 역사가 존재했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할 당시, 베트남의 명칭인 교지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사실, 19세기 무렵, 서양 열강들이 앞다투어 동남아의 약소국을 침탈할 때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점 역시 닮은꼴이었다. 1945년에 종전된 제2차 세계대전은 미·소·불·중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므로 일본, 독일, 이탈리아 3대 전범국, 즉 추축국(樞軸國)은 그들이 식민지 삼았던 약소국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세아 약소국들은 모두가 독립하였으나 베트남은 별개였다. 베트남을 통치 중인 프랑스는 패전국이 아니고 승전국인 때문이었다.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국민들은 프랑스에 독립을 요청하였으나 프랑스는 들어주지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오직 투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베트남 국민들은 1946년 2월부터 1954년 7월까지 장장 8년간이나 프랑스와 독립 투쟁을 벌였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칭한다. 디앤비앤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물리쳤으나 곧바로 독립을 일궈내지는 못했다. 베트남이 독립하지 못한 것은 미국 때문이었다. 대 프랑스 전에서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지원했던 미국이 호치민이 주장하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꺼린 때문이었다.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은 1955년 자신들의 영향권인 남베트남에 고딘디엠을 수반으로 하는 친미 정부를 세웠고, 친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은 북베트남에 인민 정부를 세워 미국과 대치했다. 그 무렵 남베트남에 정변이 연속되었다. 남베트남 내부의 친공산주의자들이 북베트남의 게릴라를 끌어들여 미군과 항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여 마련한 동남아의 교두보를 쉽게 내어줄 미국이 아니었다. 우방인 한국군까지 차출하여 적극적으로, 더 깊숙하게 남베트남 사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비둘기부대를 시작으로 청룡, 맹호. 백마부대가 20년 동안이나 참여했던 이 전쟁이 바로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인 것이다. 미국은 막대한 군비를 쏟아부었으나 전투에서 실익이 없었다. 열대의 기후에다, 작전 지역 전역이 밀림 지대이며, 베트콩 특유의 땅굴 작전, 끈질기고 귀신 같은 게릴라 작전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통치자인 고딘디엠의 잇따른 실정은 미국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남베트남은 미국의 입장에서 계륵(鷄肋)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미국의 조야는 들끓었다. 하루빨리 철군하라는 여론이 빗발쳤으므로 1973년 그동안 공들였던 미국은 베트남 포기를 선언하고 1975년 완전 철군을 단행했다. 끈질긴 항쟁으로 외세를 물리친 호치민은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통일 베트남의 국부가 되었다. 호치민 사망 후 그의 후계자들이 정권을 이어받았는데, 현명하게도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친서방 정책을 편 결과, 지금은 한국을 비롯한 친서방 국가와 친하게 지내며 신흥 경제 강국으로 도약 중이다.

 

여름방학 중인 어느 날, 친척들을 인솔하여 장도에 올랐다. M공항을 출발한 지 한나절 만에 다낭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현지 가이드와 미팅 후 대기 중인 전세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남행하고 있었다. 목적지가 다낭과 호치민 중간에 위치한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열대의 이국 풍경을 본 가족들 특히, 학생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환호작약했다. 세 시간여 만에 흐엉강 유역의 후에시 경내에 접어들었다. 성채 곳곳에 꽃인 붉은색 베트남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왕궁이 아련하게 바라다보였다. 왕궁 부근은 차량 통행 불가였으므로 버스는 주차장에 세우고 전용 ‘툭툭이’를 이용했다. 왕도 후에는 1968년 북베트남군의 구정 공세 때 25일간이나 그들에게 점령된 바 있었고, 그 여파로 1만여 명의 남베트남 국민들이 전쟁의 참화를 입었다는 것이다. 1805년 자롱황제 때 착공하여 1832년 민망왕 때 완성되었다 한다. 툭툭이에 몸을 싣고 성벽이 둘러진 돌담길을 한참 가자 궁궐의 대문이 나타났다. 신분에 따라 드나드는 문이 다른 다섯 개의 출입구가 있었다. 관광객 전용 문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로 군데군데 연못 있었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로 연결된 회랑은 자금성의 후원 ‘이화원’을 닮아 있었다. 이곳 관광의 백미는 역대 왕들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었다 1대 자롱황제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홀수, 왼쪽은 짝수 왕 순으로 마주 보게 배열되어 있었다. 사진으로 보아도 인물이 가장 출중한 임금은 2대 민망왕이었다. 민망왕은 43명의 아내와 142명의 자식을 두었다 한다. 왕궁은 전쟁의 피해로부터 완전히 복구되었다지만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많아 보였고, 볼 것 역시 별로였다. ‘안 보면 후회되고 보면 더 후회된다’는 세간의 말이 실감났다.

