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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박보라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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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사장이 무소르그스키의 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층 전체를 갤러리로 사용하는 카페 ‘그림자’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꼭 들른다. 나뿐 아니라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이 그러하겠지만 단순히 커피 한 잔을 마시러 온다기보다는 허전함을 채우러 온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벌써 입구를 들어서면 어깨에 멘 가방끈이 바닥으로 밀려 내려가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난 서둘러 팔꿈치를 접는다. 턱 하고 가방끈이 팔꿈치 안쪽에 걸리면 몇 발짝 더 카페 안으로 내 몸을 밀어 넣는다. 그러면 가볍게 흔들리는 가방이 내 허벅지를 몇 번 툭툭 치며 주문을 재촉한다.
“라테요. 오트밀크로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마시고 갈 거니까 머그잔에 담아주시겠어요?”
얼마 전 위경련으로 간 응급실에서 커피를 삼가라고 했다. 특히 우유나 크림을 넣은 라테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의사의 입술은 에스프레소처럼 지나치게 검고 썼다. 그러니 적절하게 오트밀크로 합의한다. 늘 몽롱한 내 머리는 강하게 반발하겠지만 위장도 한 몸이니 둘 사이엔 적절한 교집합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무의식은 늘 같은 자리에 엉덩이를 박는다. 나 역시 그렇다. 늘 앉는 통창 쪽 자리. 바깥 정원이 훤히 보이는 통창은 두 팔을 벌려 족히 열 명은 들어갈 만한 가로 길이와 삼 층은 될 법한 층고로 인해 시원하게 열려 있다. 거기에 굵은 줄 하나를 그은 듯한 두꺼운 나무 테이블은 제법 단단하다.
“이든, 오트밀크를 넣은 라테 준비되었어요.”
직원의 목소리에 가방만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워진 오트밀크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잔을 받자마자 습관처럼 코를 박았다.
“위층 갤러리에서 이번 주부터 열리는 전시 팸플릿이에요. 혹시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올라가 보세요.”
머리를 대충 올려묶은 직원이 옅은 보라색의 팸플릿 하나를 건네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고 보니 들어오는 입구에도 같은 것들이 작은 바구니에 차곡히 담겨 있던 게 떠올랐다.
커피를 마시면 누구에게나 무료로 제공되는 전시가 이 카페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곳 사장의 취향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예술 잡지나 기사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순 없지만 사람들은 딱히 캐묻지도 않는다. 그저 그가 펼쳐 놓은 가보지 못한 길을 따라 이쪽으로 걷고 저쪽으로 걸으며 즐길 뿐이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내 자리로 돌아가 통창을 마주하고 앉았다. 커피는 잠시 가방 옆에 두고 팸플릿부터 살폈다. 총 열 개의 작품 중 다섯 작품이 소개되어 있고, 맨 앞장엔 ‘모두 이야기를 가졌다: 사람’이라는 전시명이 세로로 적혔다. 그리고 그 아래엔 희미하고 어두운 글씨로 ‘상상 표현 무한성: 사람’이란 부제도 붙었다. 무광 재질이 손끝에 닿아 들떠 있던 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띠링. 강 피디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 앞부분이 잠시 화면에 떴다가 사라졌다. 난 그가 무슨 메시지를 보냈을지 안다. 매주 올리기로 한 영상을 위해 서둘러 대본 파일을 보내란 것일 테다. 난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이야기를 메시지로 적는 건 비효율적이다.
“어디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어디인지 뻔히 알면서. 집에선 영 집중이 안 돼서 집 앞 카페에 나왔어. 요청한 건 곧 보낼게.”
“편집 때문에 나 요즘 진짜 죽을 것 같아. 너도 프롬프트같이 작업해야 하니까 오늘 대본 나오면 내일 하루 종일 나랑 붙어 있을 생각해라. 렌더링 걸고 쉴 때까진 너도 쉴 생각하지 마. 그리고 외전도 만들어야 하고, 질의응답 영상도 만들기로 한 거 안 잊었지? 그러니까….”
강 피디의 말소리와 카페 안 음악이 뒤엉켜 두 세계의 속도 충돌이 일어났다.
“강 피디, 잠시만. 알았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 어차피 나 이제 본업 그만둬서 시간 많으니까.”
그제야 전화기 저편의 속도가 드디어 이쪽과 맞춰졌다. 아직 손에 쥐고 있는 전시 팸플릿을 쓸어내렸다. 호흡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강 피디의 긴 호흡 소리가 내게로 건너왔다.
“그래. 그런데 너 진짜 괜찮아? 그래도 아직 구독자 만 명 이제 막 넘어서 적자인데.”
“괜찮아. 네가 힘들지. 사업하는 것도 있는데 내가 괜히 끌어들인 거 아닌가 싶어 미안하고. 나도 처음이라 너한테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야. 제수씨 갓난애 데리고 고생하시는데 내가 볼 낯이 없다.”
“됐어. 장모님이 집에 와 계셔. 나중에 이거 잘 되면 우리 애 유모차 나 비싼 걸로 바꿔주던가.”
강 피디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치솟았다. 그리고 우리는 몇 마디 더 작업에 관해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코끝에 데운 오트밀크 향이 와 닿았다. 두꺼운 컵 손잡이에 두 손가락을 겨우 끼워 넣어 들어 올렸다.
공간이 변한다. 통창 밖 풍경은 마물의 눈동자가 여기저기 박혀 있다. 초록 나뭇잎들이 얼기설기 얽혀 그늘을 만들고 그건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그래서 이 자리에 앉으면 내가 마탑주가 된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이 체격에 님프 설정은 무리이고, 공작이나 백작은 잘생긴 남자 주인공들 몫이니 슬며시 발을 뺀다.
랩톱을 열었다. 클로드는 유용하다. 내가 쓰는 모든 인공지능 드라마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냉철한 북부대공 남자 주인공 레온과 성장하는 캐릭터인 여자 주인공 탑주 헤스티아의 이야기를 로맨스 판타지 이야기로 쓰려고 해. 이 둘의 어린 시절의 연계성을 만들 만한 서사를 제안해 줘.

