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변신(變身)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종수(수원)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조회수9

좋아요0

때_ 2026년 4월 현재
장소_ ○○시 외곽에 위치한 세련되지만 어딘가 긴장감이 흐르는 ‘털털한’ 왁싱숍
인물_ 늑구(엉겹결에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원장(냉철하지만 다소 털털한 성격의 프로페셔널한 왁싱숍 주인)|카페 사장(늑구의 아르바이트 카페 주인)|추격자들(늑구를 쫓는 사설 포획팀장과 팀원들)|여인(늑구가 짝사랑하게 된 카페 손님)

 

1장_ 털, 뽑히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털털한’ 왁싱숍 내부. 바닥은 광택이 나며 한 올의 터럭도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온통 하얀 벽에 역시 하얗고 차가운 조명이 비친다. 숍 중앙에 화이트 톤의 왁싱 베드가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각종 왁싱 도구와 조명이 있는 것이 마치 수술실 같다. 도구들은 보통 크기보다 매우 커 보인다. 왁싱숍 뒤편은 반투명 유리문으로 되어 있고 왼쪽에는 가운과 여러 옷이 걸린 작은 드레스룸이 있다. 건물 관리인이 빌딩 내 방송을 통해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 늑구라 불리는 늑대 한 마리가 인근 도심에서 목격되었습니다. 신고하면 포상금도 지급된다고 합니다만, 안전이 우선이니 점주 및 입주민 여러분께서는 주의에 주의를…”이라는 방송을 내보낸다. 반투명 유리문 뒤에서는 실루엣으로 총을 든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사냥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 들리면 총을 든 남자와 한 여자가 재빨리 사라지고 원장이 유리문을 열고 나온다. (무대 상연 시 왁싱 장면을 그림자극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원장        다들 어린 늑대 한 마리 가지고 왜 이리 호들갑이람.
늑구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늑구가 다급하게 왁싱숍 문을 두드린다) 계, 계세요?
원장        네, 누구세요?
늑구        (밖에서) 지금 왁싱 되나요?
원장        우리 가게는 (강조하며) 예약만 받습니다.
늑구        (크게) 돈은 달라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 털 좀 뽑아주세요.
원장        (문으로 다가가며) 말씀드렸죠. 저희 가게는 예약 손님만…. (문으로 다가가다 얼굴과 온몸에 덥수룩한 털을 한 채 어색한 걸음걸이로 숨을 헐떡이며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늑구와 마주치자 놀라 손으로 입을 막고 뒷걸음질 치며) 어머! 어머! 대박!
늑구        (문을 닫고 숨을 고르며) 제발 제 털, 털 좀 뽑아주세요!
원장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며) 이 털 좀 봐! 동물원에서 지금 탈출이라도 하신 건가요?
늑구        (놀라며) 동물원이요? 그걸 어떻게?
원장        완전 늑대 코스프레잖아요. 하여튼 요즘 젊은 사람들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늑구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이거 모두 진짜 늑대 털이고요.
원장        진짜 털이라고요? 그럼… 진짜 늑대? 호호호! (아래를 보고는) 그렇다고 아예 홀라당 벗고 오시면 어떡한담.
늑구        (급히 아래를 가리키며) 그게 그런 게 아니고 원래부터…. 어쨌든 제가 지금 털을 안 뽑으면 정말 큰일 나거든요. 부탁드립니다.
원장        (다시 온몸을 훑어보고는) 이 많은 털을 다 뽑는 것 자체가 (강조하며) 큰일인 것 같은데…?
늑구        (이때 밖에서 “저쪽이다!” 하는 소리가 들리자 당황하며 으르렁거리려다 참고는) 제발요, 잡히면 저 죽습니다! 제발 좀 뽑아 주세요!
원장        (혼잣말로) 구미가 좀 당기긴 하는데. 잘만 하면 마케팅에, 아니 아니지 그보다 저 털 밑에 숨은 가죽을…!
늑구        (밖에서 다시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원장님! 안 해주시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죽기 아니면 죽이기죠. (이빨을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원장        진정! 진정! 알았어요. 하지만 서두르면 왁싱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요. 근데 털이 빡세 보이는 것이 꽤 아프실 텐데… 괜찮겠어요?
늑구        사실 왁싱은 이번이 처음이라… 많이 아플까요?
원장        (양손을 들어 보이며) 20년 동안 털만 뽑은 손입니다. 믿어보세요. (베드를 가리키며) 누우세요.
늑구        (쭈뼛거리며 일어서며) 어, 어떻게 누우란 말인가요?
원장        우선 앞부터 할 테니 (동작을 보여주며) 이렇게 발랑 누우세요.
늑구        (주저하며) 그럼 뭐 덮을 거라도 좀.
원장        그럼 털을 뽑을 수가 없잖아요. 속으론 좋으면서 괜히 그러시는 거죠? 호호.
늑구        누가, 뭘 좋아한다는 겁니까?
원장        차차 알게 될 겁니다. 지금 급한 건 그쪽이니까 눕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늑구        (다시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아, 알겠습니다.

 

결심을 한 듯 늑구가 흰 베드에 천장을 보고 발랑 눕는다. 무대 뒤편 반투명 유리에 한 여인과 총을 든 남자의 실루엣이 오가지만 드러누운 늑구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원장이 왁싱 기구들을 조작하며 준비한다.

 

원장        브라질리언, 바디, 페이스. 어떤 걸 원하세요?
늑구        그게 다 무슨 말이죠? 난 그저 털을 뽑으려고….
원장        (프로페셔널하게 장갑을 끼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브라질리언은 여기, 바디는 여기 여기 (늑구가 창피한지 앞발로 중요 부위를 재빨리 가린다), 페이스는 여기 털을 뽑는 거죠.
늑구        (앞발로 가리키며) 지금 필요한 건 여기, 여깁니다.
원장        바디와 페이스! 알겠어요. 브라질리언은 그럼 다음으로.
늑구        (갑자기 일어나 앉으며) 그런데 내가 무섭지 않나요? 이래봬도 난 늑대란 말입니다! 늑대!
원장        (베드를 툭툭 치며) 여기 눕는 순간 나에겐 그냥 ‘털 많은 손님’일 뿐이에요. 맹수든 인간이든 내 앞에서는 다 똑같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중생인 거지요. 그러니 특별히 자기가 늑대라고 과시할 일도 아니고 무서워할 일도 아니란 말이죠. 알겠어요?
늑구        (다시 누우며) 네 뭐, 뭔 말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원장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늑구의 털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음, 이 정도 모질이면 ‘A급 스웨이드’네. 뽑아낼수록 가죽은 더 부드러워지겠어.
늑구        (원장의 말에 으르렁거리며) 가죽이 아니라 털을 벗겨 달라고요.
원장        귀도 밝으셔라. 손님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 드리겠다는 뜻이니까 오해는 마세요. 전용 ‘영양 미스트’ 좀 뿌릴게요. 이건 모근을 튼튼하게 해서 나중에 한꺼번에 뽑기 좋… 아니, 피부에 아주 좋거든요. 먼저 바디부터.

