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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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을 찾았다. 부여를 지날 때마다 한 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곳이었다. 몇 차례 먼발치로 지나친 적은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그 소망을 이루었다.
야트막한 산길에는 소나무 향이 그윽했고 산새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쌓였던 피로가 조금씩 가셨다. 백제의 옛 도읍지를 걷는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문득 삼천궁녀 이야기가 떠오르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백마강으로 몸을 던지던 여인들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낙화암을 향하던 그들은 가족과 벗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목울대까지 서러움이 차올랐을 것이다.
슬픈 역사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발길 때문인지 산길이 반들반들하게 닦여 있었다.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맺혔다. 그때 앞에 보이는 백화정 너머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백화정은 죽은 궁녀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라고 한다. 정자에 올라서니 반달처럼 굽이치는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낙화암 전망대 아래에는 숲길과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십여 분 내려가면 고란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란사는 본래 왕실을 위해 지은 절이라 하지만, 삼천궁녀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가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절 뒤편 절벽에는 고란초가 자생하여 이름을 고란사라 붙였다고 하는데, 나는 세 번이나 이곳을 찾았으면서도 끝내 고란초를 보지 못했다.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 끝에 자리한 바위 절벽이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다.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여인들이 이곳에서 꽃잎처럼 강물에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름 또한 슬픈 낙화암(落花巖)이다. 꽃 같은 여인들의 주검은 부여의 슬픔을 안은 채 서해로 흘러갔을 것이다.
나라의 패망을 슬퍼하며 목숨을 버린 여인들 가운데에는 제비처럼 날랜 이도, 양귀비처럼 아름다운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패한 군주를 모셨다는 이유로, 혹은 정절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낙화암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시퍼런 백마강 물결을 내려다보며 두려움에 떨던 순간, 어느 여인이 먼저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뒤이어 다른 여인들도 통곡하며 강물 위에 꽃잎처럼 흩어졌으리라. 그 가련한 꽃잎들은 강물을 따라 끝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나는 낙화암의 전경을 바라보기 위해 고란사 아래에 유람선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황포돛배는 옛 백제의 정취를 실은 듯 백마강 물결 위를 유유히 지나갔다. 낙화암 절벽에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이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붉은빛이 죽은 여인들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단지 위치를 알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글씨를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나는 여인들이 몸을 던졌다는 절벽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절벽 위에 노송들은 그날의 비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유람선이 강을 한 바퀴 돌아 선착장으로 향하자, 스피커에서 <꿈꾸는 백마강>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나는 낙화암과 백마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역사의 아픔이 스며든 강물은 여전히 말이 없다. 아무 일이 없었던 듯 흐르는 물결 속에서 삼천궁녀의 눈물은 흔적도 찾을 길 없지만, 낙화암과 백마강은 그날의 진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삼천궁녀’는 허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궁녀들이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기록만 있을 뿐 숫자는 적혀 있지 않다. ‘삼천궁녀’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 민제인이라고 한다. 그가 지은 시에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삼천궁녀’라는 구절이 등장하고, 이후 대중가요 <백마강> 등을 통해 백제 멸망 당시 삼천 명의 궁녀가 죽었다는 인식이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숫자에 구애받고 싶지 않다. 그들이 삼천 명이었든 아니었든, 나라의 패망 앞에서 꽃다운 생을 마감했던 여인들의 슬픔은 결코 가볍지 않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백마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나는 침묵의 물결 앞에서 전쟁의 비극과 인간의 슬픔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