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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도(美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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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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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비추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렸다. 동네 개들이 그악스럽게 짖어댔다. 달리는 속도에 맞춰 심장 박동도 점점 가빠졌다. 경택은 더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멈춰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사위는 여전히 달빛에 젖어 있었다. 그는 달빛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개울을 건너고 들을 지났다.
다시 잠시 숨을 고른 경택이 걸음을 재촉하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순라꾼들이 나무토막을 부딪쳐 내는 야탁(夜柝) 소리가 고요한 달빛을 찢고 들려왔다. 그는 야탁 소리를 피해 근처에 쌓아둔 노적가리 속으로 황급히 몸을 감추었다. 이윽고 야탁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통행이 가능한 파루(罷漏)1)에 이르려면 아직 이경(二更)은 남았을 것이다. 절로 눈이 감겼다.
“가진 것을 들고 나와 모두 이곳에 내놓아라.”
“…….”
“어서.”
경택이 머뭇거리자 인로가 노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마지못한 경택이 한 다발의 종이와 먹과 벼루 등을 가지고 나와 마당 한가운데에 풀어 놓았다.
“종이를 펼치거라.”
노기 띤 탁음을 뱉을 때마다 몇 가닥 되지 않는 인로의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이 무엇이더냐?”
“수련(睡蓮)이오.”
“내 익히 너의 천품(天稟)을 알고 있었다. 사대부가 난죽(蘭竹)을 치는 일이 딱히 괴이하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만 그 일을 드러내 업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대부에게는 사대부로서의 근본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공맹의 가르침을 좇아 위로 임금을 섬겨 나라를 정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인 줄 압니다.”
“그것을 아는 놈이 그따위 붓질로 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말이냐? 경택아, 내 제 몸 하나 둘 곳이 없는 너를 거둔 지 여러 해가 지났다. 내 나이 열여섯이니 진사시에 나아갈 때가 아니더냐. 네 집안이 사대에 걸쳐 당상을 배출한 경화세족(京華世族)이라는 점을 잊지 말거라. 이제 그 종이 뭉치를 한곳에 모아라.”
“…….”
“무얼 꾸물거리느냐?”
경택이 머뭇거리며 흩어져 있는 종이 뭉치를 한쪽에 모아두자, 인로가 반빗아치2)에게 일러 불을 가져오게 했다.
“이제 불을 놓아라.”
“…….”
“어서 불을 놓으래두.”
달빛이 비춘 곳에서 화염이 타오르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주변이 완전히 컴컴해졌다.

 