 

원장이 늑구 몸에 미스트를 뿌리고 잠시 털을 마사지하고는 이어 뜨거운 왁스를 워머에서 떠내 몸에 펴 바르기 시작한다. 늑구가 따뜻한 온기에 나지막한 신음을 토한다.

 

원장        도망치느라고 꽤나 긴장했던 것 같군요. 이제 긴장 풀어요. 털만 뽑고 나면 당신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자, 숨 크게 들이마시고.
늑구        (긴장하며) 흡…!
원장        원, 투, 쓰리! (촤악! 뜯기는 왁싱 스트립 소리가 증폭되어 무대 스피커에서 크게 울려 퍼진다)
늑구        아오오오오오! (늑대 울음소리가 숍 전체에 울려 퍼지자, 원장이 재빨리 입을 틀어막는다. 뒤편 반투명 유리로 두 사람이 멈추어 이를 응시한다)
원장        지금 발각되려고 발악하는 건가요?
늑구        아, 아닙니다. (다시 갑자기 원장이 스트립을 뜯어내자 비명을 참느라 용을 쓴다)
원장        (태연하게 털을 확인하며) 와, 뿌리 깊은 것 봐. 이거 봐요, 모근이 아주 건강해. 자, 이젠 페이스! (늑구 얼굴에 왁스를 바르고 떼어내기를 반복한다)

 

무대 조명이 깜빡이며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베드 주변에는 털 뭉치들이 수북이 쌓인다.

 

원장        (마지막 패치를 떼어내며) 자, 끝났습니다.
늑구        (마지막 비명을 참아내고는 처음으로 내뱉는 인간의 목소리) 엄청 따가워요.
원장        봐요, 이제 사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잖아요.
늑구        제 목소리가요?
원장        모르겠어요? 자기 목소리를? 이제 자기는 (강조하며) 사람이 된 거라고요.
늑구        정말요?
원장        (강조하며) 이 사람이 평생 속고만 살았나. 자, 이제 진정 젤을 발라 드릴게요. 시원할 거예요. (젤을 바른다) 어때요?
늑구        아, 너무 시원해요.
원장        (강조하며) 사람이 된다는 게 이런 느낌이랍니다. 고통 뒤에 찾아오는 이 상쾌함. 앞으로 쭈욱 느끼게 될 거예요. (손뼉 치며) 자, 다 끝났습니다. 일어나서 거울을 보세요!

 

늑구가 천천히 베드에서 일어나자 원장이 유리문 앞에 늑구를 세운다. 이제 그는 털 하나 없는, 말끔한 청년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과 매끈해진 팔과 몸을 믿기지 않는 듯 바라본다.

 

원장        야성적 턱선과 눈매, 탄탄한 근육과 매끈한 피부. 와우! 이건 모델을 해도 손색이 없겠는걸.
늑구        (자기 피부를 만져보며 신기해한다) 이게… 내 피부라고? 이게… 내 얼굴이라고? 부드러워… 털 속에 감춰져 있던 내가 이런 모습이었나?
원장        맞아요. 감춰져 있던 진짜 모습이죠. (쓰다듬으며) 이 매끈한 팔하며, 이 고운 피부하며!

 

이때, 밖에서 경찰들이 왁싱숍 문을 두드린다.

 

경찰        (V.O) 실례합니다! 경찰입니다! 문 좀 열어 보세요!

 

놀란 원장이 늑구에게 가운을 주며 입도록 한 후 침착하게 문을 연다.

 