 

1.혐오 관계 서사: 레온의 아버지는 마물을 막기 위해 헤스티아의 어머니인 마탑주를 전쟁에서 무리하게 내몰았고, 그 결과 그녀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함. 헤스티아는 그 후로 마법사들의 손에 길러지며 복수를 위해 힘을 길러 북부로 향함.
2.쌍방 구원 서사: 레온의 아버지가 마물을 막기 위해 전쟁터에 나갔다가 죽게 됨. 이 전쟁에서 헤스티아의 어머니 역시 마탑주로 싸우다가 죽게 됨. 레온은 아버지를 잃고 흑화되어 자신의 오라를 조절하지 못해 위험에 처하고, 그것을 헤스티아가 가라앉혀 줌. 헤스티아는 레온에게 동질감을 느끼지만, 레온은 복수심과 책임감만 남음.
제안서를 받아 든 난 머릿속에 여러 장면을 그리고 조합했다. 뻔한 이야기 전개. 그래도 구독자 수를 늘리기엔 저만한 서사도 없다. 이런 혐오 관계 서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만 봐도 명확한 인기의 근본이다. 줄리엣의 명대사, “나의 유일한 사랑이 나의 유일한 증오에서 싹텄구나!”처럼 그들은 후에 사랑에 빠질 예정이다. 쌍방 구원 서사 또한 「템페스트」의 미란다와 페르디난드를 통해 이미 증명되었으니 둘 중 무엇을 선택해도 무리가 없다. 문학성과 예술성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입맛이 떫다. 부드러운 줄 알고 한 모금 삼킨 라테가 끝에 쓴맛을 남기고 입 안에서 퇴장했다.

 