인로는 경택의 매부였다. 여섯 해 전의 일이다. 경종이 즉위하고 이듬해(1721년)에 연잉군(훗날의 영조)의 왕세제 책봉 문제를 두고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발생했다. 터질 일이 터진 것이다. 희빈장씨를 사사한 숙종은 말년에 들어 왕세자마저 교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문제는 당시 조정이 경종을 지지하지 않던 노론의 세상이었다는 점이었다.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은 어렵게 집권하긴 했으나 후사가 없어 즉위하자마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라는 노론의 압력을 받게 된다. 당시 경종의 보령 겨우 서른셋이었다.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 청년 국왕에게 배다른 동생을 왕위계승자로 정하라는 건 억지에 불과했지만, 경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세제 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나아가 대리청정까지 요구하였다. 이에 소론은 다시 경종의 친정체제를 회복시키고자, 노론과 어울리던 서얼 출신의 지관 목호룡(睦虎龍)이란 자로 하여 노론의 경종 시해 모의가 있었다는 거짓 고변을 하게 하였다. 결국 노론 정권은 무너지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된다.
노론이 대거 축출될 때 노론의 중신이던 경택의 부친인 이원조와 숙부인 이성조도 경상도와 전라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원조는 장독이 올라 유배길에 사망하였으며, 이성조는 유배지인 전라도 나주 땅에서 사사되었다. 이듬해엔 경택의 모친마저 한많은 세상을 떴다. 사고무친의 경택을 거둔 건 몇 해 전 출가한 누이였다. 가히 멸문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경택에게 출사길이 열린 건 삼 년 후 경종이 급서하고 세제이던 연잉군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바뀌니 세상도 변했다. 드물게 두 해에 걸쳐 일어난 사화(신축사화·임인옥사)로 노론은 무려 백 명이 훨씬 넘는 당여를 잃었다. 불행 중 다행히 화를 면했다고 하더라도 노론 계열에서 벼슬을 물러나거나 출사를 단념한 인물들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노론은 경종의 급서로 세제인 연잉군이 보위를 잇자 극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쥐었다.
사대에 걸쳐 당상을 배출한 집안의 한 점 혈흔이라 어린 경택에 대한 매형 인로의 기대는 컸다. 노론 출신의 경화세족이니 마음만 먹으면 관직에 나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진사시만 급제해도 지방 외직은 거저 굴러올 터였다. 사대에 걸쳐 당상을 배출한 경택의 집안 내력은 시문을 외우고 독서에 그만이었다. 그의 주변엔 늘 서책이 가까이 있었다. 하지만 경택의 사람됨은 서책을 멀리하고 저잣거리에 서 천것들과 섞이며 흉내 내길 즐겨 했다. 어려서부터 경택은 그림을 그리는 데 남다른 재질이 있어서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고 그대로 모사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의 붓끝에서는 시문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화가 피어나고 대나무가 뻗어 나갔으며 나비와 벌이 날아갔다.

 

이튿날 아침, 경택이 사라진 것을 알고서 인로는 가노(家奴)를 풀어 사방 삼십여 리를 샅샅이 뒤지게 했다. 하지만 이미 달빛 속으로 사라진 경택을 쫓을 수는 없었다.

 

1)조선시대에 통행 금지를 끝내기 위해 종과 징을 치던 일.
2)밥이나 반찬 등을 만드는 일을 하던 여종.

 

2
마을 어귀에서 창을 든 대여섯 명의 나졸들이 마을 안쪽으로 달려갔다. 자치기하던 경택과 아이들이 시야에서 나졸들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이 달려간 방향을 바라봤다.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다시 자치기에 열중했다. 녀석들의 떠꺼머리가 연신 좌우로 흔들렸다. 경택이 앞으로 손을 뻗혀 날아오는 자를 잡을 때였다.
“경택아, 저기….”
두 손으로 자를 쥔 경택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가 오랏줄에 묶인 채 나졸들에게 붙잡혀 오고 있지 않은가. 뒤이어 버선발의 어머니며 식솔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버지이, 무슨 일이오?”
울음소리와 같은 경택의 외침에 잠시 걸음을 멈춘 이원조의 등을 나졸 하나가 창 손잡이로 쿡 쑤셨다. 등을 떠밀린 이원조는 마치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끌려갔다.
경택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건 옥에서였다. 유배를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목에 칼을 쓴 아버지의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 평소 경택이 하라는 글공부는 소홀히 하고 노상 마을 천것들과 어울리는 것을 경계하던 아버지. 내가 없는 동안에 어머니 잘 모시고 글공부 게을리하지 말라는 당부라도 하면, ‘소자 반드시 그러하겠나이다’라고 아뢰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아버진 입가에 뜻을 알 수 없는 옅은 웃음을 띨 뿐이었다. 경택은 아버지의 그 웃음이 무섭게 느껴졌다.
“누가 임금을 하면 대체 그것이 무슨 상관이더란 말이오. 이놈도 이 씨, 저놈도 이 씨인 것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뵌 날 어머닌 옥문을 붙잡고 주저앉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이 평생을 두고 추구한 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그것이 무엇인데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오? 한번 들어나 봅시다.”
어머니의 거듭된 원망에도 아버진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나갑시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임금님께 잘못을 고하고 어서 여길 나갑시다.”
“인생이 다 헛되었구나.”
경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아버지의 목에서 나온 것인지 환청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통곡할 따름이었다.
“아버지이, 뭐라 하셨소?”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서도 옥에서 뵌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며 한동안 경택은 글공부에 매진했다. 아버지가 힘써 글공부한 것을 두고 헛되었다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철든 후였다.

