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고라니 보살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호재(서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0월 692호

조회수40

좋아요0

연등문화 축제장 현수막 머리글에 ‘마음은 평안으로 세상은 화합으로’라는 슬로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실 내가 제등행렬 행사에 참여한 것도 마음에 평안을 구하려는 목적이 있지 않나 싶다. 내 마음이 평안하면 세상과 불화할 일도 없을 것 같다.
설성공원 야외 음악당 무대에서는 초대 가수의 구성진 노래가 흥을 돋운다. 어울림마당, 법요식, 제등행렬의 순서로 진행하는 행사의 첫 번째 순서인 듯하다. 제등행렬 행사에 가수가 출연하여 대중가요 공연을 하는 건 좀 뜻밖의 상황이다. 처음 참여한 행사인지라 예전부터 그렇게 해온 것인지 시대상황 변화에 따른 새로운 풍조인지는 잘 모르겠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산중 사찰에서 신도를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세속으로 들어와 대중들의 방식으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게 바람직한 모습이기도 하겠다.
법요식이 끝나고 저마다 등불을 들고 읍내 한 바퀴를 돌아오는 제등행렬이 진행되었다. 독경 소리와 사물놀이 장단에 맞추어 거리를 돌아드니 발걸음이 가볍다. 손에 잡은 등이 세상을 밝히면 내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생각에 등불을 든 팔도 가벼워진다.
행사가 끝나고 귀가하는 길은 한적한 과수원 사이로 드문드문 가로등이 있지만, 어둠에 묻혀 사위가 고요하다. 인적 없는 도로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닫는 거리가 너무 짧아 상향등을 켰다. 멀리 시야가 확 보여야 돌발상황에 미리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가섭마을을 지나고 복숭아밭에서 사과밭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다다르니 저 멀리 도화마을 입구가 보인다.
마지막 전신주 뒤 과수원 풀숲에서 희끗한 형체가 전조등 불빛으로 뛰어든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사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쿵 하는 소리에 차에서 내려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길가에 쓰러져 있다. 차를 살펴보니 견인 캡이 떨어져 나가고 전조등 틈새에 고라니 털이 커다란 빗솔처럼 잔뜩 박혀 있다. 버둥거리던 고라니에게 눈길을 보내니 어디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스스로 일어나 제 발로 제 갈 길 간 것 같다. 상향등 불빛에 눈이 부셔서 천지분간을 못하고 자동차 앞으로 뛰어든 듯하다. 사고를 방지하려고 켠 상향등이 오히려 사고 발생을 유발한 것 같다. 등으로 세상을 밝히는 데에 너무 밝은 빛이 필요한 건 아닌 모양이다.
마을이 고라니 천국이다. 밤에는 마당에도 들어와 놀더니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다 놓은 후로는 주거 공간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낮에는 인근 부지에 있다가 강아지에게 쫓겨 후다닥 달아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주변에 고라니 분변이 널린 걸 보아 늘 찾아오는 장소인가 보다. 동물 애호가 친구들은 고라니가 다쳤을까 걱정하는 마음이겠지만 농촌 현실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퇴치 대상 유해동물일 뿐이다. 어쨌든 나로 인해 고라니가 다치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이다. 제등행렬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인데 부처님의 가피로 복덕이 미치지 않고 왜 사고가 났는지 의아스러운 마음이다. 내 공덕이 부족하였는지 부정 탄 행동이 있었는지 지난 일을 되짚어 본다.
다음 주말에 귀경길에 올랐다. 웬만해선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가속 페달로만 속도를 조절하는데, 이날따라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다. 왠지 자꾸 불안감이 밀려드는 게 몸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다. 사찰 신도회 부회장님에게서 내일 절에 와서 일 좀 해줄 수 있는지 묻는 전화가 왔다. 또 출판사 대표님에게서 회원 프로필 사진이 없는 분이 있어 보내줬으면 한다는 전화가 왔다. 전에 작품 참여했던 분이니 사진 자료가 있을 거라고 찾아봐 달라고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얼마 후에 또 전화벨이 울려서 받으니 전화가 끊어졌다. 문자를 보냈거니 하고 마지막 졸음쉼터에 들러 확인을 했더니 이분 사진이 맞는지 묻는 문자가 와 있다.
출판에 관한 여러 가지 협의를 마치고 출발하였는데, 차에서 이상한 소음이 심하게 났다. 무슨 소리인지 창문을 내리니 소음이 줄고 창문을 닫으니 더 크게 들렸다. 자동차에 무슨 문제가 있나 보다 하고 그냥 계속 운행하였다. 지난주 고라니 사고가 떠오른다. 오늘 안전운전에 특별히 유의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차가 멈춘 시간에 확인한 사진 보정 등의 카톡 문자 수신 건수가 40건이 넘는다.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온 수신 전화가 유달리 많다.
집에 도착해 차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니 바닥 언더커버가 떨어져 땅에 늘어져 있다. 고라니와의 충돌로 고정장치가 풀린 모양이다. 임시조치로 언더커버를 거치대 안으로 밀어넣고 집에 들렀다가 잠실에 있는 집사람을 픽업해서 천안 딸네 집으로 향했다. 도중에 쇼핑 중에도 카톡 대화와 전화 통화를 여러 차례 하였다.
천안으로 가는 도중에도 손자 녀석이 스마트워치로 4통화나 전화를 하였다. 운전 중에 통화하면 안 되겠지만,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은 전화들이어서 그렇게 되었다. 평상시에는 운전 중에 거의 통화를 하지 않는데, 이날은 일진이 아주 유별나게 특이한 날이다.
오늘 고속도로 운전 중에 언더커버가 떨어져 땅에 마찰을 일으키며 브레이크 역할을 하여 차량의 운행속도를 늦춰 준 것 같고, 안전운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된 것 같다. 고라니 덕분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사고를 모면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차에 부딪힌 고라니는 지금 괜찮은지 고라니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고라니가 살신성인의 희생으로 안전운전에 유의토록 깨달음을 주었고, 또한 부처님의 가피로 사고를 예방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라니 사고 순간을 떠올리니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나오는 아이가 있다면 과연 사고를 피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생각이 들고, 더 많이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방어운전에 더욱 신경을 쓴 계기를 만들어준 고라니에게 보살을 대하는 심정으로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보살’을 검색하니 불교적 의미로 ‘자신의 깨달음만 좇지 않고 타인을 이롭게 하며 함께 열반에 이르기를 서원하는 존재’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