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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풍경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선숙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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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대형마트에 들렀더니 살 것이 많다. 계산을 마친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넣는데, 플라스틱병에 담긴 잡곡 1개를 넣을 수가 없다. 장바구니 카트는 끌고 잡곡이 담긴 플라스틱병은 한 손으로 안고 마트를 나왔다.
한적한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가로수 옆에 카트를 세우고 잡곡 병도 그 옆에 놓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에 빠져 있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세워둔 카트를 보는 순간, 한 아주머니가 허리를 굽혀 잡곡 병을 집어 들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묻는 내 말에 그녀는 당황하더니 허리를 펴며, “이 잡곡, 나 주면 안 돼요?” 한다.
선글라스를 썼고 입성도 깔끔하다.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쯤으로 보인다. 순간 오죽하면 남의 것을 집어 가려고 했나 싶어, 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좀전의 당황했던 기색은 사라지고 혼잣말을 하며 친한 척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마치 아는 이와 대화하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훔치려 했던 멋쩍음을 무마시키려는 행동이었고 주변 사람을 의식하는 행동 같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어떤 다른 얼굴을 떠올렸고 마치 갈취당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읍내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심심해서 가게에 들르면 아버지께서 용돈을 주셨다. 맛있는 과자를 사서 아껴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한 언니가 나타나 무서운 얼굴로 내 과자를 내놓으라고 했다. 겁에 질려 아무 소리 못하고 그냥 과자를 내주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인 것 같은데, 그 후로도 그 언니 얼굴은 동화를 읽을 때 나쁜 캐릭터의 얼굴로 가끔 떠오르곤 했다.
나는 장바구니 카트를 끌고 잡곡 병을 챙겨 들고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났다. 오며 생각하니, 그녀가 집어 들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냥 가져온 것이 찜찜하기도 했다. 그녀가 내 잡곡 병을 집어 들고 가는 것을 봤을 때, 내 것을 왜 가져가냐고 따져도 그녀가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잡곡 1병 도둑질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몇 달 전, 남편이 노래 반주기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남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색소폰 연주했던 행사장에서 자동차에 물건들을 실을 때 반주기를 차 옆에 두고 싣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2일이 지난 후지만 혹시 싶어 주차했던 곳으로 가봤다. 반주기가 주차장 옆 화단 위에 그대로 있다. 너무 반가웠고, 무엇보다 가격이 꽤 나가는 물건인데도 누가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우리 사회가 믿음직스러웠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카페 등에서 노트북이나 가방 같은 것들을 그대로 두고 화장실에 가는 것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물론 시시티브이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웬만큼 잘사는 나라로 경제 성장도 했고, 국민성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최근 늘고 있는 노인 범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나라는 이미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서며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노인 인구 자체가 급증하니 노인 범죄자 수도 함께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노인 부자도 증가할 테고, 운동을 즐기는 노인도 증가할 테고, 병원에서 치료받는 노인도 증가할 것이다.
요즘 주가가 올라 손주에게 용돈을 준다고 자랑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좀도둑 노인도 있다고 생각하니 노인들의 여러 인생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겁다.
지난해 12월 데이터처 국가통계연구원이 발간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5’에 따르면, 한국의 66세 이상 노인의 소득 빈곤율은 39.7%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이며, 평균인 14.8%의 두 배 이상을 웃도는 수치이다.
고령화 속에서 노인 빈곤은 새로운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노인 범죄로 대표적인 것이 생계형 범죄로, 마트 등 생활용품 절도라고 한다. 이웃 갈등, 술자리 시비 등 폭행, 상해도 있다. 남성 범죄가 많지만, 여성인 경우는 대부분이 절도, 생계형 범죄이다. 빈곤하다고 다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생계의 어려움 외에도 외로움, 사회적 단절 같은 것들이 노년의 삶을 흔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 범죄는 초고령사회가 만들어낸 고독과 빈곤의 그림자일 수 있다. 오래 사는 사회는 되었지만, 노인들이 안전하고 존엄하게 늙어 갈 수 있는 사회는 아직 먼 듯하다. 장수가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안정과 의료 서비스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관계와 관심, 돌봄도 함께 갖춰져야 할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여러 번 그만둘까 하는 고비가 있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힘든 시기를 넘겼어도 아이들에게는 엄마 노릇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눈앞의 업무에만 정신을 쏟으며 떠밀리듯 정년까지 왔고, 그 덕분에 부족하나마 경제적인 노후 보장은 된 듯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보장 너머에 젊은 시절 여유 없이 바쁘게만 산 아쉬움이 남아 있다.
인생은 늘 부족한 가운데 흘러간다. 사람은 미래를 예측해도 완벽할 수는 없다. 누가 노후의 빈곤을 원했겠는가. 누가 건강이 나빠질 것을 알면서도 방치했겠는가. 저마다 나름대로 형편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것이다.
글을 쓰는 시간은 나 자신과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요즘은 지인들과 만나 덕담을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잦다. 때로는 나이 든 지인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내가 늙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노후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젊은 날의 선택과 노력,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다. 누구나 존엄하게 늙어 갈 수 있는 사회, 가난과 외로움, 단절 등의 이유로 삶이 무너지는 노인들이 없는 사회 풍경을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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