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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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은 종이상자를 좌판 위에 올려놓는다. 창고에서 가져온 상자는 조금 큰 것도 있지만 대개 크기가 비슷하다. 그 상자는 일반의약품이 든 것으로, 피로 해소나 체력 증진의 효과가 있다는 광고 문구가 적혀 있다.
훈은 가위를 집어든다. 손에 힘을 주어 중앙을 자른다. 처음에는 가위질하기 힘들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종이 잘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나고 가위가 앞으로 쭉쭉 나간다. 이대로라면 가볍게 자를 것 같다. 손에 힘을 주지만 가위질 속도에는 변함이 없다. 가위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뻑뻑해지더니, 이내 손에 아픔이 느껴진다.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가위질한다.
전보다 가위질이 좋아졌지만, 사장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사장의 가위질 솜씨는 탁월해 그것만은 훈이 부러워하고 있다. 사장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가위질을 했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고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딱딱한 종이를 기계처럼 싹둑싹둑 잘랐고, 마치 천을 자르듯 가위가 쑥쑥 나갔다.
훈은 자른 것 중에서 큰 것을 집는다. 그리고 그보다 작은 것을 그 안에 끼운다. 두부 한 모가 들어갈 용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두 겹으로 탄탄하다. 훈은 문득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좌판 앞에 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기장이 긴 앞치마가 둘러져 있고 발에는 장화가, 양팔에는 방수 토시가 끼워진 상태다. 훈은 자신의 모습이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훈은 가게 안쪽을 본다. 그곳은 기계와 도구들로 가득하다. 한쪽 벽에는 마쇄기와 순간 가열기, 성형 압착기가 있고 마쇄기 옆에는 자동 세척기가 돌아간다. 기계들은 훈이 어렸을 때 외갓집에서 보았던 정미소 기계를 연상시킨다. 단단한 쇠와 스테인리스강으로, 무언가 복잡한 기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져 있던 정미소. 마쇄기 위에 깔때기는 정미소 깔때기와 흡사하다. 기계 앞쪽에는 도구들이 널려 있다. 가마솥보다 큰 응고통이 있고 그 옆에는 두부 받침대가, 그리고 주걱과 바가지와 교반기를 넣어 두는 큰 통이 있다.
그때 2층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발자국 소리는 빠르게 이어지고 복도를 거니는 것처럼 점점 크게 들려온다. 얼마 후 계단에 신발이 보이고 곧게 뻗은 두 다리가 드러난다. 계단 밑으로 내려온 은서는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은서는 스무 살 여대생 같다. 아이라인을 그려 눈이 커 보이고, 입술은 발랄한 핑크빛으로 윤기가 난다.
“아빠 어디 가셨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은서가 가까이 다가온다.
“병원에….”
“약 타러 가신 모양이네. 엄마는?”
“은행에 잠깐 가셨어.”
“그래.”
은서는 좌판 앞에 멈춰선다. 진한 향수 냄새에 훈은 잠시 숨을 멈춘다.
“두부는 잘 팔려?”
“그저 그래. 학원에 가니?”
“응. 하지만 영수 학원은 아니야.”
“그럼?”
“실용음악학원이야.”
“사장님이 허락하신 거야?”
“아니.”
“사모님은 아셔?”
“응. 아빠한텐 비밀로 하는 걸로 하고. 그니까 오빠도 아직은 말하면 안돼.”
은서는 힘주어 말한다. 그리곤 이렇게 매일 혼자였음 좋겠지, 하고 웃으며 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훈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은서는 바람처럼 가게를 빠져나간다.
2
사장은 기계를 조작, 불린 콩을 마쇄기로 간다. 기계음이 요란해 훈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마쇄기는 위에 침수조가 있어 왠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마치 만화영화에서 본 깡통 로봇을 연상시킨다. 위에 얹혀 있는 것은 깔때기 모양으로 주둥이가 커 뭐라도 넉넉히 들어갈 것 같고, 마쇄기는 양동이에 쓰레받기가 붙은 모양으로 대형 수도대를 떠올리게 한다.