 

티엔무 사원으로 향했다. 사원은 흐엉강 물줄기가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조망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규모는 별로인데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베트남 민주화 투쟁을 선도한 틱광득 스님이 생전에 계신 사원인 때문이었다. 사원 별채에 스님의 유품관이 있었는데, 소신공양 때 불에 타지 않았다는 스님의 심장 사진도 걸려 있고, 소신공양 차 출정 당시 손수 몰고 갔던 오스틴 승용차도 전시되어 있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미국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이 나라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일본 패망 후 남한의 통치를 신탁받은 미국이 이승만을 밀었듯, 남베트남에서도 자국에서 교육받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고딘디엠을 지원했다. 남베트남의 통치지가 된 고딘디엠은 온 국민을 품에 안은 폭넓은 정치 대신, 차별적인 종교 정책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이 나라 국교나 다름없는 불교를 탄압한 게 첫 번째 실책이었다. 불교 신자들을 공산주의 신봉자로 몰아 무조건 투옥, 처형하고 국가기념일이었던 석가탄신일도 없애 버렸다. 이러한 그의 폭정은 남베트남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를 등지게 만들고 그 배후인 미국을 저주하는 역효과로 나타났다. 남베트남 국민들은 고딘디엠과 미군 축출을 위한 대규모 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열세인 그들의 투쟁 수단은 게릴라전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타개책을 고심 중이던 시민운동가 틱 스님은 무저항으로 대세를 뒤집을 묘수를 찾아냈다. 1963년 6월 11일 스님은 자신의 승용차에 기름통을 가득 싣고 천리 거리 사이공(현 호치민시)으로 향했다. 미국 대사관 앞에 도착한 스님은 전 세계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소신공양을 수행하는 엄숙하고 희귀한 장면은 메스컴을 통해 온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미국을 비난하는 들끓는 여론은 지구촌 전체로 전파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의 베트남 철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장면을 촬영하여 전 세계에 배포한 AP통신 사진 기자 말콘 브라운은 196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여파는 이웃 나라 캄보디아에까지 미쳤다. 미국의 사주하에 국왕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군부 지도자 론놀은 갑작스런 미국의 철수 작전에 매우 놀라 미군을 뒤따라 하와이로 도주하였으므로 캄보디아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 틈을 타 친공산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에 무혈입성하여 거저 정권을 잡게 되고, 종내는 ‘킬링필드’의 만행을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해외여행주의보
그가 기획한 3박 4일의 친족 여행은 호평이었다. 각박해진 현실에서 귀감이 되는 프로그램이었다며 메스컴에서도 크게 다루었다. 그 일을 계기 삼아 열정적으로 연출한 다큐멘터리는 수백 편에 달했는데, 그중에서 남북 양극의 취재, 만리장성 종단 프로는 단연 압권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5대양 6대주, 그의 족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태국 푸켓의 피피섬 취재를 마치고 M공항을 통해 귀국한 바로 다음 날, 이 공항에서 대참사가 발생했다. 탑승객 전원이 목숨을 잃은 미증유의 항공 사고였다. 새때와의 충돌로 인한 원시적인 사고라 했다. 그는 며칠 전 꾼 야릇한 꿈이 이 사건을 현몽하는 전조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잠기자 갑자기 불길해지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안방 삼아 지구촌을 누비는 처지인 그는 이번 참사가 자신의 일만 같아서 영령들을 애도하는 한편, 정부 당국에 성토와 울분을 쏟아냈다. 일개 미물에게 당하다니!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아내 역시 덩달아 문명의 헛점을 성토 중이었다. 그 화살은 곧바로 남편에게 날아들었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 잦은 해외 출장은 무리라며 이제 내려놓을 때가 온 것 같다’는 취지의 경고였다. 아내는 예언자인 것처럼 진즉부터 하늘길의 우려를 표명했었다. 행여, 횡액을 당해 제 발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경우, 가족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뒤치다꺼리 비용 역시 천문학적이라며 은근히 겁도 주었다. 일종의 <해외여행주의보> 성격의 멘트였다. ‘재수 없는 소리 그만 치우라!’ 퉁을 놓긴 했지만 새겨들을 가치가 있는 참견이긴 했다. 건강도 예전만 같지 못하고 육중한 장비들을 걸머멘 채 지구촌을 누비는 일도 차츰 힘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M공항 사고 이후 지구촌 곳곳에서 대형 항공 참사가 연발하였으므로 아내의 쓴소리는 더욱 힘을 얻고 있었다. 비행기 사고 말고도 걸림돌은 또 있었다.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 치안이 엉망인 동남아 후진국에서 벌어지는 살인, 납치 등 만연한 범죄도 한몫 거들었다. 아내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활약하던 박항서 감독의 실화도 예로 들었다.