 

아버지의 무서운 얼굴에 어머니의 한맺힌 표정이 겹쳐 나타났다가 낮에 꾸지람을 내린 매형의 노한 모습이 겹쳐졌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매형이 한 몸이 되었다가는 분리되어 경택에게 각자 뭐라 말을 하였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당에 그려 놓은 개와 닭을 매형이 발로 북북 문질러 지우며 물었다.
“네놈이 장차 뭐가 되려 하느냐?”
“난 벼슬살이가 싫소.”
경택이 울먹였다.
“학문이 어찌 벼슬하는 데만 쓰이더냐.”
사대에 걸쳐 당상을 배출한 문벌답게 집안 곳곳에는 명나라며 청나라에서 들여온 도자기나 서화가 넘쳤다. 경택은 아버지의 무릎에 얹혀 남종화니 북종화니 하는 설명을 들으며 화첩을 넘기고 있었다. 그 순간 화첩 속에서 산세가 솟구치며 온 방을 가득 메우더니 쟁기를 맨 소 한 마리가 지나가고 산이 논밭으로 변했다.
곡식을 타작하던 가노들이 매형의 말을 듣고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3
짚을 요와 이불 삼아 얼마나 눈을 붙였을까. 5월 초순인데도 새벽 기운은 한기를 느낄 만큼 서늘했다. 개울가에 쪼그려 앉은 경택이 두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얼굴로 가져갔다. 손으로 물을 뜰 때마다 자신의 얼굴도 일그러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내 마음이 이 물처럼 흔들리는구나, 경택은 자꾸만 변하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흔들리는 물이 곧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을 했다.
경택의 봇짐에는 부친 이원조가 연행사로 청나라에 갔을 때 가져온 벼루가 들어 있었다. 가보로 전할 명품이었지만 그걸로 노자푼을 마련해야 했다.
“만력(萬曆)3) 연간에 만들어진 아주 진귀한 것이온데, 이 물건을 도령께서 내놓으려고요?”
애써 환한 표정을 감춘 화방 주인이 안경을 올리며 경택의 차림새를 슬쩍 훑어보더니 의사를 확인했다.
“뭐, 정히 내놓겠다면야 내 값은 후히 쳐드리지. 대신 나중에 딴소리하긴 없기요.”
경택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인은 흥정부터 했다.
화방에 벼루를 팔고 두둑한 노자푼을 마련한 경택은 산수(山水)로 말하면 조선 제일이라는 유한림을 찾아 길을 떠났다.

 