콩은 흘러 들어간다. 부드럽게 몸을 흔들며 아래로 내려간다. 마치 지하 어딘가를 향해 진군해 가듯이. 침수조에서 자동으로 마쇄기에 유입된 콩은 고속 맷돌 기계에 의해 콩죽이 된다. 그것은 방금 끓인 풀처럼 하얀하니 진득진득하고, 물기가 묻어 촉촉하고 반들반들하다. 사장은 마쇄기 통에 약을 투척한다. 거품을 제거하는 소포제로, 거품이 많으면 두부가 되지 않아 매번 넣는다.
사장은 훈에게 턱짓을 한다. 훈은 허리를 숙여 교반기를 집는다. 그것은 계란을 섞는 스텐 거품기처럼 생겼는데, 통 안에 대고 수평이 되게 해 노처럼 젓는다.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장이 낚아챈다. 그리곤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교반기를 젓는다. 그것은 빠르고 힘차 마치 로봇이 젓는 것 같다. 머리가 훌렁 벗겨진 중년인데도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놀랍다. 훈은 문득 아버지가 떠오른다.
가정에서 늘 권위를 내세우고 작은 일에도 목소리를 높이셨던 아버지. 그런 가부장적이고 다혈질의 성격은 직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한곳에서 오래 진득하게 못했다. 같은 업종의 일만 해도 트럭을 몰다가 어느 날은 학원 차를 몰고 또 어느 날은 마을버스를, 그리고 얼마 지나서는 회사 통근차를 운전했다. 일 나가시면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문제는 그런 날은 집이 전쟁터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부어 댔다. 엄마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하고,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재도구를 집어던졌다. 밥솥을 던지고 청소기를 던지고 담가 놓은 술도 내던져 유리 조각이 사방에 튀었다. 그리고 엄마를 폭행했다. 훈이 보는 앞에서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때리고 죽일 듯이 목을 조르고, 온몸에 피멍이 들 때까지 엄마를 두드려 팼다. 훈은 방 안에서 엄마가 맞는 소리를 들으며 밤새 공포에 떨었다.
아버지는 어린 훈에게도 폭력을 가했다. 물론 아버지가 처음부터 폭력을 일삼은 것은 아니었다. 장사를 하다가 쫄딱 망하고 난 뒤부터 폭력적으로 변했다. 30센티 자로 손바닥과 종아리를 때렸는데 어느 순간 그것은 체벌을 넘어 폭력으로 바뀌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갔다. 하키채로 종아리를 때리고 어느 땐 골프채를 휘둘렀다. 효자손은 때리다 너덜너덜해졌다. 아버지는 때리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훈은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별 뜻 없이 누가 손을 올려도 몸이 움찔해 피하는 행동을 하고, 아버지 목소리만 들어도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나중에는 정신이 멍해졌다. 어떤 일을 해도 아무 생각이 안 들고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교반기로 콩물을 저어주고 나서 사장은 원액 펌프와 여과, 여과 펌프 버튼을 연속해 누른다. 이에 기계음이 더해 요란하다. 마쇄기통에 든 콩물은 자동 여과기를 걸쳐 순간 가열기 끓임솥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자동 여과기에서는 찌꺼기를 걸러 비지로 남게 하고, 끓임솥에는 콩물만 들어가 스팀으로 가열된다. 찌꺼기가 벽에 부딪쳐 콩이 튀기는 소리가 나고, 끓임솥에서는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난다. 사장은 물그릇에 소금과 화학 첨가물을 넣어 훈에게 건넨다. 훈은 물그릇을 받아 스푼으로 젓는다. 소금과 첨가물이 천천히 녹았으면 하지만,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저어 보지만 그것은 설탕처럼 금방 녹는다.