경찰        (문밖에서) 실례하겠습니다. (숍 내부를 흘끔거리며) 방송 들으셨죠? 동물원에서 탈출한 늑대를 찾고 있습니다.
원장        (늑구에게 윙크를 하며) 늑대요? 저희 숍엔 지금 여성 손님 한 분만 계시는데요. (경찰이 문틈으로 안을 재빨리 훑어보다 문을 더 열고 발을 들이밀려고 시도하자 막으며) 경찰관님,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왁싱숍이랍니다. 개인 프라이버시 등 문제로 안 된다는 거 아실 텐데요.
경찰        아, 죄송합니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라서요. (돌아서려다 갑자기 획 돌아서며) 근데 말이죠?
원장        (깜짝 놀라며) 네? 뭐 이상한 거라도?
경찰        근데, 저 털들은 뭐죠?
원장        터, 털이라뇨?
경찰        비정상적으로 많이 쌓여 있잖아요. 여성 손님이라면서요?
원장        그런데요?
경찰        저 털들은 그러니까….
원장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여성 손님 치곤 뽑아낸 털의 양이 너무 많다 이거죠? (경찰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경찰관님, 안 되겠네.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이 아주 늑대 털보다 더 깊이 박혀 있잖아.
경찰        성차별이라뇨?
원장        우선 털을 남성의 전용물로만 여기는 그 사고방식이 문제고요. 또 여성도 남성만큼 털이 많이 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아니냐, 그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경찰관님의 발언은 여성성을 비하하는 매우 나쁜 발언이다 이겁니다.
경찰        그게 아니고요, 상식적으로….
원장        상식이요? 오늘의 상식 하나 알려드릴까요? 이 여성 손님이 남성으로 착각될 만큼 워낙 남성 호르몬이 강하시고 털이 많이 나셔서 오랫동안 자기 방에서 고립 생활을 해오시다가 오늘 거의 10여 년 만에 정말 커다란 용기를 내셔서 외출하신 겁니다. 그동안 제대로 깎지도 못하시다가 오늘 다 몽땅 다 뽑으신 거라고요.
경찰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맞습니까?
늑구        (입을 열자 자기도 모르게 으르렁소리가 흘러나오자 서둘러 입을 닫는다)
경찰        잘 안 들리는데 좀 더 크게 대답해 주세요.
원장        워낙 오랫동안 고립 생활을 하다 보니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셨어요. 아직 구강과 성대가 준비가 덜 되었답니다.
경찰        그래요?
원장        경찰관이라 의심이 많으신 건 이해하겠는데요. 지금 우리 손님이 경찰관님 때문에 무서움과 수치심에 달달 떨고 있어요. 아무래도 신고는 우리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경찰        알겠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늑구의 모습을 보거나 울음을 들으면 바로 112에 신고하셔야 합니다! 겉으론 순해 보여도 그 털 속에는 야생의 잔인함이 숨겨져 있으니까요. 포상금도 꽤 되고요.
원장        물론이지요. 보자마자 바로 신고하겠습니다.
경찰        협조 감사합니다. (물러간다)
늑구        (경찰이 멀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원장        감사할 것까지야….
늑구        신고하면 포상금도 꽤 된다던데.
원장        (열변을 토한다) 내가 그깟 포상금이나 노리는 그런 파렴치한 파파라치인 줄 알아요? 난 이래봬도 철학이 있는 왁싱숍 사장이라고요. 털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은 물론 동물의 삶에도 희망과 행복을 안겨준다는 자부심과 긍지! 바로 내가 이 일을 20년 동안 놓지 않고 있는 이유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늑구        아 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원장        (계속 열정적으로) 지금까지 내 이 두 황금손을 거쳐 간 고객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평생을 숨어 지내다 외로운 방에서 고독사하거나 어두운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할 운명의 덫에서 내가, 이 두 손이 얼마나 많은 인간과 동물을 구해주었는지 아시냐 말입니다!
늑구        아 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원장        이제 좀 이해하시겠죠? (늑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렇고. 우리 늑대 손님, 셈은 셈이니까 오늘 받으신 전신 왁싱에 프리미엄 진정 코스까지 해서… (벽에 붙은 가격표를 가리키며) 25만 원되겠습니다. 결제는 카드로 하실 건가요? 전 현금이 좋은데, 카드는 수수료가 붙거든요.
늑구        (어쩔 줄 몰라 하며) 보시다시피 아시다시피 제가 방금 동물원에서 뛰쳐나온지라 카드도 현금도 그 흔한 할인권도 없습니다요.
원장        아까는 부르는 대로 내겠다더니 이제 와서 없다, 못 내겠다?
늑구        죄, 죄송합니다.
원장        새빨간 거짓말이었네. 경찰 다시 부를까요?
늑구        아, 안 됩니다. 경찰만은 제발!
원장        (가위를 들이대며 차갑게) 털도 금방 다시 자랄 텐데, 다시 짐승으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늑구        아, 아닙니다. 제가 털만 제때 뽑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원장        정말이죠?
늑구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털을 쓸기 시작한다) 청소라도 하겠습니다.
원장        멈춰요! 그렇게 쓸면 털이 날리잖아요!
늑구        죄, 죄송합니다.
원장        정말 시키는 대로 할 거죠?
늑구        네, 물론입니다.
원장        그럼… 내가 좋은 알바 자리 하나 알아봐 드리죠.
늑구        정말요? 가, 감사합니다.
원장        사람이면 2달에 한 번은 왁싱을 받아야 하는데 손님은 특별히 빨리 자라는 모근을 가졌으니까 2주에 한 번은 받아야 해요.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어요. 옷을 입어도 가리기 힘들 테니까요. 그러니 일 열심히 해서 1주일마다 빠지지 말고 와서 시술받도록 하세요. 시기를 놓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도 모르니까. (어딘가로 전화한다) 사장님! 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네네, 오늘 좋은 물건, 아니 알바가 하나 들어와서 보내려고 하는데. 네네, 물론이죠. 완전 강남 훈남입니다. 네, 그럼 보내드릴게요. (전화를 끊고는 늑구에게) 잠깐 기다려요. 털을 뽑았으니, 이제 사람의 옷을 입어야지.

 

원장이 프로처럼 우아하게 장갑을 벗으며 유리문 안으로 들어간다. 늑구는 털이 날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털을 쓸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 남자와 한 여인의 모습이 반투명 유리 뒤편에 어른거린다. 곧이어 원장이 남성 정장 한 벌을 가지고 나와 늑구에게 보여준다.

 

2장_ 회상, 탈출
번화가의 세련된 카페 ‘울프’. 벽에는 다양한 울프 가면들이 걸려 있고 실내에는 경쾌한 재즈 음악이 흐른다. 늑구는 왁싱을 한 뒤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털을 뽑은 후로 적응력이 비범하여 어느새 흰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훈남 알바생 ‘강늑’으로 살아가고 있다. 강늑이 능숙하게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저 알바생 진짜 잘생겼다”, “눈매가 야성적이야. 마치 늑대 같은데”, “곧 얼마 안 있으면 보름달이 뜨는데 그때 정말 늑대로 변하는 거 아냐?”라며 키득대며 수군거린다. 늑구는 애써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장        야, 강늑! 너 들어오고 나서 매출이 두 배다.
늑구        그럼 알바비 좀 올려주시면 안 돼요?
사장        야, 너 얼마 됐다고 벌써부터 돈타령이냐? 강남에 널린 게 알바다.
늑구        아, 알겠습니다.
사장        근데 너 몸에서 왜 자꾸 짐승 냄새가 나냐? 향수 좀 뿌려.
늑구        (어색하게 웃으며) 아… 네, 사장님. 노력 중입니다. (혼잣말로) 자꾸 코가 예민해져서 큰일이네. 저기 손님 가방에 든 육포 냄새가 여기까지 나, 미치겠군.

 

왁싱숍 원장이 들어온다.

 

사장        어머 원장님! 어서 오세요!
원장        안녕하세요, 사장님!
사장        매일 드시던 거 드릴까요?
원장        네!
사장        강늑! 한 잔 준비해라!
늑구        네∼.
원장        강늑은 잘 하고 있죠?
사장        그럼요. 쟤가 오고 나서 손님이 배로 늘었다니까요. 여자 손님들이 아주 난리예요. 벌써 팬이 생겼다니까요.
원장        정말요? 대박!

