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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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의 ‘연산동고분군’은 밤꽃 향기로 덮여 있었다. ‘나, 밤나무가 바로 여기에 있어, 찾아봐 줘’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무심코 지나치는 과객을 불러 세우는 강렬한 끌림이었다. 나뭇가지마다 자잘하고 몽글몽글한 흰 꽃들이 작은 포도송이처럼 한가득 달려 있었다. 그 수수한 모양새 뒤에 숨은 짙은 향기는 지나가던 이의 발걸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경주의 왕릉 같은 고분 18기가 배산 자락을 따라 일렬로 쭉 뻗어 있었다. 조상님들을 찾아뵙듯 용의 몸통처럼 솟구친 고분군 곁을 따사하고 달콤한 햇살과 함께 거닐었다. 살랑살랑 5월을 배웅하는 봄바람에 밤나무 잎사귀와 매혹적인 꽃향기가 흩날렸다. 고분 언덕의 실루엣을 따라 햇빛에 반짝이는 솜털처럼 가녀린 풀들이 춤추듯 하늘거리며 나직이 몸을 기울였다. 6세기 부산의 역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학창 시절 역사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면서 늘 부산의 정체성이 궁금했다. 1970∼80년대만 해도 부산은 김해 가야도, 경주 신라도 아니었다. 반세기 가까이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부산을 되돌아보니 켜켜이 쌓여 있던 부산의 선사와 역사, 정체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도 동삼동패총과 동래패총에서부터 가야계 복천동고분군, 신라계 연산동고분군, 배산성지와 동래고읍성지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풍성했다.
배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펼쳐진 바다와 산자락까지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배산산성의 지리적, 전략적 이점이 무엇인지 저절로 이해가 갔다. 배산의 정상석 옆에 쌓아둔 돌무지를 보면서 “아! 이게 석성의 자취인가” 실감했다.
배산에 오른 목표는 하나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성된 배산산성의 집수지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틈나는 대로 답사를 다니면서도 산속이나 산성에서 집수지를 본 적이 없었다. 배산에서 연산동고분군 쪽으로 하산하는 가파른 경사면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한 쌍의 ‘계단식 나선형 집수지’를 본 순간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을 보는 듯한 경이로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산성에 우물이 아니라 집수지가 있다니. 강수량은 풍부한가. 냇물을 못 보았는데 어떻게 물을 모았지?’ 이건 나중에 든 생각이었다.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과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를 모으고 진흙 방수 기술로 물을 가두어 둔, 고대인들의 첨단 저수지였다. 작은 산속에 이렇게 큰 집수지가 두 개나 숨어 있었다니. 유사시 많은 사람의 식수원과 생활용수로 쓰기에 지금 봐도 괜찮은 고대 건축물이었다. 집수지 바로 아래 복원된 석성의 중간은 통일신라시대, 양옆으로는 삼국시대 축성법으로 이어져 세월에 따라 수리했던 흔적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평소 평지성과 산성 세트로 된 고구려성을 보고 싶었는데, 대한민국의 남단 부산에서 신라∼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산성과 평지성’ 세트인 ‘배산산성과 동래고읍성’을 보게 되는 행운을 만났다.
거칠산군이라고 불렸던 일대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개칭되었다. ‘신라∼고려시대 동래성’은 바로 현재 망미동 ‘동래고읍성지’ 일대였다. 지금 동래읍성의 500년 역사보다 더 긴 800년 역사를 가진 중심지다. 등잔 아래가 어둡다고, 어릴 때부터 수영동에 살았어도 처음 발견한 부산의 역사성과 장소성에 매료되어 ‘유레카’를 외쳤다. 한국사를 지금처럼 발로 밟아 가며 공부했다면 수업 시간에 졸지는 않았을 텐데.
거칠산국의 가슴을 적시며 달려온 온천천이 수영강의 품에 안기고, 그 물길이 다시 해운포에서 넓은 바다와 만나며 거대한 흐름을 이룬다. 이 풍요로운 물줄기는 선사시대 이래 이 땅에 터를 잡은 인류의 삶과 문명을 길러낸 위대한 젖줄이었다. 비록 구석기와 청동기 유적은 빽빽이 들어선 주택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사라져 갔지만, 온천천 변에 남아 있는 동래패총, 마안산 아래 복천동고분군은 부산의 정체성이 변한과 가야의 철기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을 기점으로, 금관가야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거칠산군과의 교류도 서먹해졌다. 6세기 신라가 가야를 넘어 세력을 확장하면서, 거칠산국의 지배층은 복천동을 떠나 온천천 건너 연산동에 둥지를 틀었다. 신라의 색채가 짙어진 연산동고분군과 배산성, 동래고읍성은 가야에서 신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상징적 유적이다. 비록 고려 말 왜구의 침략으로 중심지가 지금의 동래읍성으로 옮겨 가며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이 일대는 900년 넘는 세월 동안 동래의 중심이었다. 그렇게 역사의 무게중심은 온천천을 건너왔다 가길 반복했다.
부산시청은 1998년 중구 중앙동에서 연제구 연산동으로 이전했다. “왜 연제구일까” 스쳐 갔던 의문이 이제야 풀린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동래패총, 복천동 연산동 고분군, 배산성과 고읍성, 동래읍성, 원도심(중앙동, 광복동), 그리고 해운대 신시가지(구석기 유적지)와 센텀·마린시티, 연산동 부산시청(고읍성 인근)으로 실생활과 행정의 중심을 옮겨왔다. 배산성지의 집수지처럼 과거의 역사와 기억을 켜켜이 쌓아 올리며 높이를 더해 간 ‘나선형의 여정’이었다.
도시의 역사만 그러할까. 내 인생 역시 넘어지고 좌절하며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과거의 경험을 디딤돌 삼아 조금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해 온 나선형 궤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연산동 부산시청 앞에 섰다. 근대적인 성곽처럼 우뚝 서 있는 시청을 바라보며, 거대한 나선형 역사 속에서 오늘 내가 찍고 있는 발자국이 먼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설레는 마음으로 저 너머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