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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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은 이를 부르는 목소리
서정시는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사유를 언어로 형상화하는 문학 장르이다. 특히 죽은 이를 기억하는 시에서 언어는 부재한 사람을 다시 부르는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그가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송별의 말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한국 시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말을 건네는 작품들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향가 「제망매가」에서 화자는 자신과 누이를 한 가지에서 난 잎에 비유한다. 누이는 먼저 떨어진 잎이 되었지만, 화자는 도를 닦으며 미타찰(彌陀刹)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고 한다. 죽음으로 누이와 헤어졌으나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한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슬픔을 견디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김소월의 「초혼」에 이르면 이러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초혼」의 화자는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라고 외친다. 그러나 그 이름의 주인은 이미 죽었으므로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이라는 구절도 화자의 목소리가 죽은 사람에게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시적 화자는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하며 죽은 이의 이름을 놓지 않는다. 「제망매가」의 화자가 다시 만날 장소를 믿고 기다린다면, 「초혼」의 화자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은 이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박목월의 「하관」은 아우의 죽음을 실제 장례의 현장을 통해 보여준다. “관이 내렸다”라는 첫 문장에서 아우의 몸은 땅속으로 내려간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이라는 표현은 관이 땅속으로 내려가는 장면과 아우의 죽음이 형의 가슴속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겹쳐 놓는다. 형은 아우의 머리맡에 성경을 얹고 “주여/ 용납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옷자락에 받은 흙을 관 위에 “좌르르” 쏟으며 아우를 묻는다. 그러나 꿈속에서 죽은 아우가 “형님!” 하고 부르자 형은 곧바로 “오오냐”라고 대답한다. 「초혼」에서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불렀지만, 「하관」에서는 죽은 아우가 살아 있는 형을 먼저 부른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의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 꿈속이다. 그러므로 관을 묻는 장례는 끝났지만, 형의 마음속에서 아우와의 이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송수권의 「산문에 기대어」에서도 죽은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나타난다. 시적 화자는 “누이야”라고 부르면서 죽은 누이를 강물과 못물, 산다화와 기러기, 돌과 물고기 속에서 떠올린다. 누이의 “눈썹 두어 낱”은 “가을산 그리메”가 되고, 죽은 사람은 남도의 자연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처럼 「산문에 기대어」에서 죽은 이는 하나의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산과 물과 꽃과 새로 변화하여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 나타난다.
강경호 시인의 시집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다』 제2부에 수록된 「移葬하고 나서」 「공동묘지에서」 「환상통」 「검은 뼈의 폐허」 「견고한 죽음」도 죽은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시편들이다. 이들 작품이 앞에서 살펴본 시편들을 직접적으로 계승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이를 부르고 기억하며, 마침내 떠나보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한국 시의 오래된 애도시와 나란히 놓고 살펴볼 수 있다.
강경호 시인의 아우 시편에는 아우의 이름을 새긴 비석과 무덤, 사라진 몸에서 계속되는 환상통, 검은 흙이 붙은 유골과 그것을 받치는 하얀 종이, 죽은 소사나무의 껍질이 나타난다. 이 다섯 편은 표제상 하나의 연작이 아니며, 하나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에 죽은 아우와 공동묘지, 오십 년 동안 이어진 기억, 현재의 이장과 유골 수습이 여러 작품에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들은 각각 독립된 작품이면서도, 아우의 죽음을 오랫동안 감당해 온 형의 애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작품군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군에서 시적 화자는 죽은 아우의 이름을 부르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공동묘지에 묻힌 아우를 선산으로 옮기고, 검은 비석에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뼈에 붙은 흙을 털어내고, 흩어진 유골을 하얀 종이 위에 모은다. 죽은 아우를 기억하는 일은 마음속의 그리움일 뿐만 아니라, 죽은 이가 남긴 무덤과 유골을 직접 돌보고 수습하는 현실적인 행위인 것이다.
