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천 리 길에 핀 위로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귀숙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조회수5

좋아요0

딸아이가 회사 대표의 모친상 부고를 전해왔다. 대표님의 상심이 크실 것 같다며, 포항까지 직접 조문을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서울에서 포항까지는 천 리 길. 장례 기간이 주말이긴 했지만, 고단한 직장 생활을 이어온 딸아이가 혼자 감당하기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나는 기꺼이 조수석을 자처하며 말동무가 되어 주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의 슬픔을 온전히 보듬기 위해 겨울 길 위에 올랐다.
돌아보면 올 한 해의 시작은 유독 시렸다. 새해 첫날, 딸아이는 고열과 탈수 증세로 새벽 응급실을 찾아야 했고, 기대했던 해돋이는 마음속에서 지워야 했다. 시작의 문턱에서 길을 잃은 듯한 기분으로 열흘을 보냈는데, 뜻밖의 부고가 우리를 다시 동해로 불러낸 것이다. 어쩌면 이 여정은 못다 본 일출을 마저 보라는, 혹은 우리가 미처 나누지 못했던 위로를 서로에게 건네라는 하늘의 다정한 초대였을지도 모른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창을 적시던 가랑비는 첫 목적지인 ‘이가리 닻 전망대’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걷히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눈앞에 펼쳐진 청량한 에메랄드빛 바다는 그 자체로 거대한 환대였다. 차에서 내린 딸아이가 참았던 탄성을 쏟아냈다. 그간 일에 치여 숨 가쁘게 살아온 딸의 고단함을, 푸른 바다가 대신 씻어내 주는 듯해 가슴이 뭉클했다.
죽도시장의 활기를 뒤로하고 도착한 장례식장은 예상보다 한산했다. 비대면 애도가 미덕이 된 시대, 천 리 길을 달려온 우리를 맞이한 대표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그가 내어준 정갈한 밥상 앞에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지닌 역설을 배웠다. 누군가의 상실을 위로하러 온 자리에서 도리어 정성 가득한 대접을 받으니, 차가운 겨울바람도 이내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오후엔 경주로 향했다. 분주한 삶을 핑계로 딸이 자주 찾지 못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그날따라 매서운 겨울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딸아이는 할머니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대며 생전처럼 조잘거렸다. 일흔이라는 나이에 너무 일찍 곁을 떠나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찬바람을 타고 산자락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경주는 어릴 적 기억뿐이라며 아쉬워하는 딸을 위해 발길을 조금 더 옮겼다. 황리단길은 예전 전주에서 추억의 골목을 걷던 날처럼 아기자기한 온기로 가득했다. 잠시 카페에 들러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피로를 달래고, 해가 질 무렵 동궁과 월지, 그리고 첨성대로 향했다. 단장된 동궁과 월지의 야경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우리는 경주의 깊은 시간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마침, 첨성대의 ‘야간 미디어 점등식’이 시작되는 순간 그 곁을 지나게 되었으니, 그 화려한 빛의 향연을 마주한 것은 오랜 여운으로 남을 행운이었다.
여행의 갈무리는 포항의 대방어회로 장식했다. 주인장의 자부심이 깃든 놋그릇 위로 고소한 대방어회가 꽃처럼 피어 있었다. 고향 같은 정이 가득 묻어나는 투박한 사투리와 덤으로 얹어준 초밥 한 점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듯했다.
다음 날 새벽, 드디어 호미곶으로 향했다. 새해 첫날 보지 못했던 태양을 열흘이 지나서야 마주하러 가는 길, 내 심장도 기분 좋게 요동쳤다. 여명이 밝아오는 바다 저 멀리서, 주홍빛 기운이 구름을 뚫고 용틀임하며 솟구쳤다. 마침내 붉은 태양이 수평선 위로 완전히 얼굴을 내미는 순간,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열흘 전 해돋이를 놓쳤던 아쉬움은 사라지고, 기다림 끝에 만난 빛은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찬란했다. 새해의 해돋이를 조금 늦게 본다고 해서 그 빛이 바래는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간절했던 기다림의 시간만큼 그 온기는 더 깊숙이 가슴에 박혔다. 나는 딸아이를 꼭 끌어안고 새해 소망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무탈하게, 올해도 또 잘 보내보자.”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고자 나선 조문 길이었으나, 돌아오는 길에 돌이켜보니 그것은 우리 모녀를 위해 준비된 축복이었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슬픔과 마주하기도 하고, 애써 세운 계획이 어긋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상황을 어떤 마음으로 품느냐에 따라 하루는 위로가 되고, 기억은 영원한 추억이 된다. 누군가를 위로하러 갔다가 오히려 내 안의 빈자리를 가득 채우고 돌아온 여행. 마음속 깊은 곳에 두고두고 꺼내 볼 붉은 태양 한 점을 품었으니, 올 한 해는 그 온기만으로도 충분히 넉넉할 테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