사장은 응고통을 갖다 대고 꼭지를 돌린다. 그러자 끓은 콩물이 쇠 파이프를 통해 쏟아지고, 그것은 마치 모터에서 물이 나오듯 꽐꽐 소리 내며 쏟아진다. 순두부가 반 넘게 차자 꼭지를 잠근다. 통에 든 순두부는 뽀얗다. 살짝 덩어리져 포동포동 살이 찐 것 같고, 콘처럼 부드러워 입에 넣고 싶다. 사장은 옆에 냉장고를 보며 훈에게 턱짓한다. 훈은 재빨리 움직여 냉장고 안에서 면포를 꺼낸다. 면포 두 개는 두부판 속에 깔고 하나는 손에 쥔다. 얇은 막이 생기기를 기다렸다가 간수를 넣고 면포를 응고통 위에 덮는다. 일은 거기서 끊긴다. 훈은 미동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다. 그러자 불현듯 옛일이 다시 생각난다.
그날도 아버지는 취해 집에 돌아오셨다. 훈은 방 안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오신 줄도 몰랐다. 키보드를 한참 두드리는데 아버지가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셨다. 여느 때처럼 얼굴이 붉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아이돌 앨범 여섯 장을 한꺼번에 집어 던졌다. 아빠가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그러더니 따귀를 연속해서 때렸다. 얼굴이 돌아갈 정도이고 잘못 맞아 귓속이 윙윙 울렸다.
아버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 발로 차 넘어뜨리고 배를 밟으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훈은 아빠를 외치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했다. 너 같은 놈은 죽어야 돼!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 이번에는 코피가 났다. 아버지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왔다. 칼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했다. 공포에 휩싸인 훈은 정말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운 날 반바지 차림으로 집을 도망쳐 나왔다. 주머니에 돈도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친구 집으로 갔다. 친구네 가족이 다 쳐다봐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버지는 얌전했다. 집에 계시면 청소를 하고 화초에 물을 주고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도 했다. 아버지는 요리도 했다. 잘하는 것은 참치두부 요리였다. 아버지는 두부를 썰며 훈에게 말했다. 두부는 식물성 단백질이 들어 많이 먹어야 한다고. 썬 두부를 키친타월 위에 올려놓고 각종 채소를 다졌다. 양파와 당근, 양배추, 파프리카, 대파를 굵게 다지고 깻잎은 가늘게 썰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두부를 부쳤다. 노릇노릇해지자 옮겨 놓고 이번에는 채소와 참치를 넣었다. 간장과 맛술, 굴소스, 후춧가루, 올리고당도 넣어 참치가 보슬보슬하게 될 때까지 볶았다. 두부탑 위에 볶은 참치를 올리고 썰어둔 깻잎 고명을 올리면, 맛있는 참치두부 요리가 완성되었다.
훈은 혼란스러웠다. 아버지의 참모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아버지의 그런 이중성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쇼 같고 연기 같고 가족을 농락하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훈은 집이 싫었다. 집이 지옥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밤거리를 부랑아처럼 배회하고 피시방에서 날을 새고 노숙자처럼 공원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3
사장은 엉긴 순두부를 두부판 안에 붓는다. 시범을 보이듯 세 번 붓고 훈에게 바가지를 건넨다. 훈은 바가지를 양손에 쥐고 순두부를 푼다.
“어허!”
두부판 안에 생각 없이 붓자 사장이 눈살을 찌푸린다.
“내가 아기 다루듯이 해라 했잖아!”
사장의 호통에 훈은 얼굴이 굳어진다. 천천히 부어야 하는데 빨리 부운 것으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정성껏 푸고 정말 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천천히 붓는다. 훈은 성형 압축기를 잡아당겨 버튼을 누른다. 성형 압축기 위쪽이 삐꺼덕 소리 내며 밑으로 내려앉는다. 훈은 손가락을 세워 압축기를 힘껏 누르고, 십 초 후에 손을 뗀다.
“판과 틀은 안 갖다 놔?”
