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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거리, 다른 풍경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영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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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손자가 왔다. 목마르게 만나길 기다렸던 손자가 내 눈앞에 서 있는 순간, 모든 햇살이 반짝 그의 존재를 비추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미국 가서 만났을 때 “할머니, 사랑해요” 하고 어눌한 한국말로 말했던 꼬마는 사라지고 길고 단단해진 몸을 가진 대학생이 서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할머니!”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데, 그동안의 오래된 세월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손자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밥상에 김치 대신 피자를, 책상엔 한글 교과서 대신 영어 소설을 올려 두고 자란 아이, 그래서 이번 한국 방문은 그에게 처음이자 어쩌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여정이다. 손자와 큰딸, 그의 사촌인 손녀, 나와 네 식구가 명동을 갔다. 주말 오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높은 건물 사이로는 각양각색의 간판이 나 보란 듯이 번쩍였다. 낯선 풍경을 흡수하듯 바라보는 손자의 눈이 파노라마처럼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익숙한 표정, 그 속엔 처음이지만 어쩐지 아버지의 나라라는 깊은 동질감이 있지 않았을까. 나는 걸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기가 할머니가 너희 아빠랑 고모들, 작은아빠랑 데리고 나와 밥을 먹던 식당이야. 할아버지가 출장 가서 안 계실 때면 아주 가끔, 할머니가 모두 데리고 나와 이 거리를 돌아다니곤 했지.”
손자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겠다는 듯 요소요소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문득 내가 손자만큼 젊었을 때의 거리 풍경이 생각났다. 거리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지만, 풍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더 화려해졌고, 더 사람이 많아졌고, 건물들도 더 모던하게 바뀌어 있었다. 지금은 ‘명동예술극장’이라고 이름이 바뀐 시공관, 그 주위로 즉석 도너츠 가게인 ‘케잌파라’, 음악 카페인 ‘오비스케빈’, 한식당이었던 ‘한일관’ 등등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밟는 이 길, 그 속에 담겼던 기억만큼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더 많이 달라진 것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예전엔 외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거리는 북적거렸고 길거리 가운데를 차지한 가게들로 길거리 음식이 넘쳐났다. 간판 속 글자들은 한국어보다 외국어가 더 눈에 띄었다. 마치 서울 한복판에 작은 세계가 옮겨온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고 국가 브랜드가 높아지면서 관광객이 몰려오는 탓이기도 하고 또 이미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늘어났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명동의 명물인 ‘충무김밥’ 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매운 음식에 익숙지 않은 손자가 맵다고 연신 혀를 낼름거리면서도 재미있어 하면서 다 먹었다. 그 모습을 보는 우리도 덩달아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 후, 거리를 돌아다니며, 옷 가게, 향수 가게, 핸드폰 부속물 가게, 화장품 가게 등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길거리 음식으로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집에 오려고 차를 주차시켜 놓은 장소로 가는 길에 캐리커쳐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가게가 있었다.
“엄마, 기념으로 우리 넷을 그려 달래자. 재밌겠다.”
딸이 제안해서 우리는 그림을 그려주는 여자 앞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를 보는 여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한 번 보고, 손으로 그리고 또 한 번 쳐다보고 그리고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 같이 모이기도 어려운 우리인데,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어깨를 붙이고 있는 넷의 모습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옆에는 인도인인 듯한 사람 둘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다문화 가정, 이제는 우리나라도 단일 민족만을 고집할 순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 기피 현상이나, 아이 낳지 않는 것과 맞물려 인구 절감의 위기 속에서 말이다. 아직도 지구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라 간, 민족 간 싸움이 그치지 않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 한국인의 모습이고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미국 국적을 가지고 한국말보다는 미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손자는 모습만 한국인이고, 미국에서 교육받았고, 미국이 자기 나라이다. 이제는 피부색이 어떻든 인간이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지구촌이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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