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48
0
다다, 쉬르, 아방가르드, 데포르메 다 좋다 이거야. 다만 인간이 묻어나야 한다. 그대의 시는 하루를 수확하는 기쁨과 소망이다. 시가 널리 세상을 보듬고 어루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갈데없이 불우선생이다. 하지만 저 유복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비하면 내 가슴속은 빛나는 르네상스다. 잘 자란 인문학도에 비하면 CEO 퇴물은 갈데 없는 맹수요, 본데없는 악동이다. 저 참월(僭越)한 일탈과 성공을 보라. 아름다운 계절은 시작되었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꽃피는 계절이 거대한 감옥이 되고 말았다. 원색으로 번쩍이는 야만의 나라에서 향기로운 호흡을 하지 못한 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전:12:13) 전도서의 결론이다. 저 부끄러운 취한은 언제쯤이나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한갓지게 살아라. 올곧게 살아라. 李哥여 朴哥여.”그렇게만 한다면 지극히 인간적으로 결심할 수도 있다. “당신을 좋아하는 그 1% 의 국민이 될 것이다.”
화려한 언어의 타락, 말이 피우는 재롱, 번뜩이고 콩콩 튀는 현란한 사설(辭說) 속에 알갱이는 떨려나가고, 끌어 모은 뜨거운 시선 속에서 공허한 언어만 날뛰고 있다. 저들은 풍각쟁이인가, 아르티장(artisan)인가, 독가스 같은 데마고그(demagogue)인가. 기침만 해도 광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지적모험과 허영의 극치는 일종의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이다. 교수라는 칭호만 믿고 허튼소리나 하고 있는 시인을 보고 경멸과 혐오를 느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언어 운운’은 참으로 어설펐다. 야성, 비속, 직설, 투명의 언어를 순치 완화 포용 설득의 언어로 어루만지고 감싸주어야 하는데, 관념 오만 독선만 날뛰고 있다.
참고 달래고 삭이는 데 애를 써야 하는데 정 시인은 너무 덤비고 메시 지만 과신하고 있다. euphony(듣기 좋은 음조) euphoria(희열)의 길항작용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파리로 살러 갔던 黃哥도 허풍선이다. 빛 좋은 raconteur(이야기꾼)일 뿐이다. 걸쭉한 입담과 달변과 요설이 사람의 혼을 앗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거나. 세상은 바야흐로 뼛속까지 본데없는 상놈들의 전성시대다. 오, 광대뼈만 무성한 여류소설가가 마침내 이성과 리얼리티를 버리고 직관과 감성과 낭만의 길로 떠나갔구나. 거리의 여인의 엇구수한 사투리가 웃음을 자아냈다. “당신의 손이 와 이 속에 와가 있어? ”빙허(憑虛)의 고택과 춘원의 산장에 가면 그곳에 아내의 시가 살고 있었다.
마을의 떠도는 풍문은 허영독본이다. 블록버스터(blockbuster)는원래 악질 바람잡이나 사기꾼이다. 이웃에 나쁜 소문 퍼뜨리고 나서 마을을 온통 차지하는 협잡꾼이다. 북촌길이 명당은 명당이다. 옛 친구들은 탄천에서 술만 마시고 이 향기로운 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문학을 죽이는 자는 파르나시앵(parnassien)인가 아르티장인가. 종묘에 가면 신선(神仙)은 죄다 사라져버리고 노추(老醜)들이 숲속을 뒤덮고 있다. 육이오 때 한강철교가 끊어져서 강에 빠져 죽은, 그 구름 같은 다수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천국에 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대륙 인구의 3 분의 1이 흑사병으로 죽었던 14세기의 전설이다. 다수가 맥을 못 추고 떼죽음을 당한 압권이다. 이토록 무기력하고 비참했던 다수가 이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다수가 타락하면 재앙이 닥쳐오는데 누가 그들의 타락을 부추기고 있는가. 시대의 순수요 양심인 시인에게 부탁하고 싶다.“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