어느 날, 박 감독이 공항에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는 목적지와 다른 엉뚱한 곳으로 차를 모는 것이었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시 어느 외곽지대였다. 건장한 체구의 젊은이들이 득실거리는 범죄 소굴이었다. 이제 죽었구나! 체념하고 있는데 일당 중의 누군가가 그를 알아보고는 내보내 주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아내의 참견은 일상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녹음기를 틀어댔다.
“치안이 엉망인 동남아는 절대 혼자서 다니지 마세요.”
매스컴에 대형 항공기 사고 보도라도 뜨면,
“이젠 비행기도 함부로 탈 일이 아니더라구요.”
하는 그는 결국 아내의 잔소리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천직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치에서 손을 뗄 때처럼 과감하면 분명 출구가 있을 성싶었다. 숙고 끝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굳이 현장에 가지 않더라도 좋은 작품을 생산하는 방법이 생각난 것이었다. 소설 형식의 다큐 작품 시도였다. 세계사에 화려한 족적을 남긴 여걸 중에서 동서양 각 한 명씩을 선정, 시작을 해 보기로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
그는 서양의 몫으로 클레오파트라를 선정했다. 그러자면 그녀의 생애와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고대 로마의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 로마는 원래는 제국이 아니었다. 기원전 60년 무렵부터 원로원 중심의 집정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84년,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이듬해 유파테르 신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로마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정계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당시 유력자였던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손잡고 1차 3두 체제를 구축하여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몸소 갈리아 원정을 단행하여 갈리아 전체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는 군공도 세웠다. 마침내 정적인 폼페이우스와 로마 원로파들을 제압한 후, 공화정 체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암살되었다. 그의 사후 그의 후계자로 지목한 옥타비우스(일명 아우구스트)가 공화정을 뒤엎고 제정(帝政) 로마의 길로 들어섰으므로 그는 본의 아니게도 고대 로마의 공화정을 뒤엎은 원인 제공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군인, 정치인이기에 앞서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 등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고대 로마가 내세웠던 3두 정치, 곧 과두(寡頭) 집정제는 폐단이 많은 정치 구조였다. 민주정치의 기초인 공화정이라는 명분은 있었으나, 한 배를 탔던 영웅들 간의 암투가 항상 말썽이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듯이 그들의 영원한 공생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당시의 실권자인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을 등에 업었고, 또한 실권자인 카이사르는 민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서로를 견제하며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던 두 사람 앞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기원전 48년,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의 대평원 파르살루스에서 두 세력 간에 격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이 났다. 승리한 카이사르는 그 여세를 휘몰아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카이사르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로마는 온통 소란에 빠졌다. 원로원 의원들은 허둥대며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가고 관리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방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위기 모면을 위해 카이사르에게 화해의 사절을 보내라는 측근의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벽이 튼튼한 브룬시다음 요새를 비우고 바다로 철수했다. 스페인에서 지원군이 오게 되었으므로 바다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상대의 실책으로 카이사르는 로마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스페인 해전에서 크게 패한 폼페이우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집트로 발걸음했다.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집트 왕을 만나보기도 전에 왕의 장교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쫓기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상륙한 카이사르는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