유한림은 남인 출신의 몰락한 사대부다. 사대부가 벼슬길이 끊겼으니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산천을 주유하길 즐겼는데 스무 살 무렵엔 다행히 소과에 급제하기도 했으나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그만 대과에 응시할 기회를 놓쳤다. 이후 한림은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벼슬길을 멀리하며 평생을 산수(山水)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런 그에게 딱 한 번 벼슬길에 오를 기회가 있긴 했다. 숙종 대에 조정에서 인조의 어진을 모사하고자 할 때 그를 감조관(監造官)4)으로 삼아 어명으로 입궐케 한 것이다. 하지만 거듭된 어명에도 불구하고 끝내 임금의 부름을 마다했다. 이 일로 한림은 곤장을 맞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붓을 꺾을지언정 유학자로서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화흥(畵興)이 일어나면 붓을 들어 산천이며 풍속을 그리며 감정을 쏟아 내더라도 근본은 어디까지나 유학자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국초부터 받들던 명나라가 오랑캐라 멸시하던 여진족에 의해 멸망한 충격에서 벗어나 조정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자주의식이 발화될 무렵이었다. 이 같은 조류는 정치와 사상은 물론 문화와 민간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에 널리 퍼졌다. 회화의 경우, 이전까지 상상 속에서나 꿈꾸던 중국의 산수를 흉내 내던 수준에서 우리의 산천을 눈으로 보고 그리다가 풍속을 그리기에 이르렀다. 사대부 사이에서는 그림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취미가 유행하고 일부는 직접 난죽(蘭竹)을 치기도 했지만, 그 일을 떳떳하게 여기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문인화가들은 눈을 감을 때 자신이 남긴 작품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경택은 유한림이 양양 오색령 너머 기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양에서 양양까지 오백 리 길을 걸어 그의 거처를 찾아 나섰다. 경택이 눈으로 마주한 조선의 산하와 풍속은 화첩에서 보던 선경(仙境)의 세상과는 사뭇 달랐다. 헐벗은 산천은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땅이었으며, 백성들의 삶은 여유롭지 않고 피폐하고 곤궁했다. 조정은 임금을 세우는 문제로 두 패로 갈라져 죽고 죽이기를 조석으로 거듭했으나 백성들은 강상(綱常)의 법도니 윤리니 하는 것을 저녁 찬거리만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걷다가 지치면 경택은 나뭇가지를 꺾어 붓으로 삼고 땅과 하늘로 종이를 대신하여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거나 보았던 것들을 생각했다. 흙바닥에서는 산이 솟고 내가 넘쳤으며 새가 날아올랐다. 주막거리에서 탁주를 마시는 사내들은 고단해 보였으며, 아무렇게나 도포를 벗고 갓을 풀어놓은 선비들이 바위에 앉아 세족을 하는 개울 한쪽에서 솥을 걸어두고 천엽을 즐기는 천둥벌거숭이들의 얼굴에서는 시름이 없었다. 춤을 추고 줄을 타는 남사당의 몸짓에서는 흥이 넘쳤으며, 구경꾼이 내미는 돈을 걷는 여사당의 모습에서는 교태가 흘렀다.

 

3)명나라 13대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572∼1620)의 연호다.
4)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하던 사업을 감독하는 관리.

 

4
인제현을 지나 오색령 서쪽의 주막에서 묵어 갈 때였다. 도둑이 자주 출몰하는 고갯길이 지척이라 대여섯 명이 모여야 지나갈 수 있다는 곳이었다. 모녀가 있는 주막에는 이틀이 지나도록 다른 길손이 들지 않았다.
“여긴 낮에도 혼자서는 못 지나가우, 산적들이 자주 출몰해서.” 
주모가 봇짐을 붙들며 떠나려는 경택을 잡았다.
“삼수갑산 드렁칡은 얼그러 설그러졌는데 너하고 나하고 한 이불 속에서 노올자∼. 어랑어랑 어허야, 사랑 사랑이로구나∼.”5)
“그 소리 한번 고약하구나.”
경택은 주모의 딸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귓등으로 흘리고선 풍광이 좋은 이곳에서 며칠 더 묵을 요량을 하고 지필묵을 챙겨 나섰다.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경택은 몇 번의 능숙한 붓질로 산악과 물길을 그려 나갔다. 마르고 비틀어진 소나무 한 그루를 한 귀퉁이에 채워 넣으니 더는 붓질이 필요 없어 보였다.
‘이곳이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이라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어차피 꿈에 본 중국의 산수나 흉내 내는 것이 조선이 화풍 아닌가.’
다른 승경(勝景)을 찾아내 그려 본들 그저 산산수수(山山水水)일 뿐이다. 
‘이래서야 중국화를 모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경택은 발걸음을 주막집으로 돌렸다. 소주가 생각났다.