다시 사장의 호통이 이어진다. 훈은 받침대에서 두부판 두 개와 두부 틀 두 개를 가져와 압축기 옆에 각각 세운다. 훈은 오늘따라 실수가 많다고 생각한다. 사장 말대로 다음 액션을 미리 생각하지 않는 것이 원인이다. 다른 단계에서는 지적받을 일이 없는데 두부를 성형하고 압축하는 과정에서는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사장도 마찬가지여서 별것 아닌 것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훈은 처음에 두부 만드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 무척 재미있을 거란 생각만 했다. 두부집은 공간이 좁고, 기계도 몇 대 안 돼 떡방앗간보다도 못했다. 평소 두부를 자주 접하고 외할머니가 두부 만드는 걸 본 적도 있어 낯설게 여겨지진 않았다. 두부는 생각보다 생산 과정이 복잡했다. 기계도 처음이라 다루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정작 힘든 것은 두부집 사장이었다. 출근 첫날, 사장은 자신이 하는 것을 옆에서 보라고만 했다. 훈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끝까지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사장은 그날 훈에게 일을 시켰다. 일하다 몰라서 물으면 쉿 하고 입에 손가락을 댔다. 그러다가 훈이 못하면 방금 봤으면서도 그것도 못하냐고 타박했다.
사장은 키가 크고 허리가 곧았다. 몸은 단단하고 다부져 힘이 느껴졌다. 사장 역시 몸에 앞치마를 두르고 장화를 신었다. 거기에 위생모를 써서 마치 군대 취사반에 근무하는 나이 든 취사병 같았다. 사장은 전에 해병대 장교로 복무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군에서 퇴직을 했고, 지인의 권유로 두부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그의 말투나 행동은 군인 같았다. 일테면 앞을 지나갈 때 사장은 훈에게 두 발짝 물러서라 하고, 구십 도로 손을 올리라든가 사십오 도로 허리를 굽히라고 했다. 사장은 모를 땐 잘하는 사람을 따라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따라하라고 했다. 그것은 단순히 따라하는 것을 넘어 똑같이, 다르지 않고 그대로 해야 한다. 콩물을 저을 때도 사장처럼 노 젓는 자세로 저어야 하고, 응고통 안에 든 순두부를 뜰 때도 사장과 똑같이 왼쪽부터 떠야 한다. 세정제를 뿌릴 곳은 세정제만 뿌리고, 세정제와 세척제를 섞어 문댈 곳은 그렇게 하고, 또 일의 순서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두부판을 닦을 때도 왼쪽과 오른쪽 순서 있게 닦아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질책이 따른다.
사장과 달리 사장 부인은 온순했다. 손님이 오면 웃으며 맞고 목소리에도 따스함이 배었다. 사장 부인은 두부를 판매했다. 두부집 입구에 좌판이 있는데 그곳에 즉석두부를 놓고 팔았다. 두부뿐 아니라 김이며 미역, 누룽지, 청국장, 고추부각 등을 진열해 놓아 어느 땐 마른반찬이 더 나갔다. 사장에게 혼이 났을 때 사장 부인은 훈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사장이 싫은소리를 해도 참고 이해하라 하고, 성질머리가 원래 그래서 그렇지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훈이 알바생인 걸 잊고 또 어느 면에서는 훈과 동병상련의 입장이라 남편 흉을 보았다.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라 자신마저도 낭만이 사라졌다는 것과 외고집에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 천생 두부나 만들며 살 팔자라는 둥, 손님이 있으나 없으나 소리 질러 망신을 준다는 것, 그리고 딸이 그렇게 음악하고 싶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냉혈형 인간이라는 것 등 말하는 내내 얼굴을 찌푸렸다.
다행히 사장은 뒤끝이 없었다. 수시로 다그치고 야단쳐도 그때뿐이었다.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 점은 그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훈을 세뇌시키고 노예처럼 길들이기 위한 하나의 계책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두부가 압축기에서 성형되면 그걸 밑으로 내린다. 그리고 계속 두부를 만드는데, 콩물을 다시 퍼서 두부판에 붓는다. 어느 정도 두부를 만들자 사장은 두부판 하나를 좌판 위에 올리라고 한다. 훈은 먼저 두부판을 받침대 위에 놓는다. 위에 사각 쟁반을 덮고 두부판과 사각 쟁반을 양쪽에서 잡는다. 그런 다음 그것을 가볍게 뒤집어엎는다. 훈은 두부판을 처음 엎을 때가 생각났다. 두부판을 뒤집기 전에 사장은 훈에게 연습을 시켰다. 받침대 위에 빈 두부판과 사각 쟁반을 얹게 하고 무릎을 굽히라고 했다.