철학자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를 가리켜 “그녀의 코가 1cm만 낮았어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갈파한 바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69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51년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망하자 18세의 나이로 동생인 프톨로메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는 왕조의 전통에 따라 친동생과 결혼하였지만 동생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시리아로 망명해 있었다. 예상치도 않았던 카이사르의 이집트 입성은 친동생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미인계를 활용했고 그 계책은 적중했다. 그녀의 미모에 홀딱 반한 카이사르는 마침내 클레오파트라 지지를 선언한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돕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나일강에 빠져 죽었다. 왕이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이번에도 왕가의 전통에 따라 어린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하고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질적인 권력이 클레오파트라에게 있었다. 카이사르의 정부(情婦)가 된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그녀의 나이 22세 때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개선하는 카이사르를 따라 아들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로마로 갔는데, 이때, 로마 사람들과 원로원 등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자신의 소생인 카이사리온을 후계자 삼으려 한다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이 사건은 후일 그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하는 한 원인도 되었다. 집정관이었지만 원로원과는 대립 관계였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폼페이우스 극장 안의 폼페이우스 쿠리아에서 원로원 회의 도중 반대파 의원들에게 죽임당한 것이었다. 60∼70명에 달하는 공모자들은 카이사르를 23번이나 칼로 찔러 죽였다. 그의 영구 독재가 공화정의 붕괴를 위협한다는 명분이었다. 반대파 중에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브루투스도 가담해 있었다. 기원전 100년에 탄생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카이사르 암살 후, 그의 후계자가 된 옥타비우스가 안토니우스, 레피투스와 함께 로마 정국을 이끌게 된다. 그 사건을 역사에서는 2차 3두 정치라 칭한다.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정치적인 후원자를 잃게 된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강자를 찾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2차 3두 정치의 한 사람으로서 동방을 책임진 안토니우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화려한 연회와 특유의 카리스마로 안토니우스 유혹에 성공했고 결혼하여 정치적으로 동맹 관계를 맺는다. 안토니우스 아내가 되어 세 자녀를 낳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힘을 빌어 이집트를 로마와 대등한 위치에서 동방정책을 다스리는 중요한 축으로 발전시켰다. 그러자 로마 정계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비판이 거셌다. 그런 와중에,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낳은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선포하자, 원로원과 그의 경쟁자인 옥타비우스가 들고 일어났다. 두 세력 간에 정면충돌이 벌어졌다. 그들의 싸움 중 가장 규모가 큰 전투는 바로 기원전 31년 발생한 악티움 해전이었다. 