강남 꽃길에서도 마음은 늘 먹구름이었다. 창의문길을 걸으면서 걸음마다 기도를 올렸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thes)는 하나님도 낭만 계몽 실존 근본주의를 껴안고 살았다고 푸념했다. 조 목사여 곽 목사여, 저기 쌓인 당신의 저서들은 뜬구름 같은 세상의 퇴적물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하늘에 재물을 쌓지 않고 땅에서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살았다는 증거다. 겟세마네에서 설교한 조 목사에게 아하, 능변 웅변 달변이라고 하면 칭찬일까 비아냥거림일까. 사업은 인간관계다. ‘무관계’ 로 통할 수 있는 데가 예술과 철학이라 해서 문학을 했는데 인연 혹은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비예(睥睨)와 능멸을 일삼고 있구나. 소노 아야코의『계로록(戒老錄)』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이런 말이나 기웃거리고 있는 자신이 언뜻언뜻 서글퍼졌다. 고향하늘에 황혼은 핏빛으로 불타고 있는데 너는 현애살수(懸崖撒手)할 수 있느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지론이다. C’est la vie. 한때나마 무취무색(無臭無色) fluid한 감성과 직관의 집에서 살고 싶다. 스키조(schizo)의진감(震+)은 싫다. 이제부턴 사는 건 덤이다. 한나절의 햇볕과 구름과 바람의 놀이터다. 살아 보니 어느 나이이고 인생은 살만했다. 가릴 것은 가리고 추릴 것은 추려서 좀 더 재밌고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 리얼리티가 아니라 때론 판타지(fantasy)로. 아름다운 것이, 신명 나는 것이 문학의 생명이 아닌가.
미국은 총, 일본은 칼, 한국은 욕. 이 땅에‘왕따’가 극성을 부리는 이유다. 이지메를 당해도 일테면 미국에서는 총 한방이면 끝난다. 도서관 평균 장서현황은 미국 71만권, 일본 27만권, 한국 3800권. 도서관당 인구수는 미국 14000명, 독일 4000명, 한국 254000명. 부자만 되면 뭘 하냐.
어느 때 통계인들 무슨 상관이냐. 아노미(anomie), 레비아탄(leviathan) 다 보인다. 보편성의 위기, 가치의 혼돈, 그 전에 언어가 타락했다. 제목만 발달하고 내용은 화석이 되었다. 언어의 유희와 조락은, 그 빛과 그림자는 죽음의 기척이다. 하지만 내 몫의 천수를 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똑같이 배신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두고 각각 뉘앙스가 다르게 질책했다. 이스라엘은 배역(faithless)하다고 했고 유다는 패역(unfaithful)하다고 했다.(렘:3:11) 배역(背逆)이 은혜를 저버린 정도의 잘못이라면 패역(悖逆)은 인륜에 어긋나는 패륜적 잘못을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유다를 더 믿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심하게 나무랐다. 믿음이 깊으면 그만큼 배신감이 크다고나 할까. 이 땅의 배신자들이여, 제발‘패역한 난신적자’가되지말라. 나의봄은이렇게아방
튀르(aventure)로 점철되고 있었다.
백수풍신(白首風神)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뜨거운 증기 같은 생각들이 개흙을 토해냈다. 또 토악질이다. 문학이 레토릭(rhetoric) 차원이라면 부지런한 인문학도들이 독점해 버렸을 것이다. 21세기의 독자를 향해 글을 쓰지 말라. 문학의 불우함이여. 나는 역사를 위해 책을 남길 것이다.‘유유상종’‘끼리끼리’‘당동벌이(黨同伐異)’, 이 멀쩡한 말들이 왜 천대를 받고 있을까. 위대한 것은 유명한 것과 다르다. 율동공원에서 만난 소설가 조정래는 늘 그의 사단을 이끌고 호숫가를 돌았다.
李箱은 소설을 여의고 그토록 홀로 방황했는데, 고독한 몽상가는 어디로 갔을까. 문단권력자들은 늘 점잖게 정치, 이재, 조직, 명품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그들의 명성은 진실을 가리는 걸개그림이다. 고 시인
이놈, 사시(斜視)로, 맞짱도 뜨지 못하고 슬금슬금 눈치만 보는 비겁한 놈들이다. 늠렬하고 작열한 맛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를 쓰고 있는, 그는 한갓 풍각쟁이나 행사꾼에 불과했다. 그의 문학은 by nature(선천적)가 아니라 by nurture(후천적)이니까.