“허리는 펴!”
그 상태에서 훈은 두부판을 뒤집는 연습을 했다. 주의할 점은 두부판이 받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엎어야 하는 것. 훈은 사장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빈 두부판과 사각 쟁반을 엎고 또 엎었다. 마침내 사장은 훈에게 두부판을 실제로 엎어 보라고 했다. 훈은 긴장이 되었다. 두부가 든 두부판을 옮기고 그 위에 사각 쟁반을 놓았다. 양손을 벌려 두부판과 사각 쟁반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재빨리 엎었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간 걸까, 두부판이 그만 미끄러져 내렸다.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사장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두부가 바닥에 굴렀고 훈은 눈앞이 깜깜했다.
“씨팔, 이거 어쩔 거야?”
등에 식은땀이 났다. 훈은 엎어진 두부판을 집었다. 면포에 감싸여 있었지만, 두부는 이미 상해 버렸다. 훈은 결국 두부 한 판 값을 임금에서 제해야 했고, 그 두부를 집에 가져가 질리도록 먹어야 했다.
두부집을 나와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다. 은서에게서 한 통, 친구에게서 한 통, 그리고 엄마에게서 한 통. 훈은 학교 청소부로 일하시는 엄마에게 전화한다.
“훈아, 이번 달 30일에 집에 좀 올 수 없니?”
반가운 목소리로, 그러나 뭔가 애원조로 엄마가 말한다.
“왜요?”
“그날이 니 아버지 제사야. 이번엔 너하고 같이 지냈음 해서….”
“알바가 있어요!”
훈은 아버지 제사라는 말에 감정이 올라오고 어서 전화를 끊었으면 한다.
“끝나고 오면 안 되니?”
“늦게 끝나 안 돼요!”
“그래, 혹시나 해서….”
4
룸마다 제각각 컬러가 달랐지만, 은서가 있는 곳은 붉은빛이 도는 공주풍의 룸. 5평 남짓해 보이는 룸에는 인터넷까지 되는 TV와 작은 탁자가 있고, 폭신폭신한 매트와 아기자기한 쿠션이 있어 아늑함까지 더하고 있다.
“오늘 일하느라 힘들었지?”
자리에 앉자 은서가 환한 미소를 보낸다.
“이제 두부 만드는 기계랑은 친해졌어?”
“응.”
“오빠, 우리 아빠 때문에 힘들지?”
은서는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훈은 괜찮다고 한다.
“다들 얼마 못하고 관두는데 오빤 그래도 잘 버티네. 예전 아줌마처럼 오래 있겠어.”
은서는 갑자기 웃는다. 은서가 말하는 아줌마란 두부집에서 일했다는 분으로, 전에 은서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 아줌만 얼마나 계셨니?”
“한 반년 있었나.”
“그보다 오래 일한 사람은 없었던 거야?”
“응.”
“아줌마가 일을 잘했나 보지?”
“아니, 그 반대야. 근데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그 아줌마한텐 무척 잘해 드렸대. 일을 잘못해도 혼내지 않고 집에 일 있음 보내주고, 두부도 많이 챙겨주고…. 아줌마가 좀 예뻤거든.”
그때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은서가 시킨 티라미수 쉐이크는 한 조각이 통째로 들어가고 아이스크림 한 덩어리에 여러 과자까지 들어가 양이 꽤 많다. 훈이 시킨 것은 블루베리 요거트 스무디. 블루베리가 잘 섞여 진한 보라색을 띠면서 거품이 알맞게 위로 올라와 있다.
“음악학원은 다닐 만하니?”
은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전에는 얼굴이 수척하고 어두웠는데, 눈에 띄게 밝고 화사해진 모습이다.
“좋은 선생님께 지도받아 보컬 실력을 향상시키고 제대로 된 실용음악 입시 대비가 필요했는데 원하는 대로 됐어. 원장님도 강사님도 다들 실력자분들이셔. 레슨은 일대일 개인 레슨으로 진행되고, 연습실도 많아 댄스 연습도 할 수 있어. 입시에 필요한 꿀팁과 가수 되기 위한 트레이닝에 많은 도움을 줘. 실력이 쑥쑥 늘 것 같애.”