2. 비석에 새긴 이름과 사자의 목소리
강경호 시인의 아우 시편에서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죽은 이의 이름과 목소리이다. 이름은 비석에 새겨져 죽은 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목소리는 화자의 기억과 추측 속에서만 들려온다. 「移葬하고 나서」와 「공동묘지에서」는 이름과 목소리가 지닌 이러한 차이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삽질하고 곡괭이질하던
우리 형제 유년의 배경이 되어 주었던
그 숲에 너를 옮겨 묻고,
오래 잊힌 이름 새긴 비를 세운다
너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지만
검은 빗돌에 새겨진 이름이
존재를 규명하듯 다시 살아
웃대 웃대 모신 선산 아버지 곁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뻐꾹새가 되었는가
네가 심은 무성한 밤나무 숲에서
곡진하게 들려오는 푸르른 봄날의 환청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다시, 성호를 긋는다
—강경호, 「移葬하고 나서」 전문
「移葬하고 나서」에서 시적 화자는 공동묘지에 있던 아우를 선산으로 옮겨 묻는다. 이장의 장소는 “아버지가 삽질하고 곡괭이질하던/ 우리 형제 유년의 배경이 되어 주었던” 숲이다. 이곳은 아버지가 일했던 장소이며, 형제가 함께 유년을 보낸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우를 이곳으로 옮겨 묻는 일은 단순히 무덤의 위치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공동묘지에 홀로 묻혀 있던 아우를 아버지와 선조들이 있는 가족의 자리로 다시 데려오는 일이다.
화자는 이곳에 “오래 잊힌 이름 새긴 비”를 세운다. 아우의 육체는 이미 “형체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검은 비석에 새겨진다. 시인은 이 이름이 “존재를 규명하듯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다. ‘존재를 규명한다’는 표현은 서정적인 분위기와 다소 거리가 있는 건조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말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죽은 이의 이름을 비석에 새기는 것은 그가 실제로 존재했으며, 가족의 한 사람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다. 「초혼」의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할 주인이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移葬하고 나서」의 이름은 돌에 새겨져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이름은 죽은 사람을 다시 불러오는 주술적인 말이라기보다, 잊힌 사람의 존재를 기억하게 하는 표지로 기능한다.
시적 화자는 아우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뻐꾹새가 되었는가”라고 묻는다. 아우가 심었던 밤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마치 아우가 돌아와 내는 소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화자는 그 소리를 “푸르른 봄날의 환청”이라고 말한다. ‘뻐꾹새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에는 죽은 아우가 새가 되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지만, ‘환청’이라는 말에는 그 소리가 실제로 아우의 목소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마지막에서 시적 화자는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다시, 성호를 긋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름을 부르는 행위와 성호를 긋는 기도의 행위가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기도가 죽은 아우의 귀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화자는 비석에 아우의 이름을 새겨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 성호를 긋는 몸짓을 통해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빌고 있는 것이다.
「공동묘지에서」에서도 죽은 사람의 이름과 목소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름은 비석에 새겨져 분명하게 보이는 반면, 목소리는 “것 같았다”라는 추측의 형식으로만 들려온다.
가을볕 아래 묘지들이 따스하다
유년에 새 둥지를 찾아다니던 아우와
함께 쏘다녔던 마을 뒷산
가을이었던가 어둑어둑해지는 해거름녘
공동묘지 어디선가 새 한 마리 날아오르고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 내리는 공동묘지에 버려진 항아리 속
작고 어여쁜 아기 꽃신 한 켤레
살과 뼈는 녹아버리고 고무신만 남아
엄마를 부르는 것 같았다
오늘은 무성한 숲속을 더듬거리다가
공동묘지에 들어섰다
늘어난 무덤들 앞에 박힌
비석에 새겨진 낯익은 이름들이 낱낱이 떠오르는데
한쪽 귀퉁이 흙이 흘러내린 아우의 무덤
그 앞에 서서 오십 년 전 어린 아우와
함께 들었던 산중에서 아이 우는 소리,
이승이 그리운지 묘지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들
그 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강경호, 「공동묘지에서」 전문
유년의 화자는 아우와 함께 마을 뒷산의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다가 버려진 항아리 속에서 “작고 어여쁜 아기 꽃신 한 켤레”를 발견한다. 죽은 아이의 살과 뼈는 이미 녹아 없어졌고 고무신만 남아 있다.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떤 사연을 지닌 아이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작은 꽃신은 사라진 아이의 몸과 그 아이가 살았던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화자는 그 고무신이 “엄마를 부르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고무신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린아이의 몸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신발을 통해, 화자가 죽은 아이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죽은 아이의 목소리는 남겨진 사물과 화자의 상상이 결합해 만들어 낸 소리이다.
