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0월 692호
45
0
가을이 문을 두드린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더위를 돌려보내려 애쓰는 햇살의 결이 사뭇 다르다. 산허리를 감싼 햇살은 고요하다. 은은하게 비껴드는 가을 햇살은 우리 보고 어서 가라며 손짓하는 아버지를 닮았다.
“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안 가.”
몇 달째 아버지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올케가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한 뒤부터는 그 실랑이가 더 잦아졌다. 딸처럼 보살피는 요양보호사님이 이제는 오지 못한다고 말씀드려도 고개만 저으신다. 아버지가 안 가시면 어머니라도 센터에 모시겠다고 타협안을 내놓지만, 아버지는 꿈쩍도 안 한다. 오히려 어머니만 보내라고 한 발 더 나간다. 아버지를 두고 혼자 가실 분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고 내놓은 카드다.
아버지가 병원 진료로 우리 집에 머무시는 동안 어머니는 주간보호센터를 다니셨다. 올케가 보내온 사진 속 어머니는 다른 어르신들과 율동도 하고 만들기를 하며 환하게 웃고 계셨다. 사진을 오래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버지는 이 나이에 내가 뭘 할 수 있겠냐며, 마음과는 다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다. 노인으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 바깥나들이조차 꺼리는 아버지를 나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것 아닌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순이라는 나이를 실감하지 못한 채 살아가던 내게 지인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다 늙어서 잘 보이면 뭘 해.”
그 말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는 아직 ‘늙었다’라는 범주에 넣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미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뜻이다. 그 순간 문득 아버지의 마음이 보였다. 아직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아직은 늙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가 끝까지 붙들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이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센터 가입을 권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자존심도 조금씩 무뎌진다. 하지만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마저 내려놓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기둥은 때로는 자존심 하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간 다음 날, 올케는 어머니를 모시러 들렀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아버님도 같이 가지요?”
어머니가 외출 준비를 하는 사이 아버지도 마치 이끌리듯 천천히 차에 오르셨다. 억지로 떠밀린 걸음이 아니라 스스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한 걸음을 내디딘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작이었다.
가을이 오는 길은 녹록지 않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듯하지만, 뜨거운 여름을 오래 견디고서야 비로소 우리 곁에 닿는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에도, 길게 드리운 그림자에도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 배어 있다. 가을이 마당에 짐을 풀면 세상은 한결 너그러워진다. 이름 없는 풀잎 하나, 담장 아래 떨어진 낙엽 한 장까지도 저마다의 시간을 품고 있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버지의 삶도 그랬다.
열세 살에 소년가장이 된 아버지는 살아남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벌목장에서 나무보다 무거운 생계를 짊어졌고, 짐자전거에 생선을 싣고 산을 넘었다. “도둑질 빼고는 안 해 본 일이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삶의 연대기였다.
그 세월은 몸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비행장 화재로 생긴 팔다리의 화상 자국과 생선장사 하다 한밤중에 칼에 베인 상처는 지나온 시간을 말없이 증언한다. 아버지가 평생 지키려 했던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어떤 고단한 날에도 가족만은 굶기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한마음으로 살아낸 세월은 굽은 등과 굳은 손마디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지금도 아버지는 흐트러짐 없는 삶의 태도를 지키신다. 학생이 교복을 챙겨 입듯 양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중절모를 쓰신다. 센터 차량이 도착하면 먼저 차에 오른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아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시린 발을 감쌀 두툼한 털버선을 들고 천천히 발을 옮긴다. 암 수술과 치매를 견디는 동안 몸은 속속들이 야위어 양복은 허수아비 옷처럼 헐겁게 몸을 감싼다. 새 양복을 한 벌 맞추자고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손을 내저으신다.
“이 옷이면 충분해.”
짧은 한마디에 평생 몸에 밴 검소함이 배어 있다.
마음을 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한 번 받아들인 일은 묵묵히 이어 가는 것이 아버지의 방식이다. 평생 스스로 흘린 땀을 믿으며 살아온 사람답게 오늘도 자신의 하루를 성실히 걸어가신다.
그 걸음은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다. 평생 가족을 먼저 생각하며 걸어온 길이었고, 그 우직함은 어느새 내 삶에도 스며들었다. 가을 햇살이 낮게 드리운 오후, 나는 아버지의 굽은 등에 새겨진 햇살과 바람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으며 또한 계절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