“만족하니 다행이구나.”
“녹음 수업을 통해 내 노랠 모니터해 볼 수도 있어. 녹음 수업도 원장님이 직접 지도해 주시고….”
은서의 눈빛은 초롱초롱하다.
“근데 처음부터 음악에 관심 있었니?”
“난 어렸을 때부터 예체능에 관심이 많았어. 음악과 무용을 동경했지. 중학교 때 무용을 하고 싶어 무용학원에 보내 달라 했는데 아빠가 반대했어. 그래서 포기했는데, 이번엔 음악이 하고 싶은 거야. 케이팝과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도 보컬이 되고 싶었어. 물론 멋지게 연주하는 사람 보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예전부터 들었지만….”
“사장님은 뭘 되길 원하는데?”
“아빠는 내가 군인이 되길 바래.”
“군인?”
“요즘같이 취업이 어려운 시대엔 직업군인이 최고라는 거야. 여군이 되면 국가 공무원으로 안정된 직장을 보장받을 수 있대. 그리고 20년 이상 복무 후 전역하면 연금 혜택 등 노후를 보장받게 돼 있다는 거야. 그러나 난 군인은 싫어. 군복이라든지 무기 따위 같은 거 싫어해. 군인이면 여자도 훈련받을 텐데, 난 그런 체력도 갖추지 못했고….”
훈은 고개를 끄덕인다. 은서는 어느새 굳은 얼굴로 티라미수 쉐이크를 먹는다. 양이 어마어마해 수저로도 먹고 빨대로도 먹는다. 훈도 블루베리 요거트 스무디를 마신다. 기대했던 바대로 맛이 시원하고 새콤하고 부드럽다. 훈은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난다.
군에 입대하기 며칠 전이었다. 훈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설악산으로 여행 가고,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친구들과 술로 달랬다. 아버지의 문자를 받은 것은 엄마를 만나고 난 뒤였다. 입대 전 들러 밥 한 끼 먹고 가라는 내용으로, 훈은 답장하지 않았다. 군에 간다고 해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고, 더구나 아버지와 마주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훈은 엄마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이 전해 들었다. 그것은 하나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회사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밥먹듯이 하고,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 보낸다고 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술을 마셨다고 한다. 사고는 한밤에 일어났다. 술이 만취가 된 상태에서 도로를 건너다가 차에 치였고,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 세상과의 이별이었다. 장례식장에 갔을 때 엄마는 훈에게 장난감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가신 아버지 손에 장난감이 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장난감요?”
훈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그래.”
“어떤 장난감요?”
“로봇 장난감이었어.”
“로봇 장난감요?”
“왜 그런 걸 갖고 있었는지, 니 아버진 정말 알다가도 모를 양반이다.”
훈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며 어릴 때 일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훈은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줄 알았다. 그런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사랑했다. 훈은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다가 그 집에 있는 장난감을 보고서 아버지한테 장난감을 사달라고 했다. 훈은 정말이지 장난감을 갖고 싶었다. 그것은 TV에서 보던 애니메이션 속 장난감을 그대로 옮겨 놓은 합체 로봇이었다. 여러 대의 자동차와 동물 모양 기계가 분리되었다 다시 맞물리며 거대 로봇으로 변신하는 장난감이었다. 각 기체가 팔과 다리, 몸통이 돼 합체하는 시스템으로 다른 시리즈 로봇과도 연결해 다양한 형태로 변형이 가능했다. 아버지는 선뜻 사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이었다. 훈은 어서 장난감 로봇을 사달라고 졸랐고, 아버지는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날 아버지는 일찍 집을 나섰다. 저녁에 돌아온 아버지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땀이 나고 옷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물론 아버지 손에는 그토록 원했던 장난감이, 자석을 이용해 얼굴도 바꿀 수 있는 변신 로봇 장난감이 들려 있었다.
5
심부름을 다녀오니, 사장과 은서가 거칠게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
“당장 그만둬!”