오십 년 뒤 화자는 다시 공동묘지에 들어선다. 그동안 무덤은 늘어났고, 비석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유년 시절에 발견한 아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죽음이었지만, 지금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은 화자가 알고 지냈던 마을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에는 “한쪽 귀퉁이 흙이 흘러내린 아우의 무덤”도 있다. “가을볕 아래 묘지들이 따스하다”는 첫 인상은 공동묘지를 차갑고 두려운 공간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한다. 그곳에는 화자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의 시간과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함께 남아 있다. 그러므로 공동묘지는 삶과 죽음이 완전히 분리된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과 죽은 사람의 이름이 겹쳐 있는 장소이다. 현재의 화자는 묘지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들”을 듣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초혼」에서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불렀지만, 이 작품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화자를 부르는 듯하다. 이러한 목소리는 아우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며, 화자 자신도 언젠가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화자는 그 소리를 실제 죽은 사람의 목소리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유년의 장면에서는 고무신이 엄마를 “부르는 것 같았다”고 하고, 현재의 장면에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두 구절 모두 ‘것 같았다’라는 추측의 형식을 사용한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과 무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죽은 이의 목소리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移葬하고 나서」와 「공동묘지에서」에서 이름과 목소리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이름은 검은 돌에 새겨져 죽은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목소리는 화자의 기억과 추측 속에서만 들려온다. 시적 화자는 확인할 수 있는 죽음의 흔적은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죽은 이의 귀환과 목소리에 대해서는 물음과 추측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3. 몸에 치닫는 환상통과 유골의 수습
강경호 시인의 아우 시편에서 죽은 이의 부재는 이름과 목소리뿐만 아니라 몸의 감각으로도 나타난다. 「환상통」에서 아우의 죽음은 형의 몸에 남은 통증으로 형상화되고, 「검은 뼈의 폐허」에서는 검은 흙이 붙은 유골로 나타난다. 사라진 아우의 몸은 한편으로 형의 몸속에서 통증으로 지속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이 직접 수습해야 하는 유해가 된다.
아우가 마을 뒷산에서
새를 쫓는 환영을 보는 날은
여전한 그리움이거나 연민이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서
마을 공동묘지에 묻힌 아우의 무덤에
술을 따르면서,
사지가 저려 온다
어린 아우가 죽은 뒤
비가 내리는 늦가을
무성한 숲 어딘가에서
꾀꼬리 울음소리 뒤따라올 것만 같은데,
아우는 죽어 새가 되었을까
저승의 숲속을 빠져나와
이승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때 나의 팔다리였던 아우의 죽음 인정하지 못하고
환상통에 시달리곤 한다.
—강경호, 「환상통」 전문
‘환상통’은 절단되어 사라진 신체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아픈 현상을 말한다. 시인은 이러한 의학적인 용어를 아우를 잃은 형의 고통에 적용한다. 그러므로 “한때 나의 팔다리였던 아우”라는 표현은 아우의 죽음이 단순히 가까운 사람을 잃은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형에게 아우의 죽음은 자신의 몸 일부가 잘려 나간 것과 같은 상실인 것이다.
시적 화자는 오래전에 죽은 아우의 무덤에 술을 따르면서 “사지가 저려 온다”고 말한다. 아우의 몸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부재로 인한 통증은 살아 있는 형의 몸에서 계속된다. 절단된 신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통증은 남아 있는 것처럼, 아우는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현재에도 형의 몸에서 감각된다. 화자는 “아우는 죽어 새가 되었을까”라고 묻는다. 아우가 저승의 숲을 빠져나와 이승의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도 상상한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자신이 “아우의 죽음 인정하지 못하고/ 환상통에 시달리곤 한다”고 말한다. 아우가 새가 되어 돌아온다는 장면은 환생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 죽은 아우를 보내지 못한 형의 그리움에서 발생한 환영인 것이다.