 

카페 테이블에서 여자 손님들이 늑구를 향해 음흉한 눈빛을 발사한다. 그중에 커피를 내리는 늑구와 눈이 마주치는 한 여인이 눈에 띈다. 늑구의 눈빛이 순간 열정으로 불타오른다.

 

사장        전에 소개해 주셨던 강타도 아주 잘했어요.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특히 목이 길었죠.
원장        강타! 생각나네요, 타조를 닮았던.
사장        맞아요, 타조! 근데 사장님은 어디서 이런 인재들을 구하시나요?
원장        우리 ‘털털한’ 왁싱숍은 인생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친구들에게 변신의 기회를 주고 있죠. 저도 이제 벌 만큼 벌었으니 사회에 환원해야지요, 좀 늦었지만.
사장        정말요? 대박!
원장        네, 저로선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사장        정말요? 대박!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희 가게도 큰 도움을 받고 있잖아요. 근데 친구들도 좋고 매출 상승도 좋은데 다들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고 사라지는 게 좀….
늑구        (커피를 내오며) 원장님 좋아하시는 (거칠게 강조하며) ‘르와크’ 커피예요.
원장        (마신다) 역시! (강조하며) ‘르와크’는 강늑 작품이 최고야! (선망의 눈빛으로) 옷도 잘 어울리는데!
사장        저 옷이 참 그런 것이…, 다른 알바가 입으면 예쁜데 강늑이 입으면 그게….
원장        왜요? 잘만 어울리는데.
사장        여자 손님들이건 남자 손님들이건 다들 늑대 같대요, 늑대.
원장        늑대요? 그거 칭찬 아니에요? 호호. 제가 소개를 잘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목소리를 낮춰서) 강늑 씨, 리터치 예약일 지났어. 오늘 안 오면 모근이 삐죽삐죽 화낼 텐데?
늑구        (바쁜 홀을 보며) 원장님, 오늘 손님이 너무 많아서요. 내일 꼭 갈게요. 진짜로요!
원장        (의미심장하게) 내일은 늦을지도 몰라. 털이라는 게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거든.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며) 앞으로 대여섯 번만 더 하면 더 이상 털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늑구        네, 원장님.
원장        사장님, 가보겠습니다! 사장님도 꼭 한 번 오세요! ‘촤악’ 아프지 않게 뽑아드릴게요.
사장        네, 원장님.
원장        매번 네네만 하지 마시고요. 이번엔 꼭 오셔야 해요. (손짓하며 나간다)
사장        네네, 원장님. 안녕히 가세요.
늑구        안녕히 가세요! (원장이 나가자) 사장님, 저 잠깐 전담 좀!
사장        그것도 연초만큼 안 좋다니까! 빨리 피고 와.

 

원장이 나가고 늑구가 무대 한쪽으로 가면 카페 조명이 어두워지고 뒷마당 테라스에서 담배 피우는 늑구를 비춘다. 늑구가 담배연기를 뿜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자 구름에 가렸던 초승달이 나타난다. 늑구가 초승달을 보고는 늑대처럼 하울링을 한다.

 

늑구        (관객에게) 저 사실 이대로 계속 버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엉겁결에 울타리를 빠져나와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는데 와 보니 역시나 이 털이 문제더라고요. 그래서 털을 다 뽑았죠. 근데 뽑으면 뭐 해요. 웬 털이 그리도 빨리 자라는지 이건 하루가 멀다고 왁싱을 받아야 하니 말입니다. 늑대가 자기 털 못 깎는다는 말처럼 얼굴하고 앞면은 뭐 내가 면도로 해결한다고 쳐도 나머지 털은 내가 어쩔 수 없단 말이죠. 가만 보면 제가 동물원을 탈출은 했지만, 오히려 보이지 않는 케이지 안에 갇힌 꼴이더라니까요. 매일 집과 카페를 오가며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해서 번 돈을 몽땅 왁싱숍에 갖다 바쳐야 하니까요. 게다가 사람들은 걸핏하면 나보고 여기 오기 전에는 뭐 하다 왔냐, 고향은 어디냐, 가족은 뭐 하냐, 여친은 있냐, 아주 왕짜증입니다, 왕짜증. 근데요, 방송을 보면 사람들은 제가 동물원에서 무슨 학대라도 당해서 탈출한 줄 아는데 그건 아니거든요. 정말 엉겁결에 나왔어요. 엉겁결에.

 

어둠 속 카페에 있던 손님들이 카페 벽면에 걸린 늑대 마스크를 쓰고 카페 홀로 나와 군대행진곡 같은 클래식 음악에 맞춰 움직인다. 늑대 대장이 조련 봉을 들고 지휘를 하면 모든 늑대가 지휘에 따라 움직이고 춤도 춘다. 지휘가 끝나면 늑대들이 늑대왕에게 다가가 애교를 떨거나 커피잔을 우아하게 들고 스탠딩 파티를 하거나 작은 소파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수다를 떤다. 어떤 늑대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버리기도 한다. 어떤 늑대가 달을 보고 늑대처럼 하울링을 하면 다른 늑대들이 달려들어 그를 폭행하고 왕따시키기도 한다. 파티가 끝나고 모두 잠에 빠진다. 달이 지고 해가 뜬다. 늑대왕이 중앙의 식탁에 앉고 나머지 늑대들로 식탁에 자리 잡는다. 사육사들이 식탁에 스테이크와 포크를 공급한다. 모두가 우아하게 식사를 시작한다.

 

늑구        저렇게 편하게 살다가 결국 우리 무리의 우두머리는 늑대답게 울부짖는 법을 잊었어요. 나머지 똘마니들도 비슷한 지경에 이르렀죠. 그는 매일 아침 사육사가 던져주는 스테이크의 등급을 매겼고, 우리는 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우아하게’ 포크질하는 법을 배워야 했어요. 늑대라는 자존심? 그런 건 사육사가 뿌려주는 명품 향수 냄새에 덮여 사라진 지 오래였어요.

 

사육사들이 식탁을 치우면 늑대들이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거나 털을 고르며 한가로운 아침 시간을 즐긴다. 이어 사육사들이 다시 등장하여 늑대들의 손발톱을 다듬어준다. 문을 열어 놓은 채로.