대학생 때 한국에서 이름께나 날린다는 소설가가 우리 학교에서 짧은 강의를 하러 온다는 포스터가 과 게시판에 붙었다. 그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어 학교 도서관을 뒤졌다. 다행히 신작은 아니지만 몇 년 전 출간한 책 한 권을 해외문학 코너에서 겨우 찾았다. 진한 하늘색에 하얀색 구름만 그려져 있는 단순한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한창 그때의 유행이기도 했다. 그날은 딱히 강의가 많은 날이 아니어서 단숨에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끝냈다. 뒤표지를 덮으며 생각했다. 그저 그런데 왜 인기가 많은 걸까. 문체는 평범했고, 이야기는 온갖 클리셰를 버무려 놓은 듯 뻔했다. 하지만 캐릭터들은 강렬했다. 어둡고 강하지만 사랑에는 약한 남자 주인공, 부모의 반대에도 사랑을 찾아 어두운 세계로 용감하게 발을 들여놓는 여자 주인공. 그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더 강렬하게 서로를 끌어안았고, 서로의 구원이 됐다.
책을 다시 꽂아두고 나오다가 포스터 앞에 섰다. 작가 프로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춘문예나 유명 문예지, 문학상을 받아 등단한 이력이 없다. 그저 블로그와 브런치에 자신의 소설을 연재하다가 그것을 묶어 책을 냈다. 그것도 스스로 일인 출판사를 만들어서.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후로 낸 두 권의 책도 연달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그는 단숨에 인기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열심히 글쓰기를 배우고, 문학을 전공하는 내게 그의 이력은 함부로 영역을 넘어온 이방인의 무례함이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포스터를 확 뜯어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하지만 난 그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 미국인을 포함한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한국인들이 오십 명 정도 모여 자리를 채웠다. 난 뒤에서 세 번째 줄 끄트머리 빈자리에 앉았다. 앞 테이블엔 그의 신간이 세 줄로 쌓여 있었다. 사회자가 행사 마지막에 사인회가 있다고 책 구매에 대해 안내했다. 책을 미리 가져오거나 그 자리에서 사면 작가가 앞장에 사인을 해 준다는 것이다. 저 많은 책을 한국에서부터 다 들고 온 걸까 하는 잡념이 들었다. 아니면 행사를 준비하는 학교 측에서 미리 구매해 둔 건지. 어느 쪽이든 별로 관심은 없다. 단지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한 가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다. 난 표적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저격수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강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오늘 좋은 강의해 주신 홍의주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마 이 자리에 많은 분이 홍 작가님께 질문하고 싶을 텐데요. 어떤 것도 괜찮으시답니다. 작품에 관련된 질문이나 작가님 개인에 관한 궁금증, 글 작업, 요즘 한국 문학 필드에 관한 것 등,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삼십 분만 질의응답 시간 가져 볼게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을 유학생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먼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작가님께서 이번 작품을 쓰게 되신 동기와 작업하실 때 가장 염두에 두신 것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학생의 말에 그는 잠시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아버지도 안 계셔서 어머니가 유일한 가족이었는데 제겐 정말 아무도 곁에 남지 않게 된 거죠. 그렇게 외로운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 교회 목사님께서 제가 수능을 치고 대학에 갈 때까지 교회 수양관에서 머물게 해 주셨어요. 그 수양관에 옥상이 있었는데 전 밤마다 거기 올라가서 평상에 누워 있는 걸 참 좋아했어요. 어떨 땐 별이 쏟아져 내리는 것같이 많이 뜬 밤도 있었고, 어떨 땐 정말 깜깜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도 있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깜깜한 밤하늘이 더 위로되더라고요, 마음이 차분해지고. 그래서 그런 글을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어두운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공감되고 감동되는 이야기 있잖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 팀 버튼의 작품처럼요. 그래서 어렵지 않고 마음에는 남는 그런 이야기가 되도록 제일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다음엔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는 외국인 교수의 질문이 이어졌다.
“작가님의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요즘은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유행이 되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접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세계를 감동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다시 한번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이번엔 더 진중하게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제가 한국 작가를 대표한다고 할 순 없지만, 인간의 이야기는 보편성을 가지니까 진솔하게 풀어낸다면 누구에게나 통하지 않을까요? 특히 한국의 이야기들은 절제와 폭발 두 가지를 참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독자와의 밀당? 숨겼다가 확 나타났다가 그런 감정의 균형을 잘 잡으니, 이야기가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제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을 잡아먹는 거대 벌레를 등장시켜 긴장감을 주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고민과 선택 속에 양면성을 그려냈잖아요. 드라마화된 작품도 같은 결을 갖고 있고요.”