「검은 뼈의 폐허」에서는 사라진 아우의 몸이 실제 유골의 모습으로 화자 앞에 놓인다. 「환상통」에서 아우의 부재가 형의 신체에서 통증으로 나타났다면, 이 작품에서는 부서지기 쉬운 뼈를 직접 만지고 수습하는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너를 덥석 안아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은 뜨거운 눈물 검은 뼈에 떨어질 때
눈물이 많았던 너도 울고 싶었을 것이다
살이 녹아 뼈에 붙은 검은 흙을 털어내는 손길이 애잔하다
한때 ‘형’하고 불러주었던 입술과
지긋하게 나를 보아주었던 눈은 사라져
검은 뼈의 폐허뿐이어도
착하게 살았던 짧은 일생을 기억하기 때문에
너는 죽었어도
내가 숨 거두는 날까지 살아 있을 것을 믿는다
부서지고 망가진 것을 폐허라고 부른다면
검은 뼈만 남은 너는 분명 폐허이지만
오롯한 정신을 담았던 두개골과
새를 쫓아 아버지의 산을 누볐던
튼실한 다리뼈와 발은
아버지의 산을 기억하겠구나
쉽게 부서지는 아우의 유골을
하얀 종이 위에 퍼즐 맞추듯 짜맞추며
완성된 너의 일생에 내 눈물을 보탠다.
—강경호 「검은 뼈의 폐허」 전문
작품은 “너를 덥석 안아주고 싶었지만”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아우를 다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 나타난다. 그러나 화자가 실제로 마주한 것은 살아 있는 아우의 몸이 아니라 검은 흙이 붙어 있는 유골이다. 아우를 안고 싶은 마음과 쉽게 부서지는 뼈의 현실이 첫 구절부터 대비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살이 녹아 뼈에 붙은 검은 흙을 털어내는” 손길을 바라본다. 눈물도 검은 뼈 위에 떨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에 놓인 것은 눈물의 양이나 슬픔의 크기만이 아니다. 뼈에 붙은 흙을 털어내고, 흩어진 유골을 하나씩 모으는 구체적인 행위가 중요하게 나타난다. “형”이라고 부르던 입술과 화자를 바라보던 눈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검은 뼈의 폐허”이다. ‘폐허’라는 말은 한때 그 자리에 온전한 몸과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검은 뼈는 단순히 죽음을 상징하는 사물이 아니라, 한때 살아서 움직이고 말하고 바라보았던 아우의 육체가 남긴 흔적이다. 시인은 유골을 두개골과 다리뼈와 발로 나누어 바라본다. 두개골에는 “오롯한 정신”이 담겨 있었으며, 다리뼈와 발은 아우가 새를 쫓아 아버지의 산을 누비던 움직임과 연결된다. 실제로 아버지의 산과 아우의 행동을 기억하는 것은 뼈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형이다. 그러나 화자는 유골의 각 부분에 아우가 살았던 시간과 행동을 연결함으로써, 검은 뼈에서 아우의 생전 모습을 되살려 낸다. 화자가 유골을 하얀 종이 위에 “퍼즐 맞추듯 짜맞추”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검은 뼈와 하얀 종이가 선명하게 대비되고, 흩어진 유골을 맞추는 행동은 아우의 몸과 기억을 다시 모으는 일처럼 보인다. ‘퍼즐’이라는 비유는 죽은 사람의 뼈를 하나의 사물처럼 보이게 할 위험을 지닌다. 그럼에도 이 비유는 이장 과정에서 쉽게 부서지는 유골을 빠짐없이 모아야 하는 형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화자는 스물아홉 살에 끝난 아우의 삶을 “완성된 너의 일생”이라고 부른다. 짧게 살다 죽었으므로 미완성된 삶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짧았지만 아우가 살아낸 시간은 이미 한 사람의 삶으로 완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형이 그 일생에 보태는 것은 아우가 미처 살지 못한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눈물이다. “내가 숨 거두는 날까지 살아 있을 것을 믿는다”는 말 또한 죽은 아우가 실제로 살아 돌아온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아우는 그를 기억하는 형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다. 그러므로 아우가 살아 있는 시간은 형이 숨을 거두는 날까지이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이를 기억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렇듯 「환상통」과 「검은 뼈의 폐허」에서 아우의 죽음은 추상적인 슬픔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한 작품에서는 살아 있는 형의 몸에서 저림과 통증으로 나타나고, 다른 작품에서는 손으로 만지고 수습해야 하는 유골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강경호 시인의 시에서 애도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감정일 뿐만 아니라, 죽은 이가 남긴 몸의 흔적을 직접 대하고 돌보는 행위로 형상화되고 있다.