 

늑구        제 형제들은 철창 안에서 발톱을 세우는 대신 손톱 손질을 받았어요. 늑대가 아니라 예쁘게 털을 고른 ‘장식품’이 되어가는 꼴이라니. 그들은 저보고 말했어요.
늑대왕     (손발톱을 사육사들에게 맡긴 채) 늑구야, 밖은 더러워. 여기가 밖보다 훨씬 안전하고 깨끗하단다. 그러니 밖으로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거라. 집 나가면 개고생, 아니 늑대고생이요 생각나는 건 집밖에 없단다. 인간 세상이 너를 받아 줄 것 같아? 천만의 말씀! (사육사에게 다른 손을 내밀며) 이쪽도 부탁해요. (늑구에게) 동물권 옹호자들은 우리가 동물원에 갇혀 있다느니 야생성을 상실한다느니 하면서 비판을 해대는데 그건 완전한 오해야. 봐! 인간도 나무에서 내려와 저렇게 적응했잖아.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인간이 하면 진화요, 늑대가 하면 퇴보인가? 완전 내로남불인 거지. 그래도 혹시라도 호기심에 나갈 수도 있어, 또는 엉겁결에. 늑대왕으로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 나가서 털을 밀더라도 사람과 달밤을 조심해야 해. 사람은 절대 믿어선 안 돼. 그리고 달밤 중에서도 붉은 달이 뜨는 달밤은 특히 조심해야 해. 붉은 달빛은 우리에게 일종의 생화학적 방사선 같은 거라서 우리를 다시 야생으로 돌려놓을 수가 있으니까. 명심해! 알았지?

 

사육사들이 늑대들의 손발톱을 다듬고 나면 미용사들이 등장하여 늑대들의 털을 다듬고 빗겨주고 향수까지 뿌려준다. 미용사들이 퇴장하면 늑대들이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헤어롤을 마는 등 꾸미기에 한창이다.

 

늑대왕     (전담을 피우고 있는 늑구에게) 늑구야! 거기서 뭐 해! 이리 와 봐! 형들이 예쁘게 꾸며줄게! (다른 늑대들이 모두 늑구를 부른다)
늑구        (주저하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싫어요! 싫다고요!
늑대왕     싫다고? 내가 그렇게 예뻐해 줬는데도 저렇게 까칠하네. 얘들아, 뭐 해! 당장 늑구 잡아와!

 

늑대들이 하던 치장을 멈추고 늑구를 향해 달려든다. 이리저리 달아나던 늑구가 열린 문 앞에서 멈칫하다 이내 밖으로 달아난다. 늑대들이 ‘늑구가 탈출했다!’라고 소리치지만 정작 나가지는 못한다. 조명이 번득이며 난장판이 된 카페 안으로 사이렌과 함께 진입한 사육사들이 총과 채찍으로 늑대들을 테이블에 앉히고 문밖으로 달려 나가며 ‘생포하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라고 외친다. 사육사의 외침 멀어지고 동물원은 다시 카페 장면으로 돌아온다.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은 가면을 벽에 걸고 다시 담소를 이어간다.

 

늑구        (다시 들어오며 다시 관객을 향해) 웃기죠? 저 정말 엉겁결에 나왔거든요. 모르겠어요. 저도 무의식중에 나오고 싶어 했는지. 안 그랬으면 문이 열렸어도 안 나왔을 테죠. (자신의 매끈해진 얼굴과 팔을 쓰다듬으며) 그런데 이건 뭐죠? 동물원의 ‘매끈함’을 그렇게 싫어했으면서도 나오자마자 저 살겠다고 이렇게 털을 다 밀어버린 건.
사장        (카페 안에서) 강늑! 담배를 대체 얼마나 피는 거야! 너 자꾸 그러면 알바 시간 깐다! 어서 들어와! 너 찾는 손님 있다!
늑구        네? 네! 갑니다. 사장님!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늑구가 전담을 끄고 서둘러 카페로 들어간다. 어떤 묘령의 여성 손님이 늑구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녀를 보는 늑구의 심장 뛰는 소리가 증폭되어 울린다. 손님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가운데 늑구의 박동이 음악과 어우러지며 카페는 다시 활기찬 분위기로 돌아간다.

 

3장_ 사람 되기, 힘들다
늑구가 왁싱숍을 드나들며 털을 열심히 뽑는 모습이 영화처럼 빠르게 반복되어 펼쳐진다. 처음엔 비명이 컸다가 점차 횟수를 거듭할수록 작아지고 늑구의 털은 베드 주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간다. 이윽고 정상 속도로 돌아온 늑구가 옷을 벗고 베드에 누워 차분히 시술을 기다린다. 왁싱 막간에는 세련된 핑크나 보라색 조명을 사용하다가, 왁스 패치를 뗄 때는 강렬한 백색 스트로보(번쩍이는 조명)를 사용하여 늑구의 고통을 분절적으로 강조한다.

 