 

“그 재주면 어디 가서 굶지는 않겠소.”
저녁나절이 되어 돌아와 그림을 펼치고 있던 경택이 고개를 돌려 보니 주막집 딸이 밥상을 들고 문지방을 넘고 있었다.
“그 산은 어디에 있는 산이요?”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렸을 뿐이다.”
“내 여서 나고 자랐어도 처음 보는데….”
주막집 딸이 옷고름을 살짝 물었다.
“사람이 붓놀림으로 어찌 산을 잡을 수가 있을까?”
마침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주모가 끼어들었다.
“눈앞에서 보고도 그릴 수가 없다면 그 산이 있는 것이오? 없는 것이오?”
“무슨 말인가?”
“저 앞을 보쇼. 예서 보면 삼연봉이지만 저 멀리 아랫마을에서 보면 실은 오연봉이지요. 그래서 아랫마을에서는 오형제봉이라 하지요. 그런데 한 굽이 돌아서 보면 그냥 하나의 산 덩어리일 뿐이라오.”
주모가 건너편에 솟은 산봉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데 내가 이 아이만 할 때니 오래전의 일이오. 그때도 이곳을 다녀간 화인이 있었소. 차림새나 말품새가 시방 도령처럼 여느 길손하고는 달랐지요. 그 어른도 여기서 며칠 계셨는데 아침 먹고 지필묵을 챙겨 나가서는 저녁나절이나 돼서야 들어왔소. 우리 산을 찾아다니며 실경을 그린다나 그랬습지요. 그렇게 산수만 그리는 줄 알았더니 떠나기 전에는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이리 와 보게, 하더니 내 모습을 쓱 그려줍디다.”
“그 그림을 좀 볼 수 있겠는가?”
주모가 턱 끝으로 딸을 가리켰다.
“그림 속의 여인이 진정 자네가 맞는가?”
경택이 주막집 딸이 가져온 그림과 주모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렇다니까요.”
“아무리 오래전이라 해도 어째 닮은 구석이라고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것들의 사는 모습과 표정이겠지요.”
“상것들의 표정이라….”
“이따 심심하믄 불러보시든지…. 야가 생긴 것은 그래도 목구녕에서 나오는 소리 하나는 기막히다니까.”
주모가 머리채에 꽂아두었던 바늘을 뽑아 바늘귀로 머리를 긁으면서 일어났다.

 

“계시오?”
주막집 딸이 모주 한 주전자와 산나물 접시가 놓인 소반을 경택이 머무는 방문 앞에 내려놓으며 불렀다.
“무슨 일이냐?”
“밤도 깊은데 심심하지 않소? 모주를 담가 논 게 조금 남은 것이 있어서 내왔사온데….”
“들어오거라.”
“근데 한양서 온 도령님은 맨날 산수만 그리시오?”
“네가 그림을 볼 줄 알더냐?”
“그게 아니라 소녀를 한번 그려 주실라우?”
“너를 말이더냐? 내 떠나기 전에 그리 하지.”
“정말 그래 주실라우? 그런데 좀 양갓집 규수처럼 그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 일이 뭐 그리 어렵겠느냐. 네 소원이 그러하다면 내 그림에서나마 널 양갓집 규수로 만들어주지.”
“정말이지요? 자, 한 사발 받으시오. 삼수갑산 드렁칡은 얼그러 설그러졌는데 너하고 나하고 한 이불 속에서 노올자∼. 어랑어랑 어허야, 사랑 사랑이로구나∼.”
모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산나물을 우적우적 씹던 주막집 딸이 허연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치맛자락을 슬쩍 걷어 올리며 타령을 불러 젖혔다.

 

5)함경도 지방 민요인 신고산 타령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하는 이방원의 시조를 일부 변형하고 차용했다.