세종대왕 탄생지에 떡 자리 잡은 와룡식당, 그 앞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정체는 뭘까. 무지렁이, 농투성이, 무룡태의 눈물을 흘렸다. 좀 떨어진 곳에 李箱의 집이 망각 속에 파묻혀 있다. 세월이 흘러가면 다다, 아 방가르드(avant garde) 모두 속절없이 먼지 속에 묻히고 마는구나. 무계정사(武溪精舍) 빙허의 집에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는 온데간데없고 말간 햇살만 가물거리고 있었다. 임의 숨결이 고체향처럼 남아 있을 뿐, 새들이 떠난 숲속은 이제 여우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독자를 들볶는 이문구의 소설은 야유냐 신원(伸寃)이냐. 그의 토속어는 독자를 물리치고 자신을 지키는 전신갑주(全身甲胄)가 되고 말았다. 소설미학은 언감생심이다. 신 시인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죽고 나면 그 어쭙잖은 시들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내 큰딸 같은, 잘 키운 인문학도가 하나 알아주기만 하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 텐데. 아아, <체리나무> 영화는 어디까
지나 쇼윈도다. 우리가 꾸며 놓고 보는 거짓일 뿐이다. 허(虛)나가(假) 일뿐, 실(實)이나 진(眞)이 아니다. 소소한 영화 한 편이 이토록 감동을 주는구나. 나는 왜 해외발 성공한 국산영화에 실망하고 있을까. 임권택 너머로 보이는 김수용 이만희 유현목 신상옥이 그리웠다. 오늘도 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놈의 세상, 얼짱 몸짱이 예능의 한복판에. 이런 놈의 세상, 비만 클리닉 쿡방이 문화의 한복판에. 이런 놈의 세상, 뜻보다 오직 재미만이 일상의 한복판에. 이런 놈의 세상, 노후보험 광고만 TV 화면 한복
판에. 순재야 순재야! 이젠 보험광고에 그만 나와라.”
맑은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방바닥에서 파닥였다. 어린 아이의 눈물처럼 영롱한 햇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오늘을 살아갈 만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먼 산기슭에서 바람꽃이 부옇게 일고 있었다. 내일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올 것인가.
여름인가 가을인가. 계절의 경계가 사라져버렸다. 추석연휴에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떠났고 거리에는 나의 그림자만 남아 있다. 불효는 배덕보다 외로움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글은 생각의 고임, 삭
힘, 되새김인데 이렇게 쏟아내서야 무슨 맛이 있겠는가. 내가 쓰는‘촌놈’이란 한(恨)의 원공간 체험을 멸시하는 말이다. 이념의 허구에 놀아나는 허깨비다. 이 가을에는 본심에 있는 말만 기도하게 해주소서. 인생은 견문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는 것, 죽음은 홀로 겪을 뿐 아무도 모른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는성경에도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늙음의 특징은 세월에 기약이 없다는 것이다. 쫙 펴진 얼굴 같은 스무드한 내일이 없다. 백수풍진(白首風塵) 속에서 시간은 ‘허들’같다. 부모에게 나는 무엇이었는가. ‘고르반(corban)’이나 지껄 여댔던 천둥벌거숭이였다.
프루스트를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은 정음사 최해영 사장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잖음 어디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만날수있었겠는가. 김현도 김치수도 황현산도 모두 떠나버린 세상에 어쩔 뻔했는 가. 울 아버지 추억도 그랬다. 가을밤을 달아오르게 했던 당신의 삼국지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아아, 세상살이‘다노시미’가 최고다.”
갓방에서 밤늦도록 들려주시던『삼국지연의』는 참으로 회심의 구연이었다. 아버지는 동아일보 신문소설의 스크랩도 남겼다. 그 신문스크랩을 통해 나는“벌건 미친개의 눈으로 피아간에 살육을 일삼았던 여순 반란사건”의 현장도 볼 수 있었다.