4. 견고한 죽음과 송별의 ‘참말’
「견고한 죽음」은 아우가 선산에서 가져온 소사나무의 죽음과 아우의 이장을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다. 형은 오랫동안 소사나무를 바라보며 죽은 아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아우를 선산으로 옮긴 직후, 아우를 기억하게 하던 소사나무도 죽는다.
백 살을 넘긴
선산에서 아우가 모셔온 소사나무
봄이 되어 중풍 환자처럼 잎을 피우지 못하더니
제일 무더웠다는 올여름 더위에
나머지 반쪽마저 잎이 시들어버렸다
스물아홉 살 이후 낯선 공동묘지에서 외로웠을 아우를
소사나무가 살았던
선산 아버지 곁에 안장을 한 직후의 일들이다
분재를 보며 40년 동안 아우를 생각했다
그 생각에 아우가 죽지 않고 내 안에서 살았다
오래 아우를 보내지 못했는데,
마침내 죽음을 인정했다
죽은 소사나무의 무른 껍질이
하얗고, 견고해졌다
죽음이 미라처럼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믿었다
잘 죽었다. 소사나무,
잘 가라, 내 아우.
—강경호, 「견고한 죽음」 전문
시적 화자는 “분재를 보며 40년 동안 아우를 생각했다”고 말한다. 아우는 스물아홉 살에 죽었지만, 아우가 선산에서 가져온 소사나무는 오랫동안 형의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소사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아우가 직접 가져온 나무이며, 형으로 하여금 죽은 아우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매개물이다.
그 소사나무가 봄이 되어도 잎을 피우지 못하고 여름 더위에 나머지 반쪽마저 시들어 버린다. 공교롭게도 이 일은 공동묘지에 있던 아우를 선산 아버지 곁에 안장한 직후에 일어난다. 시인은 아우의 이장과 소사나무의 죽음 사이에 초자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직후의 일들이다”라고 하여 두 사건이 가까운 시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그럼에도 작품에서 두 사건은 서로 관련된 것처럼 읽힌다. 아우가 낯선 공동묘지를 떠나 아버지가 묻힌 선산으로 돌아간 뒤, 사십 년 동안 아우를 기억하게 해주었던 소사나무도 죽는다. 그러므로 소사나무의 죽음은 아우의 기억을 대신 짊어지고 있던 사물이 그 역할을 마치는 장면처럼 보인다.
화자는 “오래 아우를 보내지 못했는데,/ 마침내 죽음을 인정했다”고 말한다. ‘오래’와 ‘마침내’ 사이에는 사십 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다. 아우가 죽고 장례를 치렀다고 해서 형의 마음속에서 곧바로 이별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아우를 선산으로 옮기고, 유골을 수습하며, 오랫동안 아우를 떠올리게 했던 나무의 죽음을 지켜본 뒤에야 화자는 아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우를 잊는다는 뜻은 아니다. 「검은 뼈의 폐허」에서 화자는 아우가 자신이 숨을 거두는 날까지 기억 속에서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죽음의 인정과 기억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날 때, 그가 살아낸 시간을 하나의 완성된 삶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소사나무의 무른 껍질이/ 하얗고, 견고해졌다”는 독백은 작품의 제목을 설명해 준다. 소사나무는 죽은 뒤 생명력을 되찾은 것이 아니다. 무르던 껍질이 하얗게 굳어 죽음의 흔적으로 남는다. 화자는 이를 “죽음이 미라처럼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나무의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형태이다.
