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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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는 조금 특별한 꿈을 꾸었다. 우리 마을 밭 한가운데에 무대가 세워지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연예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나는 그들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발끝으로 언덕 같은 둔덕을 올랐다. 박수를 치고 몸을 흔들며 공연에 빠져들던 순간,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수진 엄마, 일어나야지.”
남편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다섯 시였다. 꿈은 끝났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어쩌면 사람은 현실에서 채우지 못한 작은 설렘을 꿈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만나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선거일이다. 이미 사전투표를 마친 터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농장으로 향하는 차창 밖에는 새벽의 풍경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었다. 밤과 아침이 맞닿은 시간, 논과 밭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안개를 품고 있었고, 파랑새와 뻐꾸기는 누구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새들은 늘 옳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따지지 않는다. 때가 되면 날아오르고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고 해가 지면 쉰다. 그 단순한 삶의 질서 속에 오히려 인간의 잃어버린 지혜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상추를 따고 오디를 수확했다. 올해는 유난히 오디가 풍년이다. 데크 아래까지 보랏빛 열매가 떨어져 있고 가지마다 탐스럽게 익어 가는 모습이 마치 대지가 준비한 축제처럼 보였다. 잘 익은 오디 한 줌을 따서 입 안에 넣었다.
툭! 혀끝에서 터지는 달콤함, 어릴 적 뽕나무 아래서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도록 열매를 따 먹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났다. 사람의 기억은 참 신기하다. 오디 한 알이 수십 년의 시간을 단숨에 건너가게 한다.
곁에서는 오이와 토마토가 살을 찌우고 있었다. 산딸기 역시 붉은빛을 품으며 여름을 준비하고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누구와 경쟁하지도 않는다. 그저 시간을 따라 묵묵히 익어 갈 뿐이다.
농장에 올 때마다 그 사실을 배운다. 삶도 결국은 익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오늘 딴 상추와 오디는 지인들과 나눌 생각이다. 남편과 나는 오래전부터 나누는 일을 좋아했다. 농사를 지으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채소나 과일이 아니라 ‘함께 먹는 기쁨’이었다. 혼자 먹으면 한 끼 식사로 끝날 것이지만 나누어 먹으면 안부가 되고 정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상추가 참 싱싱하네요.”
“오디가 이렇게 달 줄 몰랐어요.”
그 한마디에 담긴 웃음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큰 선물이다. 신기하게도 나눔은 줄어드는 일이 아니라 늘어나는 일이다. 상추 한 봉지가 여러 사람의 밥상으로 흩어질 때, 그 안에 담긴 기쁨은 오히려 몇 배로 커진다. 농사는 땅에서 작물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한의원으로 향했다. 요즘 남편은 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히 상태가 많이 좋아져 매일 다니던 병원을 이제는 이틀에 한 번씩 찾는다. 당연하게 여겼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는 아픈 시간을 지나며 새삼 배운다. 오전 여덟 시 전에 도착해야 접수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7시 50분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다섯 분이 먼저 와 계셨다. 진료는 한참 뒤인 9시 30분부터 시작인데 모두들 자신의 치료를 위해 부지런히 하루를 열고 있었다.
명단을 적어 놓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남편은 아메리카노를, 나는 카페라떼와 토스트를 주문했다. 창가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짧았지만 따뜻했다. 젊은 시절에는 특별한 여행이나 값비싼 선물이 행복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평범한 아침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모른다.
현재 나는 한의원 창가에 앉아 발마사지를 받으며 남편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 창밖으로는 초여름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조용히 스며들고 사람들은 분주히 오가고 있다. 시간은 쉼 없이 흐르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하다.
문득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화려한 콘서트장,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무대는 그곳이 아니었다.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된 하루, 보랏빛으로 익어 가는 오디, 통통하게 살이 오른 토마토, 이웃과 나누기 위해 정성껏 담아 놓은 상추 한 봉지, 그리고 건강을 되찾아 가는 남편의 뒷모습이다. 그것들이야말로 내 삶을 채우는 가장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우리는 흔히 특별한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생은 대개 특별하지 않은 날들로 이루어져 있다. 행복은 그 평범한 하루를 얼마나 깊이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도 오디는 익어 가고 있다. 나무 위의 열매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함께 익어 간다. 햇살을 받아 단맛을 품어 가는 오디처럼, 나 역시 지나온 시간과 사랑과 기다림 속에서 조금씩 더 깊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창밖의 초여름 바람이 살짝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다. 그 바람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잘 익은 오디 한 알처럼, 오늘 하루도 충분히 아름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