그의 두 번째 답이 끝나고 내가 손을 들려 했을 때, 내 옆에 앉은 컴퓨터학과 학생에게 순서를 뺏겼다. 하지만 난 순서가 적합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질문은 내 질문을 더 뾰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인공지능을 사용한 예술작품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챗지피티나 제미나이로 대본을 짜고, 매직라이트로 캐릭터,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고, 수노로 배경음악을 만들면 드라마를 혼자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죠. 혹시 작가님께서는 인공지능을 사용해 작업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그렇게 작업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강의실 전체가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다. 누구 하나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그의 입에 눈을 모았다. 다들 궁금해 하지만, 선뜻 질문하지 못했던 것. 어쩌면 누구는 이미 이 시장에 뛰어들어 공부하거나 작업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후 드디어 입을 뗐다.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왜냐하면 이 이슈는 정말 많은 작가와 각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예술가들의 공통된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먼저, 저 역시 인공지능 도구를 사용해 작업해 본 적이 있습니다. 자료 조사를 할 때나 배경, 캐릭터를 만들어낼 때 주로 사용하죠. 문장을 만들거나 이야기를 짜는 건 시도해 봤지만 아직 그 정도 수준의 작업을 하기에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저는 문학상 수상으로 작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문학상 공모 요강을 가끔 찾아볼 때가 있는데요. 거기 보면 거의 다 인공지능을 사용하면 안 된다든지 인공지능을 사용했다면 어느 부분에서 사용했는지를 반드시 명시하라고 쓰여 있어요. 경고문같이요.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마도 앞으로 화가나 음악가 같은 예술가들도 점차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범위가 늘어날 거예요. 그러면 예술이란 기준도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피할 순 없겠지만 그렇게 변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난 이때다 싶어 얼른 손을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이크가 내게 쥐어졌다.
“들어보니 작가님께서는 문학성이나 예술성보단 대중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글자를 도구로 하는 예술이고 예술은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과 생각을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영역이 아닌가요? 그것을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극적이고 뻔한 방식으로 드러내어 돈을 좇는 것 같은 현상은 좋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문학 전공자나 문예 창작을 공부하며 작가를 꿈꾸는 분들도 계실 텐데 이런 사람들에게 작가님은 이 시대의 작가를 대표해서 뭐라고 해 주시겠습니까?”
질문을 다 마치고 자리에 앉는데 치솟은 감정 때문인지 숨이 찼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이번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오히려 빤히 내 눈을 한동안 쳐다봤다. 알 수 없는 눈빛이 서로 오갔다. 질문과 답이었을 것들이 수차례 공중에 오가다가 그의 긴 한숨으로 멈췄다. 그리고 그는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마이크를 꼭 쥐며 말을 이었다.
“문학성, 예술성, 대중성을 다 가질 순 없는 겁니까, 라고 교수님께 질문하던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지금 질문자처럼 말이죠. 그 학생에게 교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어요. 그 세 가지를 다 가질 수 있다면 그는 천재라고. 그런 사람은 한 시대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다면서요. 그 학생은 고민에 빠졌죠.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어요. 그 학생은 신춘문예와 유명 문예지, 문학상으로 자기 글들을 보내는 대신 열심히 블로그와 브런치에 자신의 글들을 올렸습니다.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고, 그때그때의 반응을 살피며 조금씩 작품을 다듬어 갔죠. 독자들은 열광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이 이야기들이 위로되었다고 말해 주었죠. 어려운 글들은 눈이 잘 안 가고 이해하기 힘든데 이건 쉽게, 금방 읽을 수 있고, 너무 재밌어서 하루 종일 생각난다고요. 네, 그 학생이 바로 접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선택이 평생 제 발목을 붙들 거라고 생각 잘 하라고 하셨지만 전 대중성을 잡기로 한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자리에 계신 작가 지망생 중 이 시대의 천재가 나온다면 저도 기쁠 것 같아요. 꼭 그분의 팬이 되어 사인회에 찾아가겠습니다.”
더는 숨이 차지 않았다. 오히려 별이 하나도 뜨지 않은 밤하늘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그날 난 과거의 대학생이었던 홍 작가를 강의실에서 대면하고 서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로 난 에스프레소 대신 라테를 마시기 시작했다.

