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0월 6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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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이었는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우리 집 황소를 끌고 석화산(石花山) 자락, 비석거리로 향했다. 비석거리는 동네에서 외지고 무덤이 많았으며, 무덤마다 아이들의 키보다 더 큰 비석이 무덤 양옆으로 불쑥불쑥 솟아 있었으니 밤에 그곳을 지나친다는 것은 여간 담이 크지 않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예전에 마을에서 행세깨나 했던 사람들이거나 벼슬을 한 사람들의 무덤일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무덤은 잔디로 잘 가꾸어져 있게 마련인데, 역시 그 무덤가 옆으로도 널따란 풀밭이 조성되어 동네 아이들이 소 끌고 모이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소들이 풀 뜯기에도 좋았겠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모여서 그곳에서 편 갈라 씨름도 하고 궁 말타기, 그리고 짐볼이라는, 그러니까 말랑말랑한 공을 라켓으로 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보내고 수비수들은 날아가는 공을 잡거나 놓치더라도 힘껏 던져서 아웃시키는 게임이다. 요즘의 야구 규칙과 비슷한 놀이였다. 라켓이라고 해야 아카시아나무 뿌리를 휘어 끈으로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힘껏 휘둘러 공을 맞혀내면 수비하는 아이들이 공을 잡으려고 아우성을 치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난장판이 되는 광경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산자락에 풀어 놓은 소들은 무리 지어 이리저리 다니면서 풀을 뜯고, 아이들끼리 어울려 신나게 놀다가 어스름 저녁이 가까워지면 마을 쪽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굴뚝에서 모락모락 오를 적에 각자 소를 끌고 집으로 오면 그만이었다. 소들은 알아서 맛있는 풀을 뜯어 먹고 배가 불룩하여 뒤뚱뒤뚱 걸어 들어가면, 아버지께서는 소 풀 잘 먹였다고 칭찬해 주시곤 했지.
한 고개 너머 마을에 외갓집이 있었는데, 외종사촌형이 하모니카를 잘 불었다. 그 시절, 하모니카를 근사하게 불어대던 외종사촌형이 왜 그렇게도 잘나 보이던지. 그 형을 볼 때마다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나에게 그 형이 하모니카를 ‘딱 하루만!’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빌려주었다. 뛸 듯이 기뻤다. 평소에는 소 풀 먹이러 가는 일이 너무 싫어 오만상을 찌푸리곤 했는데, 그날은 하모니카를 들고 신이 나서 소를 끌고 비석거리로 향했다. 예나 마찬가지로, 소를 자유롭게 풀어 놓고는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배기에 앉아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난이도가 높은 것으로 ‘학교 종이 땡땡땡∼’,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엄마가 섬 그늘에∼’,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풀밭 언덕에 앉아서 불어대는 구성진 하모니카 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하모니카 삼매경에 빠져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아귀가 아플 때까지 불고 또 불었다. 단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은 시간!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겠는가?
석양이 붉게 물들 무렵 갑자기 소 생각이 났다. 그런데 늘 보이던 곳에서 풀을 뜯고 있어야 할 소가 보이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소를 찾아 몇 굽이를 정신없이 넘다 보니, 어렴풋이 먼 곳에서 우리 집 황소가 눈에 띄었는데, 아뿔싸! 이웃집 밭에 들어가서 콩이며, 옥수수를 마구 뜯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우리 동네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아저씨네 밭에서 말이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한걸음에 내달려 황소 앞까지 가긴 갔는데, 제 잘못을 알아차렸는지 고삐를 쥐려 하는 순간, 소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내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육중한 몸매의 황소가 촘촘한 소나무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달리기 하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줄곧 학년별 계주 선수로 나갔던 나였기에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데, 그날은 그 육중한 몸매의 황소에게 뒤지고 말았다. 황소는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는지 필사적으로 산속을 달리고 또 달려 도망을 쳤다. 더는 남의 밭농사를 망칠 수 없다는 생각과 아버지께서 아시면 얼마나 야단을 치실지 짐작이 가기에 나 또한 황소를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잠시 전의 하모니카 불며 행복해하던 순간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지고 오로지 소 고삐를 잡기 위해 내달렸다.
그렇게 20분을 쫓고 쫓기는 대활극(大活劇)을 펼친 끝에 고삐를 쥐는 순간, 10여 미터를 소에게 끌려갔고 그 바람에 날카로운 소나무 가지에 팔뚝을 찍혀 피가 철철 흘렀다.
사실, 피가 나는 것보다도 남의 콩밭을 망쳐 놓은 것이 알려지면 얼마나 혼날까 하는 생각에 이웃집 아저씨와 더불어 아버지의 화가 난 얼굴이 떠올랐다. 다행인 것은 밭 주인인 이웃집 아저씨가 끝까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고, 6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나만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저씨, 지금도 그곳에 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야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지금도 그 시절, 소나무에 찍힌 흉터가 인생 계급장처럼 오른쪽 팔뚝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가끔 고향을 갈 때면 그 비석거리를 지나치게 된다. 이미 많이 변해 버린 고향산천이지만 비석거리 옆을 지날 때, 눈망울이 화등잔 같던 우리 집 황소와 그 옛날의 하모니카 소리가 청아하게 내 귓전을 스친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 병오년(丙午年) 5월은 세상 온통 신록이 우거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