옥타비우스 군과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이 맞붙은 해전은 옥타비우스의 승리로 끝났고,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퇴각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기원전 30년, 옥타비우스의 로마군이 알렉산드리아를 옥죄며 공격해 오자 안토니우스는 패배를 깨끗하게 받아들이고 자결하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가 로마에서 치욕적인 개선식에 끌려 나가느냐, 아니면 전통에 따라 독사를 품에 안고 생을 마감하느냐 양자택일의 순간에서 그녀는 후자를 택해 독사의 독을 먹고 생을 마쳤다. 빼어난 미모로 일세를 풍미하던 클레오파트라의 화려했던 정치 경력과 남성 편력은 그녀의 나이 39세로 막을 내렸다. 클레오파트라는 단순히 매혹적인 여왕이 아니라 지혜롭고,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하며, 외교와 정치술에 뛰어난 지도자였다고 한다. 로마와의 피나는 권력투쟁 속에서 이집트의 발전과 독립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거대한 로마의 압도적인 힘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녀의 죽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종말, 더 나아가 헬레니즘 세계의 최후를 의미했다. 그녀 사후,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고대 문명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되찾지 못한 채, 평범한 일개 국가의 존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공화정의 로마 역시 이 정치 체제가 오래지 못하고 기원전 27년, 새로운 강자로 군림한 아우구스트가 황제의 위에 등극함으로써 공화정이 무너지고 이후로 로마는 제국의 길로 접어들어 네로와 같은 폭군이 지배하는 독재국가가 되었다.

 

대영박물관
아버지가 이집트 대사로 재직 당시, 현지에서 역사를 공부하던 그는 한 가지 의문점을 발견하였다. 한때, 이집트를 이끌었던 클레오파트라와 희대의 영웅 카이사르 두 사람 모두 무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카이사르의 경우, 화장을 끝낸 순간 홍수가 져 물에 떠내려가 버렸다는 설이 존재했지만, 클레오파트라의 경우는 깜깜했다. 이집트의 사학자들이 그녀의 무덤을 찾기 위해 최신 기법인 3D 스캔을 이용 중인데 그 성공 여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정보가 전부였다.
그는 영국으로 자리를 옮긴 아버지를 따라가 런던 생활을 했다. 그가 영국에서 본 가장 인상 깊었던 의식은 버킹검궁 앞에서 열리는 왕실근위대 교대식이었다. 그때마다 궁 주변은 인산인해였는데 런던에 체류 중인 외국 관광객 거의는 시각에 맞춰 궁 주변으로 모여든 때문이었다. 궁 주변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리닛치 천문대, 국회의사당, 런던 브릿지 등 명소들이 몰려 있었다. 영국의 대외적인 얼굴이라는 대영박물관도 방문했다. 이 박물관의 소장품 거의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유물들이었는데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석조 흉상’과 ‘로제타석’ 외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미이라도 여러 구 있었다. 오른쪽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람세스 2세의 석조 흉상은 1816년 조반니 벨조니가 룩소르 신전 유적에서 발굴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사들이 자국으로 흉상을 옮기려다가 실패한 자국이라 한다. 무게가 7.5톤인 이 흉상은 하나의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였다.
로제타석은 1799년 알렉산드리아의 로제타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빗돌인데 길이 114cm, 폭 72cm의 규모였다. 기원전에 작성된 고대 이집트의 칙령을, 상형문자, 일반 대중문자, 왕조 공용어인 그리스 문자, 이 세 가지로 새긴 돌비인데 이 빗돌 역시 1801년 영국이 프랑스를 이집트에서 쫓아내면서 빼앗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이 비문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실마리가 된 귀한 유물이었다. 1천6백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신라의 금귀걸이도 전시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반출된 수많은 보물 중의 하나로서 1938년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매입한 것이라 한다. 박물관 2층에 전시된 미이라관으로 갔다. 전시된 미이라 중에는 육탈된 그 자체를 장식하지 않고 유리관에 그대로 넣어 놓은 것도 있고, 몸 전체를 값비싼 천으로 감싼 화려한 미이라도 볼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도 찾지 못한 클레오파트라의 미이라가 이곳에 전시돼 있다기에 유심히 살폈으나, 뼈대가 너무 왜소하여 여장부라는 이미지와 걸맞지 않아 의아해하였는데 동명이인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서양 대상의 작품을 완료하였으므로, 이번에는 동양에서 그 대상을 찾아야만 하였다. 동양에서 클레오파트라에 대응할 만한 여걸은 중국의 측천무후가 아닐까 싶었다. 중국 역사상 나라를 주무른 여걸로 여태후, 서태후 등 수없이 많지만,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즉위한 여걸은 무측천이 유일했다. 30세에 황후가 되고 66세에 황제가 되어 80세로 죽을 때까지 권력의 정상에 있었으니 가히 여걸이라 할 만했다. 측천무후는 영문으로 ‘MuZetin’으로 표기되므로 무측천으로도 통한다.