 

레온: (북부 지역의 지도를 보며) 이쪽은 너무 좁아. 오라라도 쓴다면 무너져 내릴 거야.
리하르트: (레온의 곁에서 함께 지도를 주시하다가 다른 쪽 골짜기를 짚으며) 그럼 이쪽으로 마물들을 유인한 다음, 마탑주를 모셔와서 공격해 보면 어떨까요? 전하 혼자는 무리입니다. 그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저번에도 홀로 싸우시다가 크게 부상을 입으셨잖아요.
레온: (말을 막으며)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헤스티아는 저번에도 날 구하려다가 무리하게 능력을 써서 며칠째 깨어나지도 못했잖아. 난 이번 전쟁을 헤스티아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
리하르트: 헤스티아 님은 마탑주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역할이고, 운명이란 걸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레온: (말없이 지도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챗지피티는 북부 대공인 레온이 마탑주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헤스티아를 희생시키고 마물들을 모두 막아내는 데 집중하느냐, 그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그 무리를 감당하고 희생하느냐 이 점이 이번 회차 이야기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결과적으론 해피엔딩 전에 주인공들이 맞아야 할 시련이니 로맨스 판타지에선 필수 항목인 셈이다. 저번에 강 피디가 뽑아 놓은 북부 대공의 성과 그 앞의 어두운 숲, 그 사이에 눈 쌓인 넓은 벌판 그림이 큰 도움이 됐다. 그곳은 곧 마물들로 가득 찰 것이고 북부 대공의 군사들이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법한 갑옷을 입고 나와 멋진 전쟁 장면을 만들어낼 것이다.
지난 회차가 플랫폼에 올라갔을 때, 단번에 인기작 순위 일 등을 찍었다. 전 작품이 성공리에 끝났기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작가명 하나만으로도 만 명의 구독자가 작품을 신뢰하며 마우스를 클릭한 것이다. 새로 나올 다음 회차를 위해 알림을 설정하고 애정 장면만 나오면 ‘좋아요’ 수가 초 단위로 자릿수를 바꾼다. 인공지능 드라마를 만들기 전엔 웹소설을 썼는데 한 달에 억 단위의 수익이 난 적도 있다. 몇 작품은 드라마 제의도 들어왔다. 그러다가 시대를 타고 누군가 인공지능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직 완벽한 수준으로 다루는 사람은 못 봤지만, 학습은 속도를 내고 있으니, 앞으로는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작품을 볼 날도 머지않았다.
레온의 다음 대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차피 영상 길이가 길지 않으니 바로 헤스티아와의 애정 장면으로 넘어갈까, 구독자들이 좋아할 테니. 컵을 다시 들어올려 라테 한 모금을 마셨다. 미지근한 온도에 입술이 말려들어 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가 불편하다. 그때 통창에 두꺼운 노크 소리가 들려 눈길이 그쪽으로 옮겨 갔다. 굵은 빗방울이다. 소나기가 한차례 온다고 했던 일기예보가 떠올랐다. 컵을 다시 내려놓다가 손끝에 닿은 팸플릿을 내려봤다. 그리고 마침 누군가 짜 놓은 것 같은 대사를 던지며 여자 두 명이 내 뒤로 지나갔다.
“이번 전시 슬프지만 정말 로맨틱하지 않아? 난 진짜 무슨 소설 한 편 보고 나온 줄.”
“난 저거 진짜 드라마나 영화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가슴 간질간질해서 나 연애 세포 다시 살아났잖아. 아, 연애하고 싶다.”
“작가도 누군지 정말 궁금해. 근데 작가 정보는 없네. 마지막 날은 오겠지? 여기 전시회 항상 마지막 날엔 작가와의 시간 행사 하잖아. 그날 꼭 와야지. 너도 같이 올 거지? 시간 빼 놔라.”
“당연하지. 나 이 작가 내 최애가 될 듯.”
그림 전시를 보고 온 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대화 같았다. 위층 갤러리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려다봤다. 철제 손잡이는 아래가 두꺼운 유리였다. 계단은 나무였지만 명도가 어두워 그것마저 철제처럼 느껴졌다. 그 계단은 한 번 꺾어 올라가기 때문에 아래층에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마탑처럼 비밀스럽다.
홀리듯 일어나 계단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발에 닿는 소리가 묵직하다. 고개를 들어서 남은 계단을 눈으로 계수했다. 어림잡아 스무 개는 넘어 보였다. 다른 손으로 벽을 쓸며 올라갔다. 콘크리트 질감이 거칠면서도 차가웠다. 그래도 손을 떼긴 싫었다. 계단이 꺾이며 공기마저 달라졌다. 삼나무 향이 담백하게 났다. 전에 왔던 전시 땐 달콤한 향이 났다. 아마도 전시 콘셉트에 맞춰 카페 사장이 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층 전체는 갤러리다. 전시에 따라 섹션을 나눠 놓지만, 이번 전시는 섹션 구분 없이 벽을 둘러 작품을 걸었다. 그래서 훨씬 넓게 트여 시원한 느낌이 든다. 계단 앞에 팸플릿과 똑같은 디자인의 배너가 세워져 있고, 그 옆 책상엔 여분의 팸플릿과 꽃병이 놓여 있다. 말린 건데도 생명을 아직 머금은 듯 화려하게 팔을 뻗고 있는 꽃들이 팸플릿을 집은 것처럼 늘어져 있다. 화병은 파란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물고기가 꽃을 입속에 삼키려는 것 같기도 하다. 난 허리 숙여 방명록에 내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적었다. 아날로그식의 방명록엔 이곳에 다녀간 관람객들의 간단한 정보가 써 있고, 어떤 이들은 옆에 작게 소감을 적어 놓고 가기도 했다. 나의 소감은 아직이다.
