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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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이요!”
머슴이 안채 솟을대문을 열었다. 소실이 떡두꺼비 같은 첫 손인 아들을 안고 노마님께 천신하는 날이다.
댓돌 위 대청마루 중앙에는 이 진사댁 큰어른이신 노마님이 앉으셨고 건넛방에선 이 댁 아씨가 넋 나간 사람처럼 걸어 나와 마루 난간 고운 발 쳐진 옆에 놓인 방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이리 오너라.”
노마님의 말이 떨어지자 얼른 아기를 안아 마루에 올라가 아기를 안겨 드렸다. 이 진사댁 첫 남자아기는 서출에서 먼저 태어났다. 흡족한 표정인 노마님을 바라보는 아씨는 간신히 몸을 세워 지탱하며 일어서려 했으나 사시나무 떨듯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래 뜰에서 보고 있던 집안의 여인들 말에 따르면 바람 한 점도 없이 사방이 모두 조용했는데 대청마루의 난간의 발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단다.
때는 19세기 조선 말엽 이 진사댁 경삿날이었다.
“천신이요!”
숙제를 하고 있던 어린 나는 어머니의 울먹한 목소리에 놀라고, 천신이요가 무슨 뜻인지 몰라 되뇌며 일어나려다 어머니 마음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조선 말기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백성들에게 강제 기부금을 걷기로 했다. 그러자 나라 안 이곳저곳에서 원성이 일고 상소를 올리며 반대하였다. 대원군은 반대 세력들의 일가를 몰살하고 귀양을 보내며 피바람을 일으켰다.
이때 이 진사댁 노마님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부모를 잃은 강씨 양반 댁 13세 어린 규수를 자신이 봉양하는 절에 숨기었다가 후에 민며느리로 데려왔다. 바로 나의 외조모님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마음의 충격은 오래 갔다.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어릴 때 익힌 중국 고서와 불교 경전 등을 읽으며 보냈다. 쓰라린 마음을 노마님과 외할아버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극복하시니 그 후 작은외삼촌, 이모, 그리고 울 어머니가 태어나시어 공허한 마음을 다스리며 상처를 견디어 내셨다.
어머니는 늘 곁에 계시지 않는 외할머니를 그리며 외로움을 참고 견디셨다. 외할머니는 팔십 고개 넘도록 가족의 따뜻한 울타리에서 장수하셨다. 내가 소학교 다닐 때 작은외삼촌댁에 가서 윗목 보료에 근엄한 자세로 그림같이 앉아 계시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었다.
삶이 버거울 때 우리는 눈 속에 핀 매화꽃 설중매(雪中梅)를, 겨울을 이겨내는 풀 인동초(忍冬草)를 떠올리며 비유한다. 갖은 풍상을 견디어 내고 묵묵히 수양하며 견디어 낸 우리 선대 여인에게는 원래 인고(忍苦)의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
늙기는 쉽지만 아름답게 늙기는 어렵다(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 어둠이 걷혀 가는 새벽, 은하수 희미한 빛 따라가며 어머니 흰 치맛자락 잡고 걷던 어린 나의 모습은 아흔 나이에도 각인되어 스스로 몸과 마음 다스리며 생전을 수행하신 조선시대 여인인 선대 외할머니를 기린다. 울 어머니가 뒤뜰 장독에 흰 대접에 정화수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시던 모습이 눈을 감아도 삼삼하게 그림으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