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0월 6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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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위로 엔딩 크레딧이 정적을 깨며 흐른다. 영화 <내 이름은>이 남긴 여운은 상영관의 어둠보다 깊고 무거웠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 편의 영화적 서사일지 모르지만, 제주라는 땅에서 나고 자란 내게 그것은 박제된 역사가 아닌 피부로 와닿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아픔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조각난 과거의 기억들은 4·3 당시 이 섬이 겪어내야 했던 고통스러운 실상을 고스란히 소환해 내고 있었다.
극장 문을 나서며 마주한 제주의 푸른 하늘은 유난히도 시렸다. 저토록 찬란한 빛 아래 얼마나 많은 어둠이 묻혀 있는 것일까. 가슴속에는 당시 제주가 겪어내야 했던 신음이 환영처럼 되살아났다. 그 푸르름 아래 우리 가족의 평화를 일시에 앗아간 ‘빗나간 총성’을 이제 기록의 장으로 불러내려 한다.
1948년의 제주, 제주시의 심장부였던 관덕정 인근은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그곳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으나,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던 형과 두 살이었던 큰누나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재롱을 떨던 시절의 이야기다. 다섯 살 아이에게 세상은 신기한 놀이터였고, 거리의 무장 군인들이 메고 다니는 총은 그저 호기심 어린 구경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훗날 닥쳐올 가혹한 운명을 예감조차 못한 채, 아이는 그 삼엄한 풍경 속에서도 천진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후였다. 가게 앞을 지나던 미군을 향해, 형은 장난감 총을 들고 “피용, 피용!” 하며 총 쏘는 흉내를 냈다. 아이의 순진한 놀이였으나, 토벌의 현장이라 여기던 미군에게 그것은 예기치 못한 도발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놀란 미군은 즉시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총구가 다섯 살배기 아이를 정조준한 순간, 가게 안의 공기는 얼어붙었고 어머니의 세상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살려줍써! 아기가 아무것도 모르고 장난친 거 마씸! 제발 살려줍써!”
어머니는 비명처럼 울부짖으며 형의 앞을 가로막아 서려던 순간이었다. 그 찰나, 탕! 하고 총성이 정적을 갈랐다. 다행히 탄환은 형을 비껴 가 상품진열대를 박살 냈다. 깨진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순식간에 비명으로 뒤덮였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아수라장이 된 가게에서 어머니는 정신을 잃은 듯 형을 끌어안고 떨었다고 한다.
비록 탄환은 아이의 몸을 빗나갔지만, 그 폭음은 어머니의 가슴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조금만 놀라거나 흥분해도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는 병을 얻었다. 훗날 ‘심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질환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극도의 공포가 심장 박동 속에 박제된 역사의 흔적이었다. 이후 지병이 된 심부전증은 어머니의 숨통을 죄어 왔고, 결국 그 병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평생 가쁜 가슴을 달래며 그날의 총성을 온몸으로 기억해야 했던 가혹한 삶이었다.
부모님은 불안한 마음에 결국 다섯 살 난 아들을 시골 할머니 댁으로 보내기로 결단했다. 자식을 품으로부터 격리해야 했던 역설적인 선택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형은 부모의 손길이 아닌,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가족의 생이별, 그것은 4·3이라는 거대한 해일이 우리 집안을 밀고 들어와 남긴 첫 번째 상흔이었다.
당시 중산간 지역을 비롯한 섬의 곳곳에서 주민들은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에게 식량을 수탈당하고, 낮에는 진압대로부터 무장대에 협조를 추궁받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산(山)사람과 군경 사이에서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며 죽음의 그림자를 이고 살아야 했다.
형이 보내진 곳은 아버지 고향인 시골 할머니 댁으로, 절박한 생존 전략의 피난처였다. 부모의 품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별은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자식을 피신시키기 위한 부모의 눈물겨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잔인한 대립의 끝은 ‘초토화 작전’이라는 거대한 불길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들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집어삼켰다.
마을에 불이 나고 이웃이 소리 없이 사라지던 그 무서운 밤마다, 어린 형은 할머니의 거친 손을 붙잡고 총성에 몸을 웅크리며 외로운 시간들을 견뎌냈을 것이다. 형에게 그 시골 마을은 고향이 아니라, 언제 불길이 덮칠지 모르는 거대한 감옥과 같았으리라. 부모와 떨어져 외롭게 자란 형은 가슴속에 정 대신 서늘한 응어리를 먼저 채워야 했다. 이십 대 젊은 나이에 군에서 순직하기까지, 그 시절 소원했던 관계가 남긴 마음의 빚은 결국 우리 가족이 평생 짊어져야 했던 아픈 애환이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우리 형제들에게 4·3은 먼 역사가 아니라 어머니의 가쁘게 뛰는 심장 소리 그 자체였다. 교사가 되어 육지로 발령받은 후 방학 때나 제주에 내려오던 형은, 어머니의 절박한 가슴앓이로 살아남았음에도 마주 앉으면 늘 말이 없었다. 형님의 그 깊은 침묵과 어머니의 가쁜 숨소리는, 4·3이 우리 집 안방 깊숙이까지 들어와 박혀 있던 지울 수 없는 일상의 실체였다.
영화가 남긴 잔상이 푸른 하늘 위로 흩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한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화면 속 주인공의 고통 위로 그날의 총성과 어머니의 절규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날의 탄알은 어린 형의 생명을 비껴갔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파편을 가슴에 품은 채 아픔을 견뎌야 했다.
이제 스크린 속 이야기가 아닌, 우리 가족이 겪었던 그 비극을 기록하며 잊혀져 가는 진실에 나직이 숨을 불어넣는다. 억울하게 숨죽여야 했던 영혼들과 평생 가쁜 심장을 달고 사셨던 어머니, 그리고 먼저 간 형님 앞에 이 글이 한 송이 수선화가 되어 그들의 고단했던 세월을 어루만지는 작은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