전시장 안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흘러나왔다. 내가 카페 사장이 그의 팬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카페엔 늘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흐른다. 그것이 매일 같지 않은 것이 좋았다. 어떤 카페는 가면 매번 같은 플레이리스트가 흘러 무료한데 비해 이 카페에선 딱 그날에 들어야 할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엔 빈티지 재즈, 해맑은 오전엔 보사노바, 밤엔 엘라 피츠제럴드나 빌리 홀리데이의 끈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지루한 수요일엔 쇼팽의 발라드 전곡을, 늦여름의 끈적한 날엔 여러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여러 변주곡으로 때때마다 바꿔서 들을 수 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름 그 놀라운 발견에 뿌듯해하며 언제나 내 지정석을 지킨다.
오늘은 피아노로만 연주되는 그 곡을 전시장 배경에 깔아두었다. 아마도 그림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주인공이 아닌 조연들은 적절한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곡의 프롬나드는 전시의 박자를 만들어 준다.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는 길과 공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카페 사장도 무소르그스키도 그런 의도로 이 음악을 선택하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작품은 총 열 개로 작품마다 그림 옆에 짧은 소설처럼 이야기가 붙어 있다. 조명은 낮추어 놨지만 그림 속 주인공들과 이야기가 적힌 패드엔 핀 조명으로 강조해 두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보인다. 첫 그림은 아파트 거실 소파 사이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다. 붉어진 볼의 여자는 동양인이고, 창백한 얼굴에 어딘가 초췌하고 마른 남자는 서양인이다. 두 사람은 오렌지색 약통을 쥔 손을 마주 잡고 바닥을 기는 자세로 입만 맞추고 있다. 이 그림의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글을 읽으며 상황을 이해했다. 두 사람은 룸메이트로 만났고, 남자가 거실을 기며 신경안정제를 찾고 있을 때 여자가 나타나 자신이 찾은 약통을 건네다가 어두운 달빛에 홀린 듯 즉흥적으로 입을 맞추는 장면이다. 이것은 그들의 처음이고, 만남이고, 이 이야기의 문을 여는 발단이 된다.
두 번째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오로라가 펼쳐진 하늘 아래, 그랜드캐니언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고, 작은 승용차 보닛에 두 남녀가 포개어져 있다. 풍경을 넓게, 주인공들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지만 그들의 수줍은 표정이 상상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이 그림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두 사람은 오로라를 보기 위해 드라이 폴이라는 곳으로 밤새 운전해 갔고, 추운 바깥 온도를 견디기 위해 뜨거워진 보닛 위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뜨겁게 서로를 끌어안는다는 이야기였다. 내 뒤로 스쳐 지나가던 두 여자의 대화가 떠올랐다.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이 느낌이 얼마 만인지. 서늘했던 주변 공기가 갑자기 더워졌다.