원장        (고통에 정신 못 차리는 늑구에게) 요즘 연애하는 것 같던데. 맞지?
늑구        연애라뇨? 알바비가 얼마나 된다고 연애를 해요? 아닙니다.
원장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 스타일도 늑대처럼 터프하게 바뀌고 (향기를 음미하며) 향수도 더 유혹적으로 바뀌고. 그래도 아냐?
늑구        그건 모두 더 나은 알바를 위해서죠. 손님을 더 끌어야 하니까요.
원장        나를 유혹하려는 건 아니고?
늑구        원장님!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원장        내 나이가 어때서?
늑구        원장님!
원장        좋아. 대신에 그럼 오늘부터 (우아하게 강조하며) 브라질리언 어때? 올누드로 말이야. 기분도 좋고 손님들도 더 많이 올 거야. 자신감도 높아지고 적응력도 좋아지고. 이런 걸 우리는 일왁쌍득이라고 해. 호호.
늑구        오올 누드요? 제가 동물원을 나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거든요.
원장        그래? 그럼 잘됐네. 이참에 아예 뿌리를 뽑자고! (워머에서 왁스를 떠 늑구의 중심에 바른다)
늑구        원장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요!
원장        아니긴, 사내가 이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원! (왁스 스트랩을 벗겨내자 늑구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른다. 이젠 거의 완벽한 사람 목소리다) 자, 자세 바꾸어서 이번에는 엎드려서 엉덩이를 든다. 실시!
늑구        엎드리라고요?
원장        그래. 동물원에 있을 때 네 발로 다녔잖아. 엉덩이를 든다. 실시!
늑구        (마지못해 시키는 대로 엎드려 엉덩이를 치켜든다. 자세가 제대로 나온다)
원장        어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보니까 좋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한번 철썩 치며) 이 먹음직한 엉덩이는 더욱 좋고 말이야! (왁스를 바른다)
늑구        원장님! 이건 성희롱…, 아니 성폭력이라고요!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원장이 늑구의 말은 아랑곳없이 무식하게 스트랩을 벗겨낸다. 스트랩 벗길 때 나는 ‘촥’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증폭되어 서늘하게 무대를 채운다. 늑구가 관객을 향해 입을 벌리고 늑대처럼 비명을 지르다 못내 엉엉 운다. 그 울음은 옛날 자세로 돌아간 것이 기뻐서 우는 울음인지, 왁싱이 아파서 우는 울음인지, 버는 것도 부족한데 브라질리언까지 추가되자 먹고살기 힘들어 우는 울음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원장        이제 바로 누워. (늑구가 돌아눕는다) 오우! 이렇게 (강조하며) 오올 누드로 하니 우리 강늑 씨 정말 멋지다. 아니 이뻐! 내가 확 그냥 잡아먹고 싶은걸!
늑구        원장님!

 

원장이 늑구 위로 긴 손톱이 달린 양손을 뻗쳐 정말 잡아먹을 것처럼 덮치고, 늑구는 이걸 막으려 온몸으로 저항한다. 조명이 이들의 모습을 뒤쪽 유리 벽에 커다란 검은 그림자로 비춘다. 늑대가 사람인지, 사람이 늑대인지 분간이 어렵다.

 

4장_ 사랑, 이라는 이름의 덫
카페 ‘울프’ 안. 늑구가 인간 ‘강늑’으로 완벽히 적응한 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카페 단골인 ‘여인’이 들어온다. 멀리서 강늑을 관찰하며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통화한다.

 

여인        (작은 목소리로) 타겟 확인. 왁싱 영양제 덕분에 털 색깔이 아주 고와졌어요. 오늘 밤 남산으로 유인하겠습니다. 노란 달빛이 붉게 변하는 시간입니다. 원장님께도 준비하시라고 전해주세요.
늑구        (여인을 보고 수줍은 어투로) 왔어요?
사장        (조금 떨어져서) 또 오셨네!
여인        (전화를 마무리하고는 강늑에게 다가가며) 강늑 씨! 우리 강늑 씨는 오늘도 여전히 멋지네요!

 

늑구가 등 뒤에 숨겨두었던 장미 한 송이를 여인에게 건넨다. 여인이 감동하며 받는다.

 

여인        이건 뭐죠?
늑구        오늘이 우리 만난 지 100일째잖아요.
여인        어머, 전 잊은 줄 알았는데. 역시 우리 강늑 씨 최고야! (여인이 강늑을 포옹한다) 그럼 오늘 우리 100일 기념으로 퇴근하고 같이 남산 갈래요? 오늘 보름달이 정말 예쁘대요.
늑구        (당황하며) 보, 보름달요?
여인        왜요? 늑대로 변할까 봐요? 호호, 걱정 마세요. 오늘은 그 전설의 (강조하며) 붉은 달이 아니라 평범한 (강조하며) 노란 달이니까요.
늑구        아, 그것보다 사실은… 오늘 6시에 중요한 선약이 있거든요.
여인        (시무룩해하며) 100일 기념일에 선약이 있다고요? 전 강늑 씨를 위해 100일 기념으로 특별한 곳을 예약해 뒀는데…. 할 수 없지, 취소할 수밖에.
늑구        예약이요?
여인        네, 우리 둘만이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곳!
늑구        (여인의 눈빛에 무너진 늑구가 휴대폰을 꺼내 왁싱숍 원장에게 문자를 보낸다) ‘원장님, 오늘 예약 취소할게요. 급한 일이 생겨서요.’
원장        (V.O) (답장 소리) ‘강늑 씨, 오늘 안 오면 뿌리부터 굵게 올라올 텐데?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늑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사랑 앞에 털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여인에게) 좋습니다. 까짓것 갑시다!
사장        어딜? 어딜 간다는 거야?
늑구        오늘은 좀 한가한 날이잖아요. 좀 일찍 나가보겠습니다.
사장        좀 일찍 나가 봐? 너 지금 사장한테 통보하는 거니?
늑구        네, 안 되나요?
사장        아니, 뭐 안 된다기보다는….
늑구        바쁠 때 더 많이 일할게요. 됐죠?
사장        그래, 그러지 뭐. 흐흠.
여인        (늑구가 안으로 들어가 준비하는 사이 핸드폰으로) 핸드폰 계속 켜두겠습니다. 원장님께도 전달해 주세요! (안으로 들어갔던 늑구가 근무복과 앞치마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와우! 우리 강늑 씨 언제 봐도 훈남이라니까! 남자 냄새가 물씬 풍겨요!
늑구        하하, 제가 좀 한 남자 하죠. 가시죠!
여인        네! (사장에게 손을 까딱까딱하며) 사장님, 다음에 봬요!

 

여인이 늑구의 팔짱을 끼고 카페를 나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둘이 나가자마자 손님들이 몰려든다.

 

사장        아니, 하필이면 이럴 때! (문밖을 향해) 강늑! 강늑! 쳇,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그려. 많이 변했다! 많이 변했어! 늑대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손님들에게) 어서 오세요!

 

사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5장_ 붉은 달빛, 아래서
남산 산책로 어두운 구석. 정면 뒤쪽 먼 곳에서는 불 켜진 남산타워가 보이고 한쪽 어둠 속 수풀 저 안쪽에는 ‘울프 모텔’ 사인이 빛나고 있다. 둘이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데이트하다가 둘이 마주 보는 순간, 늑구의 심장 박동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증폭되어 들린다. 둘이 키스하려는 순간 구름 사이로 거대한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인        (키스를 피하며) 보름달이 구름을 벗어났어요!
늑구        (당황하여 달빛을 피하며) 그, 그렇군요.
여인        아! 쟁반같이 둥근달!

