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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박해윤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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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새 학기 초가 되면 학교에는 교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기도 하고 신입 교사가 부임하는 등의 작은 이동이 있곤 한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서로 마음을 열고 친밀하게 지냈던 동료가 자신이 나고 자랐던 고향 근처의 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급작스럽게 이별을 하게 되어 기억에 남을 만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무엇으로 할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그만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학기가 시작하고 정신 없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동료를 그냥 떠나보냈던 일이 문득 떠올라 나는 급히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동료의 근무 학교로 개별 포장 떡 상자를 주문하려는 계획에서였다. 다양한 메뉴가 있었고 배송도 전국 구가 가능했다. 오전 내내 몇 군데 문의하고 동료의 근무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전체 교직원 수를 알아낸 후 주문을 완료했다. 진심을 담은 축하의 메시지까지 첨부한 떡 선물을 받고 동료가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나 자신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주문한 물건이 오후 5시경 배송될 예정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은 것은 다음 날 오전이었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그때쯤이면 교사들의 퇴근 이후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떡이 학교에서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망설이다가‘배송 시간을 한두 시간 앞당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고 상황 설명을 곁들인 정중한 부탁의 글을 기사에게 보냈다. 복잡한 도시가 아니고 군 단위의 지역이므로 가능할 것이라고 가볍게 판단했던 나의 착오는 즉시 날선 단문이 되어 돌아왔다.

‘배송 시간을 고객의 편의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단 한 문장 속에 이렇게 강력한 비난과 질책을 담을 수 있음이 놀라웠다. 순간 잠시 정신이 어질해짐과 동시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곧바로 나는‘사정을 잘 모르고 한 부탁이니 노여워하지 마시고 무시하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는 사과의 글을 보냈다. 동료에게 배송 기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 주고는 물건이 택배 사무실에 도착해 있는지 확인하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직접 찾아오는 등,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처리해 달라는 카톡을 보냈다. 깜짝선물이 본의 아니게도 번거로운 일거리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그날의 모든 일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 내내 언짢은 기분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세상살이에 있어 아직도 어수룩하고 엉성하기만 한 나의 판단 능력과 처신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오전 10시경에 받은 단문 하나가 온종일 정신을 사납게 지배한 하루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언행 중 드러나지 않아서 몰랐거나 이번 일처럼 미처 인식하지 못해서 지나쳐버린 오류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나의 편리나 이익보다는 상대의 처지나 입장을 우선 배려하는 자세로 살았다고 자부해 왔다. 내 삶의 방식 어딘가 크게 잘못된 구석을 지적받고 심한 질책을 당한 듯한 느낌 때문에 급기야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상념이 깊어지는 저녁 무렵, 떡잔치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다고, 동료는 그 학교에서 자신의 위상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는 글과 함께 하트가 가득 찬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문득 택배와 관련된 오래 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식탁 위에 자주 보는 책이나 메모지 등을 꽂아 놓을 만한 미니 책꽂이가 필요했다. 어느 날 인터넷 한 사이트에서 우연히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주문했다. 며칠 후 배송을 알리는 문자를 받았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물건은 도착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배송 문자를 보낸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도 그는 배송이 완료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당황한 그는 배송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해 보고 배송 트럭에서도 다시 찾아본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일주일을 더 기다렸다.‘계속 연락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는 답이 왔다. 그 무렵 나는 물건은 이미 분실되었을 것으로 추측했고 아쉽지만, 포기하는 쪽으로 조금씩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답은 들어야 하겠기에 연락을 기다렸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다가오는 기간이었으므로 택배업계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갈 터였다. 그 와중에 배송 오류와 지연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 짐짓 관대함을 가장한 여유를 가지고 그렇게 10여 일을 더 기다린 후 기사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물건을 포기하겠으니 더 이상 찾으려고 애쓰지 마시라’,‘뒤늦게라도 찾게 되면 잊지 말고 꼭 배송을 부탁드린다’고. 혹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그를 위해 어쭙잖은 나만의 배려를 한 것이었다.

새해를 맞이하고 거의 한 달이 지나가던 1월 말의 어느 날, 작은 택배상자 하나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최근에 주문한 적이 없던 나는 배송지를 확인하고 다소 미심쩍은 심정으로 상자를 개봉했다. 놀랍게도 지난해 11월 주문했던 문제의 그 물건이 급히 적은 듯한 메모가 함께 들었다.

‘배송이 늦어 정말 죄송하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휴대전화 선물하기 기능을 이용해 나는 작은 선물과 감사의 글을 그에게 보냈다. 해피엔딩이었다. 인생의 모든 일이 이렇게 매번 좋은 결말로 끝나지는 않겠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으로 내 삶이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70세를 몇 년 앞둔 내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할 수 있으려면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부단한 성찰과 수행이 필요하겠지만 80세가 되어서도 70세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육체적으로는 쇠잔해 가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수련하여 자아 완성을 향해 가는 정신적 진화의 과정이 아닐까?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칠십 세가 되면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논어, 위정 편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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