다음 그림으로 옮기는 프롬나드는 더 빨라졌다. 이야기의 힘이 주는 속도다. 인간의 궁금증은 절제가 어려운 법이다. 세 번째 그림엔 오늘 바깥처럼 굵은 비가 내리고 있다. 시선은 드론 카메라가 잡은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이동한다. 여자는 아파트의 창을 열고 바깥 아래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남자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얼굴에 가 닿는다. 남자의 해맑은 웃음을 보니 보이지 않는 여자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장면이다. 우연처럼 피어난 그들의 사랑이 차가움 속에서 열정으로 서로를 끌어당기고 빗속에 있는 것처럼 힘든 상황 속에서도 행복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그런 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여자는 마감일에 아파트에서 글을 쓰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모르다가 아직 남자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그래서 서둘러 남자에게 전화했고, 그가 일부러 방해하지 않기 위해 비를 맞으면서도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여자는 얼른 거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남자에게 왜 비를 맞고 있냐고 다그치자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녀를 향해 올려다보며 한마디를 공중에 던진다. 오늘 밤엔 별이 아주 예쁘게 떴다고. 여자는 이 비 오는 날 별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올려다보며 그저 웃기만 한다.
난 네 번째 그림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림과 그림 사이엔 생각보다 거리가 있다. 넓게 트인 전시장에 내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네 번째 그림 앞에 섰을 때, 내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아파트 복도에 맨발인 채 윗옷을 입지도 못하고 여자의 손목을 간절히 잡은 남자와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 숙이고 있는 여자. 아파트 문은 닫히지도 못한 채 반쯤 열려 있다. 남자의 얼굴과 몸엔 온통 땀이 흐르고 벌겋게 상기되어 있어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어떤 일이 그들에게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재킷 소매를 움켜잡았다. 옆에 쓰인 글을 읽기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이 전시장에 들어오게 된 이상 작가가 펼쳐 놓은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여자는 그날따라 일찍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신기하게도 신호등은 제때 바뀌어 줬고, 평소 가지 않았던 지름길로 와서 집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한여름 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없는 오래된 미국 아파트를 생각하며 남자가 돌아오기 전에 얼른 창문이라도 열어 온도를 낮춰놔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그 열기는 남자의 방 안에서 더 뜨겁게 나오고 있었다. 누가 들어온 것 같다는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말에 복도로 뛰어나가는 여자를 급히 잡는 남자는 온갖 변명을 늘어놓는다. 전 여자친구지만 이젠 아무 사이가 아니고, 그냥 오늘은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실수했던 거라고.
그다음 그림으로 옮겨지는 내 발걸음은 더 무거워졌다. 난 그림 속 여자가 된 것도 같고 남자가 된 것도 같았다. 내가 그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여자였다면 독한 열기에 땀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남자와의 이별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자였다면 아마도 자신이 쏟아놓고 있는 이 말들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알면서도 어떻게든 여자를 잡기 위해 떨리는 손에 더 힘을 주었을 것이다. 난 이미 그들의 공간에 함께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나머지 여섯 개의 그림으로 옮겨갈 때마다 난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들의 사랑의 장면들이 내 눈앞에 펼쳐져 날 비참하게 했다가 화나게 했다가 웃게 했다가 울게 했다. 난 이런 일련의 감정들을 기억한다. 내가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던 대학생 때, 난 이 모든 것을 경험했고,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늘 내 능력은 몇 줄 적지 못하고 멈춰 섰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내 발은 방향을 잃고 주저앉았다. 어쩌면 홍 작가를 만났을 때 난 그런 내게 화가 났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에게 칼을 겨눴고, 적당한 타협점을 그가 제시했을 때 덥석 물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방명록과 마른 꽃 화병이 있는 계단 앞으로 와 섰다. 그리고 방명록에 적힌 다른 이들의 감상평을 읽었다.