 

노란 달빛이 강하게 늑구에게 내리쬐자 늑구가 불편해한다.

 

늑구        (목을 손으로 가리며) 우, 우리 저쪽으로 갈까요. 전 어두운 곳이 좋거든요.
여인        (가려는 늑구의 팔짱을 꽉 끼며) 엉큼하긴…. 근데 어쩌죠? 전 이 달빛이 좋은데…, 멋지잖아요.

 

노랗던 달빛이 불그스름하게 변하며 늑구를 비추자 늑구의 목덜미에서 빳빳한 회색 털이 셔츠 깃을 뚫고 솟아오른다. 늑구가 비명을 지르며 여인의 손을 뿌리치고 덤불 속으로 숨는다.

 

여인        강늑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늑구        달빛이 변했잖아요.
여인        달빛이요?
늑구        네, 노란 달이라면서요? 왜 붉은 달이 뜰 거라는 말은 안 한 거죠?
여인        달빛이 노랗든 붉든 무슨 상관이죠? 오늘은 우리의 100일 기념일일 뿐이에요.
늑구        붉은 달빛을 조심하라고 늑대왕이….
여인        늑대왕이라고요? 그게 누구죠?
늑구        알 필요 없고요. 나한테 거짓말한 거죠? 그렇죠?
여인        (늑구를 끌어내며) 늑대처럼 야성적인 강늑 씨가 오늘따라 왜 이러죠? 제가 싫으신가요?
늑구        (거부하며) 잠깐요, 저한테 거짓말했잖아요.
여인        거짓말요? 제가요?

 

불그스름했던 달빛이 이제 거의 핏빛처럼 변하자 늑구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셔츠와 바지가 갈기갈기 찢어진다. 매끈했던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며칠간 억눌렸던 털들이 폭발하듯 전신을 뒤덮는다.

 

여인       (짐짓 부끄러워하며) 어머 강늑 씨! 대체 왜 옷은 벗고 그러시는 거예요? 터프한 모습은 여기 밖이 아니라 저한테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모텔 사인을 가리키며) 저 안에서 보여주셔야죠!
늑구        (분노하며) 거짓말했잖아요, 속였잖아요. 노란 달이라면서요? (괴로워하며) 안 돼… 조금만 더… 인간으로 살고 싶어… 데이트도 하고, 스테이크도 먹고, 월급도 받아서 왁싱도 해야 하는데…! (달빛에 수풀의 그늘은 모두 사라진다. 간혹 으르렁거리는 늑대 울음을 토해내며 변해 가는 목소리로) 늑대왕 말이 맞았어! 사람은 믿지 말라고 했는데. 그리고 저 달빛, 저 붉은 달빛도 조심하라고 했는데! (여인에게) 가세요…! 제발 괴물 같은 내 모습을…! (변해 가는 자기 모습에 괴로워한다)
여인        (혼잣말이지만 싸늘한 목소리로) 괴물? 아니, 너는 지금 내 눈에 ‘이태리 명품 코트’로 보여. 털이 아주 예쁘게 올라왔네. 원장님이 공들인 보람이 있어. (목소리를 바꿔서 더 크게) 아니에요! 전 강늑 씨의 외모가 어떻든 강늑 씨 자체를 사랑해요! (더 큰 목소리로) 혹여 강늑 씨가 진짜 늑대로 변한다고 해도 저에겐 털끝만큼도 달라지는 게 없다고요! 그러니까 맘 편히 하고 이리 나오세요. 네?
늑구        나오라구요? 저 푸른 달빛 아래로?
여인        네.
늑구        지금 이게 장난인 줄 아세요!
여인        (화를 내며) 강늑 씨!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늑구        (으르렁거리며) 전 강늑이 아니라 늑구예요. 봐도 모르겠어요?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라구요.
여인        강늑 씨!

 

멀리서 ‘저쪽이다! 저쪽이야!’라는 외침들이 들리고 이내 포획팀이 나타난다. 그들의 손에는 마취총과 실탄이 장전된 총이 들려 있다. 총은 의외로 크고 잔인하게 생겼다.

 

여인        (포획팀에게 강늑이 있는 곳을 몰래 가리키며) 강늑 씨! 강늑 씨! (다가간다)
늑구        (여인에게 으르렁거리며) 제발 가라고요! 어서!

 

포획팀장이 늑구를 발견하고 총구를 겨눈다.

 

팀장        찾았다. 그렇게 안 보이더니, 털을 밀고 숨어 있었군. 영리한 놈.
늑구        (반쯤 늑대로 변한 목소리) 아니야… 난 인간… 강늑이라고…!
팀장        (냉정하게) 인간은 보름달을 보고 으르렁거리지 않아. (여인에게) 협조 감사합니다. 여긴 위험하니 어서 저쪽으로 피하세요!
늑구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며 여인에게) 무슨 말이야? 협조라니!
팀장        (여인이 자리를 뜨자) 사격 준비!
늑구       (충격에 빠진 눈으로 여인을 바라본다) 거짓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럼 날…?

 

분노가 극에 달한 늑구가 으르렁거리며 여인에게 달려드는 순간 포획팀장이 늑구를 향해 총을 발사한다.

 

늑구        (맞고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분노와 한탄을 쏟아낸다) 붉은 달, 거짓말, 거짓말! 내 모든 걸 바쳐서 사랑하려 했는데. (분노와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오늘 한 번만, 한 번만 더 밀면… 되었는데…!

 

비틀대며 쓰러지던 늑구가 젖먹던 힘을 다해 여인과 팀장에게 처절한 하울링을 해대고는 도망친다. 그 뒤로 포획팀이 일제히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자 여인이 갑자기 가로막고 나선다.

 

여인        그만! 그러다 죽겠어요! 아무리 가죽이 탐나더라도 이건, 이건 너무 비인간, 아니 비동물적이잖아요. (포획팀장이 의아해하며 총구를 내리자 다른 팀원들도 총구를 거둔다) 도망칠 곳은 한 곳밖에 없어요. 따라가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이들 머리 위로 차갑게 내려온다. 총구들이 달빛에 번쩍인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린다. 포획팀도 하울링으로 이에 응답한다. 누가 늑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6장_ 마지막, 외침
왁싱숍 앞 차가운 아스팔트 위. 저 멀리서 총성이 들리고 늑구는 피투성이가 된 채 왁싱숍 문 앞까지 기어간다. 그의 몸은 처음처럼 다시 완벽한 늑대의 모습이다. 왁싱숍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정기 휴무’ 팻말이 걸려 있다. 늑구가 문을 두드린다.