「검은 뼈의 폐허」에는 검은 유골이 있고, 「견고한 죽음」에는 하얗게 굳은 소사나무의 껍질이 있다. 검은 뼈와 하얀 껍질은 모두 죽음 이후에 남겨진 물질적인 흔적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흔적을 생명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바꾸지 않는다. 죽음이 남긴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아우가 더 이상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의 “잘 죽었다. 소사나무,/ 잘 가라, 내 아우”는 이 작품군에서 가장 분명한 송별의 말이다. “잘 죽었다”는 표현은 죽음을 기뻐하거나 긍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소사나무가 오랜 생을 마치고, 사십 년 동안 아우의 기억을 매개해 온 자신의 시간을 다했다는 승인에 가깝다. “잘 가라”는 말 또한 아우를 잊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아우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그가 살았던 시간은 계속 기억하겠다는 작별의 인사이다.
강경호 시인은 시집의 책머리에서 “나의 언어가 참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시가 “나의 뼈와 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시인이 말하는 ‘참말’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말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우를 다룬 시편에서 ‘참말’은 시인이 실제로 확인한 죽음과 확인할 수 없는 귀환을 구분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시적 화자는 죽은 아우가 “뻐꾹새가 되었는가”, “새가 되었을까”라고 묻는다. 묘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서도 “부르는 것 같았다”, “들리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죽은 아우가 새가 되어 돌아오기를 바라고, 죽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듯한 감각을 느끼지만, 그것을 사실이라고 확정하지는 않는다. 반면 아우의 죽음과 그 흔적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말한다. 아우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무덤 앞에 선 형은 “사지가 저려” 온다. 아우에게서는 “검은 뼈만 남”았으며, 화자는 마침내 “죽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확인한 무덤과 비석, 유골과 죽음에 대해서는 분명한 문장으로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경호 시에서 ‘참말’은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를 강조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실제로 확인한 것을 구별하여 말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귀환은 물음으로 남겨 두고, 환청은 추측으로 말하지만, 검은 뼈와 죽음은 단정적으로 진술한다. 이러한 구별이 강경호 시인의 아우 시편에 나타나는 절제된 언어의 중요한 특징이다. 또한 강경호 시인은 죽은 아우의 목소리를 지나치게 대신하지 않는다. 아우가 울고 싶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거나 묘지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 장면이 있지만, 작품의 중심에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형의 구체적인 행동이 놓여 있다. 화자는 무덤에 술을 따르고, 비석에 이름을 새기며, 뼈에 붙은 검은 흙을 털어낸다. 그리고 쉽게 부서지는 유골을 하얀 종이 위에 하나씩 모은다. 이렇듯 강경호 시인의 시에서 애도는 슬픔과 그리움을 말하는 일에 머물지 않고, 죽은 이가 남긴 이름과 무덤, 유골을 직접 대하고 돌보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의 시편에서 검은 유골은 검은 유골로, 죽은 나무의 껍질은 하얗게 굳은 죽음의 흔적으로 제시된다. 시인은 아우의 죽음을 아름다운 자연물이나 관념적인 슬픔으로 바꾸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마주한 비석과 무덤, 검은 뼈와 죽은 소사나무를 통해 죽음이 남긴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므로 시인이 말하는 ‘참말’은 죽음을 꾸미거나 돌려 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확인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하지 않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강경호 시인의 아우 시편은 죽은 이를 부르는 오래된 초혼의 언어를 이어가면서도, 단순히 이름을 부르고 그리워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아우의 무덤을 옮기고, 비석에 이름을 새기며, 흩어진 유골을 수습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화자는 “잘 가라, 내 아우”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앞에서 이루어진 호명을 취소하거나 아우를 잊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랫동안 아우의 이름을 부르고, 무덤을 돌보며, 제 몸에서 상실의 통증을 겪은 사람이 마침내 건넬 수 있는 작별의 말이다. 아우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살았던 시간과 이름은 계속 기억하겠다는 송별의 언어인 것이다. 죽은 아우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강경호 시인의 아우 시편에서 죽은 이를 부르는 초혼의 목소리는 무덤과 유골을 수습하는 시간을 거쳐, 마침내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기억을 놓지 않는 송별의 ‘참말’로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