 

5
굽이굽이 오색령 산길을 돌아 오르고 내릴 때마다 삼산은 오악이 되기도 하고 단 하나의 봉우리로 합쳐지기도 했다. 경택은 유한림이 거처한다는 약수터 근처의 촌락에서 소를 끌고 지나가는 촌부를 붙잡고 물었다.
“이곳이 유한림 선생이 계시는 곳이오?”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보아하니 멀리서 오신 길손 같소만.”
“한양에서 오는 길인데 왜 그러시오?”
“조선팔도 어느 곳이라도 그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오. 어제는 금강산에 오늘은 지리산에 거하니 그가 있는 곳을 알 수가 없다오.”
그 길로 경택은 금강산으로 지리산으로 옮겨 가며 유한림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조선팔도를 누빈 지 여섯 달째, 경택은 드디어 경상도 함양 땅 오도령 아래에서 유한림의 처소를 찾아냈다. 몇 해 전에 상처한 유한림은 슬하에 딸자식인 어린 자경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래, 무슨 볼일이 있어 이 험한 곳까지 날 찾아 왔는고?”
기이하다고 해야 할지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조선팔도를 돌아 자신을 찾아 왔다며 절을 하는 떠꺼머리에게 한림이 자리를 권했다.
“산수는 나리께오서 조선 제일이라 들었습니다. 내치지 않으신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나무를 하라면 산에 있는 나무를 모두 벨 것이며 밭을 갈라면 백 마지기의 밭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갈 곳도 없는 몸이오니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대관절 그림은 그려서 무얼 하려 하느냐? 어진(御眞)이라도 그려보고 싶은 게냐? 그러면 내가 당장이라도 도화서에 추천서를 써줄 수가 있을 것이다.”
“어진을 모사하고 중국의 산수를 베끼러 예까지 나리를 찾아 왔겠습니까? 소인은 그저 산수며 풍속을 소인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보고 싶을 뿐이옵니다.”
“혹시 네가 날 화사(畵師)로 생각한다면 어서 여길 떠나거라. 내 임금의 명도 거역한 것은 환쟁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림이 옆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소인, 따로 화공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사옵고….”
경택의 말을 듣고는 한림이 다시 몸을 돌렸다.
“지금 화공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였느냐? 그럼 됐다. 네가 산을 그리려거든 그 산에 오르길 짚신 천 켤레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며, 붓으로 산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될 것이야. 내가 전해줄 것은 이 말밖에는 없다. 그래도 할 수가 있겠느냐?”

 

사계가 일곱 번이나 바뀌는 동안 경택은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천 켤레의 짚신을 삼았으며 뭉툭해진 붓이 어느덧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택은 매번 같은 산수를 그리는데도 번번이 다른 그림이 나오는 까닭을 스승인 유한림에게 물었다.
“스승님, 여쭤볼 게 있사옵니다.”
“이리 와 앉아라.”
“제가 이곳이 들어온 지도 벌써 일곱 해째이옵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오도령이며, 노고단이며, 만복대에 오를 수 있으니 천 켤레의 짚신이 아깝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하온데 어찌하여 매번 같은 산수를 그려도 번번이 다른 그림이 나오는지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짚신을 더 삼아야 할까요?”
“원, 살다 보니 별 싱거운 소리를 다 듣는구나. 네가 산에 오를 때마다 한 지게씩 나무를 짊어지고 왔겠다. 아마도 그동안 해온 나무가 한 산에 가득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그 나무들의 생김새를 다 알 수 있겠느냐?”
“무슨 말씀이시온지….”
“나무들의 생김새는 모두 제각각이어도 본질은 다르지 아니하다. 중요한 것은 외양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나에게 같은 산을 그리는데도 다른 그림이 나오는 연유를 물었겠다.”
“그러하옵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산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산을 쫓을 게 아니라 네 마음속의 산을 그려보아라.”
산이 어찌 눈 밖에만 있다고 하겠는가.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경택은 그 길로 달음질치듯 산을 내려갔다.
‘내 여태껏 헛된 것을 좇아 고단한 삶을 살았구나. 이제부턴 내 그림을 그려야겠다.’