“난 계속 다닐 거야.”
“아빠가 그런 거 하지 말랬지!”
“난 음악이 좋아서 하는 거야.”
“그런 길로 가면 인생 망친단 말이야. 도박하고 마약하는 사람들 못 봤니?”
“몇 사람이 그렇다고 모두 다 그렇진 않아.”
“네가 꿈꾼다고 해서 세상이 널 봐주진 않아. 넌 아직 어려서 사회가 얼마나 차가운지 몰라. 실수하면 용서받지 못해.”
“그래도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고 싶어.”
“제발 정신 차려! 그런 데 인생 걸면 반월세 지하방에서 굶어 죽을 수 있어. 아이돌 지망생만 해도 수천 명이야. 데뷔까지 몇 년, 길게는 십 년이 걸리고, 데뷔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어.”
“성공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잖아.”
“톱스타 몇몇만 돈을 버는 거야. 대부분은 버티다 관두고, 그럼 너는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게 없게 돼. 그리 되면 어떻게 살래?”
“클럽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처럼 잘 사는 사람들도 있어.”
“그건 극히 일부야. 현실을 좀 봐, 이것아!”
“제발 내 길 좀 막지 마!”
은서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6
오후 시간에는 청소 작업이 진행된다. 맨 뒤쪽에 있는 마쇄기부터 하는데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장과 같이 한다. 청소할 양이 많고 늦춰지면 시급이 추가되기에 거들어 줄 수밖에 없다. 고혈압 증상으로 매일 혈압약을 복용하는데도 사장은 마쇄기 뚜껑을 열어 맷돌에 낀 콩가루를 갈고리로 긁는다. 대충 제거한 다음 솔로 팍팍 문지르고, 마쇄기 부분을 1번에서 4번까지 나눠 순서 있게 닦으라고 명한다. 훈은 하얀 수세미로 바닥과 뚜껑, 안과 밖에 통까지 세정제를 고루고루 문댄다. 빨간 수세미에 세정제를 묻혀 그것을 세척제에 다시 찍고 1번 부분부터 문대기 시작한다. 하얀 수세미는 슬슬 문대도 되지만 빨간 수세미는 싹싹 문댄다. 마쇄기에서는 크게 지적당할 것이 없어 훈은 자신 있게 문댄다.
이번에는 자동 여과기를 닦는다. 두부를 만들 때는 안쪽만 긁었지만 문 입구에 붙은 비지까지 긁고, 안쪽 거름망에 달라붙은 것까지 주걱으로 깨끗이 긁는다. 그리고 세정제를 뿌리고 세척제를 묻혀 수세미질한다. 사장은 기계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간에 세정제로 닦는 것을 좋아했다. 도구들이야 그렇다고 해도 기계는 스테인리스강이라 물로 닦아야 하고, 위생상 그래야 될 것도 같은데 세정제로도 부족해 세척제로 또 닦았다. 사장은 세정제는 묻히면 묻힐수록 좋아했다. 거품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했다.
사장은 물을 뿌리는 것도 좋아했다. 수압 모드가 바뀌는 샤워기는 모드가 종류별로 있고 또 수압이 세고 면적이 넓게 분사되어 청소하는 데 효율적이다. 사장은 샤워기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했다. 일하는 중에도 수시로 뿌렸다. 뿌리고 또 뿌리고, 바닥에 이물질이 눈에 띄면 샤워기를 집었다.
사장은 원액 펌프와 여과 펌프 버튼을 누른다. 마쇄기에 있는 세제 찌꺼기가 자동 여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안에 있던 세제 찌꺼기와 순식간에 뒤섞인다. 세젯물은 그 안에서 빙글빙글 돈다. 비지처럼 벽에 부딪쳐 탁탁 소리를 내고 거품이 잘게잘게 쪼개졌다가 다시 합해진다.