무(武) 씨 성의 그녀 집안은 당 태종 때부터 공을 세운 무인 집안이었다. 미모를 자랑하는 무조(武照)는 당나라 2대 태종 때 입궐하여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태종의 병수발을 하였지만 잠자리는 갖지 못했다 한다. 태종이 승하하자 선왕의 궁녀들은 모두 퇴출되는 궁중 법도에 따라 궁을 떠나 갑업사에서 수도 중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고종이 감업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무조를 만나게 된다. 고종은 그녀가 아버지의 후궁으로 있을 때부터 마음에 두었던 터라, 그녀를 궁으로 데려와 ‘무미랑’이라 이름 지어 부르며 후궁으로 삼았다. 영특한 무미랑은 후궁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술수와 간계를 총동원하여 황후인 ‘소숙비’를 내치고 황후의 자리를 꿰찼다. 고종과의 사이에 아들 넷, 딸 하나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이흥’이고, 둘째가 ‘이현’, 셋째가 ‘이철’, 넷째가 ‘이단’, 하나뿐인 딸은 ‘태평공주’이다.
첫째 아들 이흥이 태자가 되었다. 고종은 말년에 병이 들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 없자 무황후가 정권을 좌지우지하였다. 야심만만한 무황후는 고종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염려하여 태자를 독살하고 둘째 이현도 내쫓았다. 병석에 누운 고종은 무황후의 야욕을 눈치챘으나 중병에 걸려 있어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고종이 56세로 죽자 셋째아들 이철이 즉위했는데 그가 당나라 4대왕 중종이다. 그러나 중종 역시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황후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 뒤를 넷째 이단이 이어받아 5대 예종이 되었다.

 

온갖 술수로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무황후에게 대적하는 왕족이 있었다. 양주 자사로 있던 이경업(혹은 서경업)이었다. 그는 684년 중종의 복권을 명분으로 양주를 근거지 삼아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기반 구축을 마친 무황후가 보낸 30만 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황후가 이경업을 서경업으로 만들었다). 그 사건은 황태후 자격이었던 무황후를 황제로 만든 결정적인 명분으로 작용했다. 무황후는 걸림돌이 될 명재상 장손무기에게 누명을 씌워 자결케 하고, 일족을 몰살하여 정권 탈취의 기반을 쌓았다. 690년 10월 16일 무황후는 예종을 궁중에서 내쫓고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올랐다. 국호를 당(唐) 대신 무씨가 세운 주(周)나라라는 뜻으로 무주(武周)라 칭하고 서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동시에 자신의 칭호도 측천무후로 정하고 이름 역시 조(曌)자로 조어(造語)하여 아무도 쓰지 못하게 했다.
측천무후는 이처럼 온갖 술수와 잔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당나라를 멸하고 무주를 세웠으나 치세에 탁월하여 통치 15년 동안(690∼705) 반항하는 세력이 없었다. 그 까닭은 항상 수하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하였으며, 옳은 정책은 즉각 실행에 옮겼고, 국법 역시 가족이나 측근들에게도 엄히 적용하여 민심을 얻은 때문이었다. 역대 중국의 골칫거리인 이민족 통제에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토번(서강)을 비롯한 서역(지금의 중아아시아)을 정벌,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귀순한 백제 장군 흑치상지가 크게 공헌했다(흑치상지는 이경업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처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나중에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복권되었다).
