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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과 우물

한국문인협회 로고 한남숙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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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잠시 일본에 갔을 때 그곳의 한 신사에 가게 되었다. 일주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쵸즈야’라는 의식을 행하는 자그마한 옹달샘이 있었다. 12월 추운 날씨에도 참배객들은 샘 옆에 놓인 조롱박으로 물을 떠서 왼손부터 오른손을 차례로 씻고 입을 헹구고 들어들 갔다. 물때 앉은 검은 돌과 샘 주위를 보니 오랜 신사의 역사와 함께 흐른 자연 그대로의 샘물 같아 보였었다. 차가운 물맛은 어린 날 앞니가 시리던 바가지 샘물을 기억나게 하였다.
수도가 들어오기 전 우리 집에서 세 집 건너 옆에는 작은 옹달샘이 있었고, 또 한쪽으로는 우리 집과 옆집 사이에 조그만 두레박 우물이 있었다. 그 두 곳의 물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식수였다. 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옹달샘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담는 곳으로, 아주 깨끗하고 물맛이 좋은 샘이었다. 우리 집 옆 우물은 땅을 파서 큰 드럼통을 하나 넣고 그 사이에 쇠 파이프 관을 얹어 긴 길이로 산 아래 돌짬에 있는 물줄기까지 연결하고 그 위에 흄관을 올려서 만든 깊이가 약 2m 정도의 우물이었다. 간혹 마당에 넓고 깊은 큰 우물이 있는 집들도 있었다.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할 때는 우물이 있는 집은 대문을 열어 놓아 이웃들이 물을 쓸 수 있도록 배려 깊은 인심의 헤아림도 하였었다.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여름철에는 작은 두레박 우물 안을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였다. 좁은 우물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초등학교 6학년 이웃집 오빠와 내가 돌아가며 하고 있었고, 바가지 샘도 몇 집이 돌아가며 관리를 하였다.
샘과 우물은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다 차례가 되면 물동이나 들통에 퍼담아 여자들은 머리에 이거나 손으로 들고 가지만 남자들은 든든한 막대의 양쪽에 한 통씩 물통을 걸어 한 번에 두 통씩 물지게를 지고 가기도 했었다. 샘 가까이 살고 있는 집들은 아침 일찍 밤새 고인 물을, 쉽게 떠오기도 하였다.
겨울철 추운 날씨에는 물을 푸며 주위에 흘린 물이 얼음으로 얼어 우물 덮개에 두레박이 붙어버리거나, 아주머니들이 물동이를 이고 가려다 미끄러져 애써 담은 물을 엎지르기도 했었다. 그러다 물동이마저 찌그러지기도 하였고, 미끄럼을 방지하려고 연탄재를 뿌려 놓으면 그 위에 다시 물이 떨어져 얼음은 더 두껍게 얼곤 하였다. 그 옆에서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 신발이 얼음에 붙기도 하면 서로 겸연쩍게 눈웃음 지었다. 물을 들고 갈 때는 움직이는 걸음에 흔들리는 물을 흘리지 않게 물 위에다 바가지를 엎어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의 일요일, 숙제도 끝내고 놀고 싶었는데 두레박 우물을 내가 청소해야 하는 날이었다. 어른들이 잡아주는 동아줄을 잡고 양발로 우물 안 벽을 짚으며 바닥으로 내려가, 미리 준비해 준 천 조각으로 물꼬를 막아 놓고 우물 안, 드럼통 벽의 이끼나 불순물을 바닥까지 솔로 문질러 닦고서 물을 끼얹어 씻는다. 그리면 줄을 묶은 들통을 위에서 내려보낸다. 우물 안 바닥의 씻은 물을 퍼담아 밖으로 보낸 후 바닥이 깨끗해지면 막은 물꼬를 열어 놓고 우물 밖으로 나오면 되는데, 청소를 끝내고 나니 긴장이 풀렸는지 어른들이 내려준 줄을 잡고 나오려다 다시 우물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줄을 잡아야 하는 손이 얼얼하여 힘이 없었다.
그때 줄을 잡고 내려다보시던 아버지가 “얘, 너 발 옆에 거머리가 있구나” 하시는 소리에 나는 악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우물 밖으로 나왔는데,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없다. 어른들은 소리 내어 웃으며 칭찬과 함께 작은 과자 한 봉지를 주었다. 칭찬에 쑥스러워 뻘쭘해하였던 기억, 정말 오래전 일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그때는 빗물도 받아서 알뜰하게 쓰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집 안에서 수돗물을 아쉬움 없이 편하게 쓰고 있지만, 돈을 내고 쓰는 수돗물을 두고도 정수기를 설치하거나 생수를 사서 먹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내리는 과정에서 대기 중의 오염물질이 흡수된 해로운 빗물이 몸에 닿는 것을 극히 꺼리며 백세를 바라보며 살아가고들 있다.
일본서 보았던 신사의 샘물보다 더 맑은 기억의 바가지 샘물이 아직도 솟아나고 있는지, 계속되는 개발에 거스러미 흔적조차 없어지지는 않았을지, 차례를 기다리며 놓여 있던 물동이들, 달그락달그락 바가지로 돌을 비켜가며 물을 담던 손길들, 맑은 우물 안에 떠 있는 고운 얼굴을 두레박이 떨어지며 산산조각 내어 물보라로 흩어지던 아쉬움, 칠십 년 전 샘물같이 솟던 웃음소리와 살갑던 눈길이 스크린 속 페이드 아웃처럼 멀어진다. 시대의 흐름과 발전에 많은 문화생활이 바뀌어 지천으로 쓰는 듯한 수돗물의 편리함에 익숙한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물맛 좋은 작은 샘과 얼굴이 아른거리던 우물을 잠시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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