응고통과 바닥을 닦을 땐 실수해도 아무 말 않는다. 청소의 마지막 단계라 눈감아 주는 것으로, 그럴 때 보면 훈은 사장에게도 인간적인 면이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7
훈은 사장의 얼굴빛을 살핀다. 이제는 표정과 몸짓만 봐도 그날의 분위기와 하루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사장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굳어 있고,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다. 훈은 좌판에 있는 사장 부인을 바라본다. 그녀 역시 표정이 밝지 않다. 두 사람에게서 이런 냉랭한 기운이 감지되면, 대체로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거나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이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은서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다.
‘오빠, 나 집 나왔어. 친구랑 가출팸에 있어.’
훈은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사장이 은서와 통화 중이다.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얼굴은 붉어지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어서 빨리 들어오지 못해!”
“너 안 오면 끝장날 줄 알아!”
말소리가 거칠어지자 은서의 반응도 격해진다. 그러다 사장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뒷목을 움켜쥐고 힘없이 쓰러진다. 순간 가게 안은 숨조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해진다. 훈은 놀라 달려가 사장을 부축하고, 사장 부인은 급히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긴장과 불안이 가득한 공기가 가게 안을 감쌌다.
8
훈은 좌판에서 두부를 판다. 두부를 사가는 사람들은 주로 나이 든 분들로, 남자는 어쩌다가 오고 거의 여자들이다. 젊은 사람들은 피자나 빵 같은 것을 좋아해 두부를 찾지 않는다.
훈은 혼자 식사하고 가게를 지켰다. 가게는 텅 빈 듯하고, 두부 냄새와 따뜻한 김만이 자리를 채웠다. 두부를 찾는 손님들에게 훈은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언제 살 수 있냐고 묻는 이들에게는 저녁이나 내일, 아니 그 이후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훈은 좌판을 정리한 뒤 잠시 숨을 고른다. 어디선가 아이들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다. 두부상자 옆에 놓인 작은 저울이 덜컹거리자 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들 발걸음이 멀어지면 가게는 적막해지고 두부 냄새만이 은은하게 남는다.
9
훈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목깃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오가고, 가로등과 상점 불빛이 보도에 반사돼 희미한 빛줄기를 그리고 있다. 역을 향해 가는데 못 보던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전에는 가구매장이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 완구점으로 바뀐 모양이다. 형형색색의 풍선과 캐릭터 포스터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유리창 너머로 장난감이 보이고 훈은 무엇에 홀리듯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매장은 생각보다 넓고 쾌적하다. 공간을 메운 다양한 장난감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어린 시절 장난감 가게에 들어섰을 때 설렘이 느껴지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 동네 문방구로 순간이동한 기분이 든다. 저녁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와 있다. 엄마와 함께 온 아이도 있고, 할머니와 함께 온 아이도 있다. 장난감은 아이들의 연령대별로 준비되어 있다. 아기들을 위한 딸랑이와 촉감 장난감이 있고 유치원생들이 좋아할 블록과 모형 세트가 있으며, 초등학생을 위한 복잡한 퍼즐과 과학 키트 같은 아이템도 보인다. 특히 요즘 인기 많은 볼꾸와 말랑이, 슬랑이, 왁뿌볼, 티니핑 제품들도 많다.
매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다양한 카테고리의 아이템들이 반겨준다. 인형과 자동차, 피규어, 캐릭터 장난감이 있다. 그리고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로봇도 있는데 훈은 그중의 하나를 집어든다. 그것은 자동차 장난감 상태에서 몇 가지 간단한 동작만으로 로봇으로 변신하는 장난감으로, 자동차 모드일 때는 바퀴가 달린 차 형태로 굴릴 수 있고 로봇 모드로 바꾸면 팔다리가 펼쳐져 세울 수 있다. 훈은 장남감을 품에 꼭 안는다. 플라스틱 감촉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어린 시절 기억이 물결처럼 마음에 번진다.
밖으로 나오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쌓일 정도는 아니지만, 흰 눈송이들이 가볍게 춤추며 지면에 내려앉았다. 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거리를 바라본다. 차가운 풍경 속에서 세상이 왠지 빛나 보이고, 마음은 고요히 가라앉는다. 훈은 휴대폰을 꺼내 엄마에게 아버지 기일에 집에 가겠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리고 손에 머문 눈송이 하나를 꽃잎처럼 입술에 가만히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