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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借景)의 미학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한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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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정원이 있다고 했다. 평평한 야산도 아니고 산세가 가파른 산 중턱에 정원이 있다니 의아했다. 정원을 만드느라 수고가 많았을 것 같다.
정원은 남한산성 중턱에 있다고 했다. 정원을 품고 있는 정자를 찾아야 정원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남한산성 행궁을 지나서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 뒷산으로 올라갔다. 점가교(漸佳橋)라는 돌다리를 건너야 뒷산으로 올라가는데 그 다리는 온데간데없고 다리 밑으로 흐르던 계곡물도 예전처럼 힘차게 흐르지 않는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왼쪽 계곡을 끼고 검은색 바위가 우뚝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이 정자가 있었던 자리라고 했다. 남한산성을 오르내린 지 40년이 넘었고 수어장대를 오를 때면 언제나 이곳을 지나가야 했던 길목이었는데 정자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200여 년 전 그 자리에는 옥천정(玉泉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검은색 바위 정면에 가로 29센티미터, 세로 75센티미터 크기의 판곽을 파고 거기에 행서체로 옥천정이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옥천정은 순조 17년(1817년) 당시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있던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 1766-1838)가 건립했다. 남한산성 행궁 뒤편에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있는 암반 지형을 발견하고 그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옥천정이라고 이름 붙였다는데 정자는 언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정자의 규모는 앞면 1칸, 옆면 1∼2칸 정도로 아담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아도 정원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심상규는 책을 사랑하던 당대의 문장가로서 정조의 총애를 받던 규장각의 핵심 실무자였고 예술적 안목이 뛰어났던 선비다. 그는 차경(借景)의 조경 기법으로 주변의 자연경관을 모두 내 안으로 끌어들여 시각적으로 커다란 정원을 만들었다. 정자와 바깥 풍경 사이의 물리적 경계를 허물고 시각적인 연속성을 창조한 것이다. 공간의 지평을 무한히 확장한 것이다. 이것이 차경의 기법이다. 차경의 미학으로 정원을 만든 것이다.
그는 옥천정 주변 8곳에 아름다운 이름도 붙여주고 자연경관을 정원으로 편입했다. 정자 옆으로 흐르는 시원한 폭포와 가을빛을 담은 맑고 고요한 연못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평평한 바위와 고사리를 노래하며 걷는 오솔길, 즉 청량폭, 영연대, 추수담, 가미경 등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고 모두 정원으로 만들었다.
얼마나 멋스러운 발상인가. 좁은 정자 안에서도 주변의 넓은 자연경관을 내 정원이라고 감상할 줄 아는 차경의 미학, 빌림의 미학을 받아들인 선조들의 차원 높은 미적 감각이 대단하다. 심상규는 좁은 공간에 정자를 들어앉히고 정자의 몇 배가 되는 넓은 정원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을 정자로 초대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들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추측건대 정자에는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들이 놀러 왔을지도 모른다. 심상규가 활동하던 정조, 순조 시대의 실력 있는 문인들이 놀러 왔을 것이다. 초계문신이란 어떤 선비들인가.
당시 규장각은 문장가들의 모임뿐 아니라 문화와 정치의 산실이었다. 정조는 젊고 유능한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선별하여 문장 수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정조가 직접 강론하고 시험 보고 인재를 배출하는 규장각의 인재 양성 교육 제도를 실시했다. 심상규를 비롯한 정약용 같은 출중한 초계문신을 배출해서 왕실의 중요 요직에서 일을 하도록 했다. 규장각에서 함께 일하던 문장가들이 정자로 놀러 오지 않았을까. 초대받은 친구들은 정자에서 담소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시문을 교류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했을 것이다.
정자의 문을 사방으로 활짝 열어젖히고 계곡에서 흐르는 폭포수 소리 들으며 새소리 바람 소리 들으며 선비들은 담소를 나누었을 것이다. 옥천정은 그렇게 유명세를 타고 남한산성의 명소로 알려지면서 후대 문인들도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200여 년 전 교통도 불편한 산길을 어떻게 찾아왔을까. 풍류객들의 열정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정자 옆 바위에는 심상규의 시 한 편과 그 시대에 같이 활동하던 석범 서염순의 시 한 편도 음각되어 있다. 여기에 옥천정에서 노래했던 두실 심상규의 시 한 편을 옮겨 보겠다.


노송 기암이 구름에 싸여 있는 곳(古松奇石閟雲扃)
지령에 힘입어 천년을 지켜왔네(詞護千年賴地靈)
후일에 한가로이 꿈꿀 만한 곳을 찾는다면(他日欲尋閒夢處)
맑고 신선한 가을 물과 옥천정이리라(冷然秋水玉泉亭)
—斗室居士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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