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은퇴자의 분주한 일상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태용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0월 692호

조회수40

좋아요0

은퇴한 지 어느덧 아홉 해가 되었다. 직장을 떠나면 비로소 느긋한 삶이 시작될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은퇴하고 보니 나는 여전히 무엇엔가 쫓기듯 살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 일정을 확인했고, 저녁이 되면 다음 날 계획을 세웠다. 직장은 떠났지만 분주함은 퇴직하지 못한 셈이었다.
은퇴 무렵, 한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가 내게 ‘초은(樵隱)’이라는 호를 지어 족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 뜻은 ‘숲과 샘이 있는 고요한 곳에서 물고기 잡고 나무를 하며 여유롭게 살아간다’라는 데 있었다. 친구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은퇴 이후의 삶을 천천히 즐기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월요일에는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와 스마트폰 활용법을 배웠다. 문서를 작성하고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게 되자 새로운 세상을 얻은 듯했다. 화요일에는 서예를 익혔다. 한글과 한문을 쓰고 각종 서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명필의 꿈도 꾸었다. 수요일에는 자서전 글쓰기 강의를 들었다. 지나온 삶을 글로 정리하는 과정은 기억을 더듬는 여행과도 같았다. 목요일에는 캘리그라피를 배우며 글씨 속에 감정을 담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금요일에는 가곡반에서 발성과 호흡을 배우며 시와 음악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삼국지 강의를 들으며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났고, 수필창작반에서는 글쓰기의 기초를 배웠다. 한문교실에서는 고전의 지혜를 익혔고, 문인화반에서는 먹빛의 농담(濃淡) 속에 담긴 여백의 미를 배웠다. 모델 워킹 수업에서는 음악에 맞춰 걷다 보니 마치 전문 모델이 된 착각마저 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 시간은 즐거웠다. 배움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고, 또래들과 어울리는 기쁨도 누리게 해주었다.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더 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직장생활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을 것이다.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쉬고 있으면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과 오후 수업을 다녔다. 그 사이사이 점심 약속과 저녁 약속이 이어졌다. 골프 모임도 빠지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아직도 현역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동분서주했다. 그러는 사이 몸은 조금씩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 쉽게 피곤해지는 몸, 회복이 더딘 날들이 늘어났다. 아내는 곁에서 속도를 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19가 세상을 멈춰 세웠다. 모든 외부 활동이 중단되면서 뜻하지 않은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이내 그동안 써 두었던 원고들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자전적 수필집 『종합 상사맨의 삶, 도전과 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원고를 다듬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은 살아온 만큼 책임져야 할 기억도 많다는 사실이다. 열두 번이나 교정을 보았지만 출간 후 또 오자가 발견되었다. 그때 비로소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책이 출간된 뒤 나는 결국 탈진하고 말았다. 상당 기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은퇴는 새로운 일을 끝없이 찾아다니는 시간이 아니라,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돌아보면 친구가 지어준 ‘초은(樵隱)’이라는 호는 처음부터 내게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무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게으르게 살라는 말이 아니었다.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지금도 나는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다만 예전처럼 무리하지는 않는다. 아내의 엄격한 감독 아래 한 걸음 늦추고, 한 번 쉬어 가며 살아간다. 노년의 소망도 단순해졌다. 맑은 정신으로 두 발로 걸어 하나님 전에 나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평온한 모습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배움이었다. 내게 그것은 열심히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천천히 사는 법을 배워 가는 시간이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