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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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째 박경리의 「토지」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오랫동안 읽고 싶었고, 읽어야만 할 것 같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작품이다. 2부 중반, 혜관 스님과 동학군으로 활동하던 윤도집(都執)이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1910년을 전후로 일부 불교계 인사들이 벌인 친일 활동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두 사람 다 당시 비밀 결사 항일 투쟁을 벌이던 인물들이다. 윤도집이 그들을 꾸짖는다.
“아무리 조선 오백 년 배불을 일삼아서 중들이 천민으로 떨어졌기로, 또 도성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끔 천대를 받았기로서니, 어찌하여 조선 중의 서울 입성 금지를 두고 왜중이 와서 조정에다 청원을 했으며 또 그것이 해금됐다 하야 이 땅 중놈들이 왜중한테 감지덕지 상전 보듯 해야 하느냐? …이 땅에서 서자 처우도 서러운데 그래, 왜중들 의붓자식 노릇까지 해가며 구구하게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게지요? 조정이 썩고 임금이 불출인 것을 말해봐야 하품인 것을, 소승은 중놈이 더 나쁘다는 게요.”
혜관의 얼굴은 다시 시뻘게졌다. 굵다란 주먹을 휘두르고 하마 방바닥이라도 내리칠 기세다.
서슬 시퍼런 윤도집 맞은편에 앉은 혜관 스님의 모습이 임진왜란 당시 칼을 들고 선 승병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장면이다. 지난겨울 옥천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가까운 금산의 칠백의총에 승병(僧兵)이 함께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쑥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항왜 투쟁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당시 스님들의 거병과 관련하여 고등학교 검인정 국사 교과서들에서는 국토 보전 의지와 왜의 침략에 대응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쟁 초기에 관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과 승병이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불가(佛家)의 거병을 의병 활동의 한 갈래로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확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왜란 당시 승병은 의병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의병이 상민과 천민 등 일반 백성을 주축으로 구성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향반(鄕班)들이 주도하였고, 그렇다면 어떤 명분을 내세웠더라도 기존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임진왜란을 힘겹게 승리로 이끈 조선 왕조가, 전쟁의 여파로 중국과 일본에서 명(明)왕조와 豊臣秀吉 지배 체제가 무너진 것과 달리, 이후로도 300여 년을 더 지탱하였다는 것으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양반도 지배층도 아닌, 불가의 거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염두에 두고 당시 상황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까지 지배 계층에 속했던 스님들의 사회적 지위는 조선 건국과 동시에 노비나 무당, 광대, 기생과 함께 팔천(八賤) 중 하나로 추락해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의 지배 체제에 저항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아마 조선 왕실을 곱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갖 차별로 억압받던 이들이 전장으로 나선 동기를 왕실이나 국토 보전이라는 단순한 관점으로 본다면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그들을 천민의 나락으로 떨어트린 왕실의 ‘은혜’에 보답하거나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불교를 배척하면서 유교 이념 위에 세운 나라를 구하려고 탄압받던 스님들이 자발적으로 전장으로 향했다는 건 논리적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개전 후 불과 두 달 만에 왜군이 한양 코앞까지 진격해 오자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선조실록』과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이 사실을 안 한양 사람들이 분노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경복궁은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왕실과 일반 백성 사이에 깊은 골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더라도 스님의 군대가 왕실을 구하기 위해 칼을 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그들의 불법(佛法)을 보호하려 했다거나 생명을 존중하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려 했다는 관점이 보다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따지기에 앞서서, 이 땅의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훌륭한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분들의 숭고한 뜻을 내 생활에 비추어 보건대 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적 의미의 ‘국민’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임란 때의 ‘백성’은 ‘주권을 가진 국민’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으로만 인식되던 때였다. 게다가 국가와 왕실이 구별되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병 동기는 불법(佛法) 수호나 중생의 삶을 구제하는 데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해 가을, 영규대사가 이끄는 스님의 군대는 왜군에 점령되었던 청주성을 탈환하면서 조선군이 반격에 나서는 서막을 열었었다. 이후 금산전투에서 수백의 병력으로 수만의 왜병과 대적하면서 산화한 때가 바로 지금과 같은 10월이었다. 살생을 금하는 불제자들이 칼을 들고 일어서야 했던 아이러니한 이 역사는 돌이켜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수없이 반복해 보지만, 놀랍고 황당하기도 해서 동화 속 이야기처럼 실제로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일 같지가 않다.
우리 역사나 문화에는 다른 어떤 문화보다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풍부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평을 안팎에서 받고 있다. 최근 다양한 K-컬처가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원인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 속에 살아 있는 독특함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녹아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점점 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 교육 목표도 좀 더 크고 넓은 시야로,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국가관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