 

원장        (문을 열고 내다보다) 이게 누구야! 강늑 아냐? (원장이 잠들어 가는 늑구 앞에 쪼그려 앉는다. 늑구는 마지막 힘을 다해 원장의 가운 자락을 붙잡는다) 옷은, 아니 이 피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늑구        (가쁜 숨을 내쉬며) 원장님! 제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원장        뭘? 뭘 부탁한다는 거야?
늑구        속았어요 원장님. 노란 달이 아니라 붉은 달인 것을!
원장        붉은 달이라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란 달밖에 없는데 무슨 말이야. (애처로워하는 듯하다가 늑구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다)
늑구        구수한 커피, 생각만 해도 침이 나오는 스테이크, 흥겨운 재즈에 안락한 소파, 부드러운 피부에 멋진 옷! 그리고 달콤한 키스! 이 모든 것들이 한낱 꿈이었던가! (늑구의 몸이 늘어지고 눈이 뒤집힌 채 마지막 하울링을 하며 정신을 잃는다)
원장        (한숨을 쉬며) 에휴, 리터치 타이밍 놓치지 말라니까 말 안 듣더니. 털이 이렇게 굵게 자라서 잡혔네.

 

동시에 무대가 암전되며 그의 사체 위로 흰눈 대신 뽑히다 남은 회색 털들이 눈처럼 빛나며 흩날린다. 총을 든 포획팀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왁싱숍의 붉은 네온사인만으로 무대 밝아온다.

 

팀장        원장님! 괜찮으세요!
원장        이렇게 늦으면 어떻게요? 큰일 날 뻔했잖아요. 그리고 아무리 마취총이라도 이렇게 사정없이 쏴 버리면 어떡해요. 가죽에 손상이 가면 어쩌려고요.
팀장        죄송합니다. 우리 여자를 물려고 달려들길래….
원장        지금 우리한테 사람이 중요해요, 가죽이 중요해요?
팀장        그야 가죽이 중요하죠. 원장님, 그래도 이번 우리 협업은 정말 완벽했던 것 같습니다. 원장님 아이디어로 붉은 달을 연출한 것도 그렇고, 마취총에 붉은 물감을 탄 것도 그렇고요.
늑구        (영혼/목소리) (경악하며) 뭐라고? 원장까지 한통속이었다니!
원장        잘 끝났으니까 괜찮아요. (팀장에게 봉투를 건네며) 약속한 ‘특수 가죽’ 가공비예요. 이놈, 내가 한 달 동안 최고급 왁스로 모질 관리 잘 해놨으니까 가죽 상태는 아주 부드럽고 아주 매끈할 거예요.
팀장        역시 ‘털털한’ 왁싱숍이군요. 짐승을 잡아도 가죽이 상하지 않게 털만 골라 관리해 주시니. 이 가죽은 VIP용 코트로 제작되어 아주 비싸게 판매될 겁니다.
원장        (여유롭게) 영양제를 매일 먹였거든. 자, 빨리 실어 가요. 깨어나기 전에 산 채로 벗겨야 가죽이 부드러우니까. (늑구를 치우는 인부들을 보며) 다음번엔 어떤 녀석이 탈출하려나?
팀장        다음은 아마 호랑이가 될 것 같은데요?
원장        어머! 그래요? 호랑이 정도면 한 번에 왁스 세 통은 써야겠네. 다음엔 실수 없기예요. 알았죠?
팀장        네, 걱정 마십시오.
늑구        (영혼/목소리) 늑대답게 살아보려고 엉겁결에 동물원을 탈출했건만, 털도 다 뽑히고 고작 가죽으로 남다니! 늑대가 죽어서 남기는 것은 결국 가죽이란 말인가! 아, 결국 인간이 쳐놓은 운명의 덫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무대 밖에서 트럭에 늑구의 몸이 던져지는 쿵 소리와 짐칸 닫히는 소리에 이어 엔진 소리가 멀어져 간다.

 

원장        (멀어져 가는 트럭을 바라보며) 가죽이야 호랑이 가죽이 진짜지! 어서 강호 맞을 준비를 해야겠군!

 

여인이 숨이 목까지 차오른 상태로 달려온다.

 

여인        원장님!
원장        오, 고생했어! 늑대한테 물릴 뻔했다면서? 괜찮아?
여인        (숨을 고르며) 네. (두리번거리며) 근데 강늑 씨는요?
원장        실려 갔지. 산 채로 가죽을 벗겨야 좋은 값을 받으니까.
여인        (멀리서 들리는 하울링 소리를 향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강늑 씨! (달려 나간다) 강늑 씨!
원장        이봐! 어딜 가는 거야? 헐! 뭐야? 정말로 사랑에 빠졌던 거야? 하여튼 마음 약한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예약 가능’ 팻말을 뒤집으려다 말고 돌아서서 객석을 향해 우아한 어조로) 너희들도 인간과 늑대의 사랑, 그 흔해 빠진 로맨스를 원해? 그럼, 이 연극의 2막을 써달라고 작가님께 부탁해 봐. 혹시 알아, 그 진부한 스토리가 되살아날지. 아, 그것보다 혹시 너희들 중에 완벽한 변신을 원하는 얘들은 우리 ‘털털한’ 왁싱숍으로 와! 눈썹은 기본이고 페이스, 바디, 브라질리언까지 모든 털이란 털은 완벽하게 싹 다 뽑아 줄 테니까. 뭐야? 나는 짐승이 아니라서 뽑을 털이 없다고? 어머 벌써 잊었어? 너희들, 아니 우린 모두 짐승이었고, 지금도 짐승이고 앞으로도 짐승일 거란 사실, 잊으면 안 돼. 알았지? (앙증맞게) 이 귀여운 짐승들!

 

원장이 포효하는 짐승처럼 동작을 취하며 ‘예약 가능’ 팻말을 뒤집고 들어간다. 팻말에 붉은 조명이 켜지며 무대 암전되고 그 어둠 속에서 포효하는 늑구의 하울링이 아득하다. 막.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