무측천의 아들들은 모두가 함량 미달이었지만 딸인 태평공주는 성품과 재능이 무측천을 빼닮았으므로 어머니가 예뻐하고 아꼈다. 또 손녀인 중종의 딸 안락공주 역시 ‘그 할머니에 그 손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악하여 어머니 위황후와 결탁, 아버지 중종을 독살하는 악랄한 짓을 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의 속담대로 위세 등등한 무측천에게도 몰락의 시각이 다가왔다. 무측천의 힘이 빠져 있을 때 정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1차 신룡정변: 705년 타성받이 일개 아낙에게 나라의 정통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은 구신들이 들고 일어남. 세 불리해진 무측천은 폐위된 중종을 복위시키고 권좌에서 물러남.
2차 경룡정변: 707년 중종 복위 후 중종의 태자 이종준이 쿠테타를 일으켰지만 위황후와 안락공주 제거에 실패하여 실각하고, 실권을 잡은 두 모녀가 중종을 독살하는 만행을 저지름.
3차 당륭정변: 710년 예종의 셋째아들 이융기와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가 쿠데타를 일으켜 위황후와 안락공주를 내몰고 폐위된 예종을 복위시킴(정변 성공 후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처형되었다).
712년: 예종, 즉위 2년 만에 셋째아들 이융기에게 양위함. 현종(이융기) 즉위.
713년: 현종 옹립에 크게 공헌한 태평공주가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 후 자결.

 

정변이거나 정권이 바뀌면 대대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뒤따르는 법인데도 숙청된 무측천은 계속해서 황후, 황태후로 호칭되고 천수를 누리며 황실의 어른으로 대우받았다는 점은 의아한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연유가 있었다. 무측천을 내쫓은 새로운 집권 세력들에게도 난처한 일이 생겼다. 무측천의 소생인 중종과 예종이 이미 당나라 황제를 지냈으므로 이를 부정하고 처벌한다면 자칫 당나라의 정통성이 흔들리는 낯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는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재상 적인걸이 묘안을 짜냈다. 양측 합의 하에 무주라는 나라를 중국의 역사와 세계(世系)에서 지우고, 무측천의 자격은 태종의 후궁, 고종의 황후로 그리고 고종, 예종의 황태후로만 인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씨 왕조가 이어지는 모양새가 되는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가 되는 것이었다. 중국의 세계도(世系圖)를 보면 한고조 유방의 전한(前漢)과 광무제 유수의 후한(後漢) 사이에 ‘신(新)’나라가 끼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5대 예종과 6대 현종 사이에 15년 역사의 ‘무주’가 존재했으므로 前唐-武周-後唐으로 기록이 되어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은 것은 앞에서 언급한 사연 때문이었다. 무측천은 30세에 황후가 되고 67세에 황제의 위에 올라 15년 동안 무주의 황제로서 80세의 천수를 누린 일세의 여걸이었다. 무측천이 닦아 놓은 기반을 동력 삼아, 동양의 르네상스를 펼친 현종은 초기에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현군이 되어,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는 ‘계원의 치’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경국지색 양귀비를 만나고부터 황음에 빠져 ‘안록산의 난’을 자초하였다. 서촉으로 피난하는 동안 마외파에서 피눈물을 흘렸고, 종내는 숙종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무측천의 유적으로 시안(西安) 서쪽 85km 지점에 위치한 건릉이 있는데, 고종과 합장묘라 한다. 거대한 산 전체를 무덤 삼은 무측천의 무덤에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는 빗돌이 세워져 있는데 까닭은, ‘내가 죽은 후 빗돌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무측천의 유언을 따른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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