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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이와 기억의 공방

한국문인협회 로고 선영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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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엄마’라는 이름은 어느 날부터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금기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거실 한복판에서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웃던 가족사진은 먼지 쌓인 창고 구석의 낡은 담요 아래로 밀려났습니다. 아빠는 엄마의 모든 흔적을 지워 나갔습니다. 엄마의 하늘색 꽃무늬 찻잔은 유리 진열장 제일 높은 칸에 갇혔습니다.
하린이가 식탁에 앉아 젓가락만 재까닥대다 입을 뗐습니다.
“아빠, 오늘 급식에 카레가 나왔는데요. 엄마가 해주던 사과 맛이 나는 카레가 기억났어요!”
아빠는 대답 대신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 볼륨을 높였습니다. TV 화면 속에서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식탁 위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아빠는 갑자기 일어나 베란다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깨끗한 유리창을 닦고 또 닦는 아빠의 등은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하린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기분이 들면 몰래 창고로 들어가 깊이 숨겨 두었던 엄마 사진을 꺼내 보곤 했습니다.
그나마 매주 주말에 아빠 손을 잡고 강변을 걸으면 마음이 뻥 뚫렸습니다. 하지만 산책은 즐거운 나들이가 아니었습니다. 아빠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었습니다. 윤슬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강물을 보면서도 하린이는 아빠의 보폭에 맞추기 위해 짧은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아빠, 저기 봐! 엄마가 좋아하던 민들레야.”
하린이가 꽃을 보느라 잠시 발걸음을 멈추려 하면, 아빠의 커다란 손이 하린이의 작은 손을 아플 정도로 끌어당겼습니다.
“바람이 차다. 어서 가자.”
아빠는 엄마와 함께 걸었던 그 기억이 강물 위로 떠오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모습은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길을 걷다 누군가에게서 엄마가 즐겨 쓰던 비누 향기가 스쳐 지나갈 때면 아빠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습니다.

 

그날도 산책을 마치고 아빠가 하린이를 재촉하며 집으로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하린이의 모자가 골목 안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아빠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하린이는 모자를 잡으러 달려갔습니다. 모자는 담쟁이넝쿨이 붉은 벽을 휘감고 있는 집 앞에 멈췄습니다.
대문에는 ‘기억의 공방: 소중한 기억을 빚어드립니다’라고 적힌 낡은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담 너머에서 왠지 모를 따스한 불빛이 아슴푸레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하린이는 가방 속에 소중히 넣어 둔 엄마의 사진을 꺼내서 아빠에게 보였습니다.
“아빠, 딱 한 번만… 저기 들어가 보면 안 돼?”
하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는 하린이의 젖은 눈망울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밀었습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진한 흙내음이 코끝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공방 안에는 오렌지빛 조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문 옆 선반에는 수백 개의 작은 흙인형들이 저마다의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연인까지. 그 인형들은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처럼 표정이 생생했습니다.
공방 한가운데에 놓인 작업대에는 주름이 깊게 팬 할아버지가 돋보기를 쓰고 무언가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빠의 긴장한 눈빛을 보고도 그저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어서 오너라. 소중한 것을 잊지 않으려고 찾아온 모양이구나.”
하린이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엄마의 사진 한 장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눈웃음을 짓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빠는 사진을 보자마자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사진 속 엄마의 미소는 아빠가 가장 지우고 싶어했던, 동시에 가장 그리워했던 바로 그 표정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찰흙 덩어리를 집어 들었습니다.
“내가 만드는 인형은 사진만으로는 절대 완성되지 않는단다. 사진은 겉모습을 보여주지만, 기억은 마음을 채우지. 꼬마 친구가 특별히 기억나는 엄마의 모습을 내게 조금만 나눠주겠니?”
하린이는 어릿어릿 아빠의 눈치를 보며 말했습니다.
“엄마는요, 제가 비를 맞고 오는 날이면 감기에 걸릴까 봐 수건을 미리 따뜻하게 데워 놨어요. 집에 들어오면 그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주었는데, 그때 엄마 손에서 나던 향긋한 비누 냄새가 정말 좋았어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묻힌 손으로 찰흙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여전히 벽에 기대어 바닥만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손끝에서 엄마의 갸름한 얼굴과 반달 모양의 눈웃음이 살아나기 시작하자, 아빠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습니다. 침묵을 지키던 아빠가 아주 작고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 그 사람은 기분이 좋을 때면 콧노래를 흥얼거렸지요. 그리고 웃을 땐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조금 더 작게 감기곤 했어요. 내가 그 눈매가 예쁘다고 놀리면 부끄러워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지요.”
한 번 터져 나온 아빠의 이야기는 둑이 무너진 것처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함께 마시던 커피 향기, 아침마다 바싹하게 구운 토스트의 고소한 냄새까지. 아빠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억을 억지로 눌러 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들이 인형의 심장에 흐르는 피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흙에 다독이고 새겼습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다시 공방을 찾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작은 나무상자를 내놓았습니다. 아빠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엄마 인형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빠가 말했던 엄마의 그 예쁜 눈매, 꼭 쥔 엄마 손에서 나던 향긋한 비누 냄새가 풍겨오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인형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습니다.
인형은 마치 ‘이제 아파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어깨를 들썩이며 “엄마의 흔적을 창고에 가두고 찻잔을 숨긴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추억을 나눌 때 마음의 상처가 비로소 아물기 시작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 하고 혼잣말을 하며 깊은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날 밤, 아빠는 유리 진열장 제일 높은 곳에 있던 꽃무늬 찻잔의 먼지를 닦아냈습니다. 그 찻잔에 하린이가 좋아하는 코코아를 탔습니다. 
“하린아, 엄마가 이 찻잔을 정말 아꼈단다. 너도 기억나니?”
아빠의 목소리는 이제는 떨리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엄마의 인형을 가운데 두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창고에 있던 가족사진도 다시 거실 벽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엄마의 체취가 묻어 있는 물건들이 집 안 구석구석을 채우기 시작하자, 텅 비어 있던 공간들이 조금씩 온기로 채워졌습니다.
주말 아침에 아빠와 하린이는 강변에 다정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린아, 저기 저 갈대밭 보이지? 네가 아주 꼬마였을 때 엄마랑 여기서 숨바꼭질을 했었어. 네가 얼마나 잘 숨었는지, 아빠랑 엄마가 한참을 찾아다녔단다. 나중에는 엄마가 겁이 나서 울 뻔했지 뭐야.”
윤슬처럼 반짝이는 아빠의 이야기에 하린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따사로운 오후, 강변길 위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이제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추억들이 세 번째 그림자가 되어 강물을 따라 흐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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