 

6
스승의 가르침이 큰 자신감을 주었을까? 이제 경택은 눈을 감고도 삼산오악을 솟구치게 올리고 일월을 띄웠다. 소나무를 그리고 새가 날아들게 했다. 세상에서는 그런 그를 솔거의 현신이라고 했다. 식객으로 그를 마다하는 반가(班家)가 없고 색주가에서는 기녀의 치마폭에 매화 한 그루를 치면 술상이 나오니 먹고 마실 걱정은 없었다.

 

경택이 유한림의 문하에서 스스로 나온 지 삼 년째 되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경택이 거처하던 마을에 한 화공이 왔는데 한 냥에 인물을 그리는 솜씨가 신묘하기가 그지없어 마치 빼다 박은 듯하다고 했다. 그날도 색주가에서 기녀를 희롱하던 경택은 소식을 듣고는 솜씨를 볼 겸 그 화공을 불러 자신을 그려보게 했다.
“내 의관을 정제할 동안 잠시 기다리라.”
비스듬히 기녀에게 기대어 희롱하고 있던 경택이 화공더러 대청마루에서 기다리라 일렀다.
“그러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필요가 없다? 어찌 그러하냐?”
“소인은 지금 그대로의 나리를 그리겠나이다.”
“이 계집과 더불어 말이더냐?”
경택이 몸을 일으키자 기녀가 얼른 손으로 젖가슴을 가렸다.
“그러하나이다.”
“이리 들라. 네 하찮은 재주로 저잣거리에 앉아 장삼이사를 속였을지 몰라도 내 눈은 속이지 못할 것이다. 대신 네가 그린 그림이 나와 똑같다면 그림값은 후히 쳐줄 테니 그리 알아라.”
화공이 가까이 다가와 자신과 기녀를 화폭에 담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경택이 아는 것과는 달랐다. 화공은 빠른 붓놀림으로 대강의 모습을 담은 후에는 경택과 기녀를 향해 가끔씩 곁눈질을 할 뿐 마치 보지 않고 그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리기를 마친 화공이 화폭을 들고 경택에게로 다가왔다.
“어디 보자.”
경택이 화공이 그린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런데 완성된 그림 속의 사내는 조금도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지 않았다. 게슴츠레한 표정의 낯선 사내가 저고리가 올라가 가슴이 반쯤 드러난 기녀에게 안기어 있었다.
“옛말에 이르길, 터럭 하나도 똑같지 않다면 그 사람이 아니라 했거늘 네 어찌 하찮은 붓놀림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느냐?”
화공의 그림을 본 경택이 비웃으며 말했다.
“산수의 풍경이라면 소인이 어찌 겸재(謙齋)6)를 따르겠나이까? 또 인물을 모사하는 것에 있어서는 소인이 어찌 관아재(觀我齋)7)를 넘겠습니까? 소인은 그저 나리의 마음을 그려 드렸나이다.”
“내 마음이라? 네가 네 마음으로 내 마음을 보았다는 말이더냐?” 
경택이 화공의 말을 듣고 다시금 그림을 보니 과연 기녀의 품에 안겨 있는 사내에게서 자신의 고약한 마음을 보는 듯하였다.

 

6)정선(鄭敾, 1676∼1759)
7)조영석(趙榮솜, 1686∼1761)

 

7
그 길로 경택은 다시 유한림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경택이 유한림의 처소를 찾았을 때 한림은 없었다. 자경만이 돌아온 경택을 반겨주었다.
“아버님께선 이태 전에 화구를 챙겨 묘향산으로 간다 하신 후 아직 소식이 없사옵니다. 다만 떠나시기 전에 혹여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전해주라 하신 것이 있사온데….”
자경은 다락에서 유한림이 남긴 물건을 꺼내주었다.
스승의 손때가 묻었을 붓이며 먹을 보고는 경택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음을 알고 깊이 후회했다. 한림의 물건 가운데는 그가 남긴 서화 두루마리도 있었다. 한림의 서화 두루마리를 펼친 순간 경택은 비로소 마음속의 산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내 작은 재주만 믿고 지금까지 헛된 것을 보았구나. 이제야 스승께서 말씀하신 마음속의 산이 무엇인지 그 뜻을 알겠구나.”
그림 속의 산줄기는 마치 내재된 기상을 그린 듯 힘차게 뻗었고 봉우리는 솟구쳐 있었다. 산수가 아니라 마치 인물화를 대하는 듯했다. 산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천 켤레의 짚신을 삼아 가며 십 년을 그렸어도 경택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지리산의 승경(勝景)이었다.

