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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문턱에서 만난 제자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종원(용인)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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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교수님 아니신지요?”
무언가 은밀한 일을 도모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낯선 듯 익숙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이름을 선뜻 떠올리지 못해 무안해할 그를 배려하려 “낯은 익은데 성함이 잘…” 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00학번 경제학과 제자이자 현재 지점장으로 근무 중이라는 그는 내 수업을 두 강좌나 들었다며 반가움을 표했다.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음직한 스승을 이리도 살뜰히 알아보는데, 정작 본인은 제자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니 미안함이 앞섰다. 오찬 약속 때문에 서둘러 떠나는 제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원래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껌 한 통을 애꿎게 주문하며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안도의 한숨 뒤로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전날 밤, 강아지와 고양이 한 쌍이 내 가슴으로 와락 안기는 꿈을 꾸었다는 말에 아내는 “길몽이니 복권이라도 한 장 사보라”며 농담을 던졌다. 태몽에 가까운 꿈이라 여겨 흘려들었지만, 우연히 지나던 길가에 로또 판매점이 눈에 들어오자 자석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멈춘 터였다. 복권을 사려던 찰나에 제자를 만났으니, 강단에서 엄격히 경제를 논하던 교수가 길거리에 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행여나 품위 없게 보였을까 싶어 황망히 자리를 떴다.
사실 복권을 사는 행위 자체는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당첨 확률이 814만 분의 1에 불과하니, 이는 결국 복권 주관처가 설계한 공익사업에 기부하는 셈이다. 재직 시절, 강의 중에 당첨 확률을 높이는 번호 조합을 알려주겠다고 호기롭게 말하자 학생들의 눈이 번뜩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제시한 번호는 ‘1, 2, 3, 4, 5, 6’이었다. 학생들은 실망 섞인 탄성을 내뱉었지만, 이론적으로 어떤 조합이든 당첨 확률은 동일하다. 매주 한 번씩 산다 해도 해당 조합이 나오려면 거의 천만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로또 당첨은 그야말로 ‘기적’의 영역이며, 절박한 이들에게는 찰나의 희망을 사는 행위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복권 구입이 고소득층보다 저소득층에서 더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국가 재정 충당을 위한 사업에 오히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의 소득이 더 많이 흡수되는 역설적인 구조다. 근대 국가의 ‘국민개세주의’와 ‘조세 법정주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기에 민감한 집권층은 조세 저항을 피하면서도 재정 적자를 메울 수 있는 복권 판매에 매력을 느낀다. 결국 로또 구매자는 가처분 소득의 일부를 자발적인 ‘추가 세금’으로 국가에 헌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자발적 기여’의 역사는 깊다. 고대 중국의 황제나 이집트의 파라오, 그리고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복권을 통해 만리장성 건립이나 전쟁 복구 자금을 마련했다. 순수한 복권의 효시는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로 꼽히기도 하는데, 불타버린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강제로 복권을 팔고 노예나 배를 경품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복권은 늘 국가의 부족한 곳간을 채우는 변칙적인 수단이었다.
흔히 돼지꿈을 행운의 상징이라 하지만, 통계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복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등 당첨자의 약 절반은 돼지가 아닌 ‘조상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떤 꿈도 꾸지 않고 당첨된 경우도 절반을 넘는다 하니, 꿈과 행운 사이의 인과관계는 그리 견고하지 않아 보인다. 내가 꾸었던 강아지와 고양이 꿈 또한 행운의 목록 어디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었으니, 잠시나마 헛된 기대를 품었던 내 모습에 멋쩍은 웃음이 났다.
어정쩡해진 마음을 달래려 플라톤이 언급한 ‘기게스의 반지’를 떠올려 보았다. 보이지 않는 힘을 가졌을 때도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제자를 마주치고 당혹스러웠던 것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도덕적 엄격함을 지켜야 한다는 유교적 ‘신독(愼獨)’의 가르침이 내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로또가 공익을 위한 재원 마련의 방편이라면, 그 구입에 지나치게 가혹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69년 주택복권의 구호처럼 ‘도와줘서 흐뭇하고 당첨돼서 기쁜’ 마음이면 충분하다.
길가에 흔히 핀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만 분의 일 확률로 돋아나는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 한다. 우리는 풀밭에 널린 수많은 행복을 짓밟으며 단 하나의 행운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확실한 미래의 요행 때문에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듯싶다. 로또라는 작은 유희가 일상을 흔드는 도박이 되기보다, 내 작은 기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길 바란다. 세 잎 클로버 세상 같은 일상의 행복을 잠시나마 잊었던 내게 그날 제자가 건넨 반가운 인사야말로 가장 확실한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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