 

-전시장에 나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난 내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처럼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들의 마음에 공감했어요. 사랑은 일순간에 느끼는 뜨거운 감정도, 누구를 위해 나를 불태우는 희생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어 고마워요.
-그림 열 장과 그것들에 딸린 이야기가 이렇게 힘이 강할 줄이야. 난 이제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작가님은 도대체 얼마나 아픈 사랑을 한 걸까 상상이 되지 않네요. 전 앞으로 한 달은 실연당한 사람처럼 가슴앓이할 예정이랍니다.

 

난 펜을 들어 맨 밑에 내 감상평을 적었다.

 

-잃어버린 건 그들의 사랑만이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네요. 잊고 있었습니다. 작가님이 궁금해졌어요.

 

이제 빗방울은 통창에 노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 식은 라테는 컵 안에서 아무런 향도 내지 않았다. 랩톱을 닫고 카페를 나가는 내내 등 뒤에서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이 내 모든 열기를 식혀주었다. 머리가 이렇게 맑은 건 처음이다.

 

전시회 마지막 날, 여느 때보다 카페엔 사람이 많았다. 아마도 모두 나와 같은 마음으로 모인 게 아닐는지.
“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다른 건 필요없어요.”
직원은 날 알아본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 내가 늘 앉던 자리가 아닌 카페의 한가운데 자리로 가 앉았다. 낮은 갈색 일인용 의자였다. 잠시 후 직원 두 명이 나와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커다란 캔버스를 매달았다. 족히 내 키만한 높이에 너비도 두 팔을 벌린 정도는 됐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책상이 하나 들어왔다. 그 위에는 온갖 미술 도구가 줄 서 있었다. 사람들은 작게 수군거렸다. 곧 나타날 작가에 대한 추측과 기대의 말들이 오갔다.
“이든, 에스프레소 준비되었어요.”
직원의 목소리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커피 향이 나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습관처럼 잔 속에 코를 박았다. 진하지만 분명한 향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그것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음악 소리가 커졌다. 배경음악은 예상대로 <전람회의 그림>이었지만 오늘은 피아노곡이 아닌 관현악곡이어서 훨씬 웅장했다. 그때 조금 전, 내게 주문받던 직원이 캔버스 앞에 와 섰다. 그리고 붓 중 가장 두꺼운 것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그릴 때 저는 먼저 한 가지 색을 선택해 베이스를 잡습니다. 배경색을 칠하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음악 속에 섞였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이어셋 마이크가 귀 옆으로 보였다. 난 너무 놀라 의자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붙박여 버렸다. 먼저 그 직원이 이 전시의 작가라는 사실에, 그다음으론 퍼포먼스를 하는 그녀의 눈빛이 붉게 반짝이는 걸 가까이서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표현하고 싶은 생각과 느낌을 색으로 치환해서 그립니다.” 
그녀는 조금 작은 붓을 여러 개 바꿔 가며 몇 가지의 색을 더했다. 그림의 형체는 분명치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숨을 참고 캔버스에 집중했다.
“때론 의도치 않게 섞인 색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때도 있죠. 바로 이런 것처럼요. 그리고 굳이 붓으로 그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엔 그녀가 붓을 내던지고 맨손에 물감을 발라 캔버스에 문대기 시작했다. 그림은 점점 더 추상화에 가까워졌다.
“물감이 아닌 것들을 사용해도 되지요.”
말을 마치고 점토를 든 그녀는 캔버스의 한쪽 부분에 발라 다른 질감을 만들었다.
“느낌과 감정 중엔 가끔 반짝이거나 폭발하는 것들도 있어요.” 
그녀가 이번에 집어든 건 글리터였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든 가루들이 젖은 물감과 점토 위로 뿌려져 그림 전체가 반짝거렸다.
“뭔가 부족하다 싶은 부분은 그냥 둬도 되고요. 여기 이 빈 부분처럼요. 색도 재료도 표현 방법 역시 마음대로 선택하고 만들고 그리고 덧붙이고 뿌리고 하면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우린 그걸 예술이라고 부르죠. 신이 주신 인간 고유의 재능으로 창조된 것.”
캔버스 한쪽으로 뒤돌아선 그녀는 뭔가 아주 작은 작업을 하는 듯했지만, 우리가 볼 순 없었다. 그리고 일 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아까 다 흩뿌리고 남은 빈 글리터 통을 천장으로 던졌다. 모두의 눈이 그리로 향했다. 그녀의 동작과 말 한마디에 우리는 연극을 보는 관람객처럼 모든 감각을 되살려 부지런히 뒤쫓았다. 빈 글리터 통은 정확히 천장에 달려 있던 작은 조명을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도 그 박자에 맞춰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가 캔버스 옆으로 비켜서자 그림 한구석에 전체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 자신의 얼굴이 조명 속에 나타났다.
“여러분의 이야기도 그렇지 않나요? 다른 누구의 삶을 사는 게 아닌 나만의 독창적인 감정, 생각, 느낌 이 모든 것을 바르고 뿌리고 붙이고 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작품이 이렇게 탄생하는 거잖아요. 그 이야기를 보여주세요. 저희 카페 ‘그림자’는 언제나 여러분의 상상력을 뒤에서 조용히 지지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공유합니다. 제가 이 카페를 만든 이유기도 하고요. 부족한 전시를 즐겨주시고 제 이야기에 공감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에스프레소가 든 잔이 내 손 안에서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화끈거렸다. 사람들도 허리 숙여 인사하는 그녀 앞에서 잠시 배터리가 다 된 휴대전화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누군가 박수를 작게 치기 시작하자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함께 손뼉을 쳤다. 그녀의 손과 얼굴, 옷은 캔버스의 그림처럼 알록달록하게 반짝였다.

 

또 그 카페에 있어?
작업 다 끝냈는데 오늘 포스트할까?
구독자들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번에 작업 잘 되어서 인기 좋을 듯.

 

강 피디의 문자 메시지들이 화면에 떴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난 이제부터 그에게 할 변명을 생각해야 한다. 네 번째 그림 속 남자처럼 말도 안 되는 변명이 될 것이고, 미안한 감정을 넘어 죽을 때까지 사죄해야 할 후회스러운 말이 되겠지만 이 결심의 색이 바래지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 천재도 아닌 한 사람의 아우성이 반짝이는 퍼포먼스가 될 때까지 달리려면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없다.
나는 이제 다음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프롬나드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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