 

이후 경택은 유한림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토방을 차리고 마음속의 산을 찾기 위해 그곳에 은거했다. 자경만이 토방에 드나들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져다주며 바라지를 했다.
은거한 경택은 때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자는 듯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애타게 아버지를 찾기도 하고 불쑥 그에게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아버지, 그 말씀이 무엇이오? 인생이 헛되었다 하셨습니까? 그럼 명분에 잡혀 평생 헛된 것을 추구하신 것이오?’
여전히 아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참된 것은 무엇이오?’
‘모든 것이 네 마음가짐에 달려 있구나.’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편안한 모습이었다.
마음속에서 지리산을 수천 번도 더 올렸다가 허물었으며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그렸다 지우길 거듭했다. 그의 마음속에 세상의 새들이 날아들었으며 소나무숲이 생겨나고 온갖 화초들이 피어났다. 모든 것이 마음속에 있었으며 그의 마음이 곧 세상이었다. 어떤 날의 경택은 눈을 감고서 종일 같은 그림을 그리길 수십 번도 더했다.

 

8
그러던 경택이 토방에 기거한 지 삼 년째 되던 해였다. 이제 경택은 마음속에서 지리산을 찾았으며 까맣게 잊었던 아버지의 온후한 모습과 어머니의 인자한 얼굴을 살려냈다. 또 오색령 아래 주막집의 박색인 딸이 부르는 고약한 소리가 그림 속에서 들리게 했다.
그새 자경은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자경아, 내 이제껏 도원경을 찾아 헤매다 비로소 이 마음속에서 스승께서 말씀하신 산을 찾았다. 이제는 너의 모습을 남기고 싶구나.”
그날 이후 경택은 날마다 갖가지 모습의 자경을 그렸다. 곱고 삐치고 웃고 슬픈 표정의 자경이 경택의 붓끝에서 탄생했다.
“이것이 내 마음속에 비친 너의 모습이니 내 마음이 곧 거울이니라.”
마침내 십이 폭 자경의 초상을 완성한 날, 경택은 그녀를 안았다.
“내 마음속으로 너를 낳았으며 너를 품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제야 소녀를 품으시나이까?”
자경의 표정에서 가벼운 원망과 안도의 기색이 함께 스쳐갔다.
“내 지리산의 사계를 담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길 짚신 천 켤레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으나 지금껏 한 번도 지리산을 품은 적이 없었구나.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지리산이 실은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는 걸 스승님께서 남기신 그림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너를 안다고 함이 어찌 네 육신을 아는 것이겠느냐. 마음이 있은 연후에 세상이 있는 것이거늘.”

 

경택은 밤낮없이 자경을 안고 또 안았다. 경택의 품에 안긴 자경에게서는 어느 날은 꽃이 피고 또 어떤 날은 비가 내렸다. 천둥이 치듯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하였으며 이내 맑아지는가 하면 구름이 몰려오고 차갑게 식기도 했다. 경택은 자경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끊임없이 품었다.

 

이후 경택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언젠가 한양의 저잣거리에 한 비렁뱅이 화공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몰락한 반가의 자손이라고도 하고 혹은 오래전부터 인물이나 풍속 따위를 그리며 비루하게 살던 화공이라고도 했다. 어쩌다가 그리 되었는지 모르지만, 소경인데도 목소리만 듣고도 사람의 심정까지 그려내니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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