분석과 몰입은 종종 핵심을 놓친다. 작가의 직관과 감성이 빛나는 이유다.“관념 파괴적이며 해사(解辭)적이다”오규원의 시를 두고 김현이 한 말이다. 시는 애오라지 직관과 영감의 영역인데 논리와 지식을 가지고 너무 설쳐댔다. 교조, 원리, 관념의 틈새에 놓여 있는, 일테면 완충지대인데, 詩여, 진종일 숨 가쁜 메시지만 띄우고 있구나. 불행한 인적 환경에서 앙뉘(ennui)만 괴어올랐다. 재사와 재원(才媛)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학단체의 감투라는 것은 곧잘 작품으론 승산이 없는 사람들이 밟고 높이 올라가는 사닥다리다. 金哥나 李哥는 참 많이 올라갔다.
그들에게 노력의 흔적은 보이는데 천분은 보이지 않은 걸 어쩔 것인가.
벽에 붙여놓은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읽으면서 잠시 묵상했다. 부국 강병, 국운융성, 경제성장이 인권을 제물로 삼지 말라. 수상작품이 저런 정도라면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내 소설은 불후의 전설이다. 너희는 아직도 콩콩 튀는 것만 취하고 있느냐. 점잖음, 선량함, 아름다움을 걷어차고 잘난 척하지 말라. 허울 좋은 주의나 이념을 내세워 아는 척하지 하지 말라. 국경과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다. 모국어를 한사코 갈고 닦아서 아름답게 빛내리라. “세련된 가문에서 이만큼 일류로 살고 있는 걸 부모에게 감사해라.”친일파가 유언하는 소리가 여전히 귀에 쟁쟁하다. “떵떵거리고 잘 살면 그만 아니냐.”
그들은 계속 큰소리를 쳤다. “친일파 후손은 번성하고 독립군 자손은 기층민으로 전락했다”는 말도 이젠 그만했으면 좋겠다.
먼 산엔 거짓이 많지만 우리는 먼 산에서 산의 모습을 본다. IT는 정신과 반비례한다. 창의적 삶을 살기 위해 되도록 멀리 해야 한다. 저리 강경대응 하라고 날뛰고 있지만 전쟁 나면 제일 먼저 줄행랑칠 사람들
이다. 육이오가 터지자 한강다리를 끊어놓고 도주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잘 알고 있다. 평화적인 대화가‘민족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란 걸 잘 알면서도 걸핏하면 극우세력을 동원하여 악귀 같은 전쟁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옳지 못한 다수가 행악하면 재앙이다. 다수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오만한 권력의 가학심리다. 끊임없이 ochlocracy(愚民, 暴民)를 채찍질을 해야 한다. 함석헌 옹의 외침소리가
들려온다.“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산책길에서 내가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까닭은 풍경이 카메라 속에 갇혀 버리고, 카메라 속에 담겨진 모습과 기억을 좋아할 뿐 어쩐지 자연을 놓쳐버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연 앞에서 보이지 않는 칸을 만들고 담을 쌓고 있는 듯한 느낌이 싫었다. 자연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듯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동쳤다. 멀찍이, 자연이 좀 무심히 나와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나는 좋다. 수명(壽命)에대한 내 생각이 어린 아이처럼 단순해졌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미래밖에 없던 시절이 다 가고 과거밖에 없는 세월을 살고 있다. 미래가 없는 시절이 얼마나 암담하고 쓸쓸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모든 게 깃털만큼의 무게도 없는 한순간의 환상처럼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렸다.
양명(揚名)보다 자재(自適)를 택한 이유다. 하이브리드와 ollapodrida처럼 잡탕인 신앙을 놓고 선택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비방했다. 전지적 시점으로 가치를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재미는 끼가 주고 감동은
재능이 준다. 재능은 하늘이 내려 주는 천분이다. 요령과 끼만 있고 재능이 없다. 패러디가 판을 치는 이유다.
보수가 제일의(第一義)로 삼는 것은 국가, 민족, 부국, 강병, 번영, 영광이다. 진보가 제일의로 치는 것은 인간, 개인, 인권, 평등, 정의, 복지다. 민주화과정에서 종종 보수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행악한 사람들
의 지성소(sanctuary)나 도피처(asylum)로 전락해 버렸다. 반민주, 반민족의 죄인이 그 우산 아래로 들어가서 훌륭한 애국자로 둔갑해 버리기 일쑤다. 그들을 온전하게 치유하고, 재생 재활시켜야 할 국가권력이 그들을 더욱 광포한 정권의 홍위병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땅의 보수의 집에는 그런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젠“아이번 에클리시아 인 마이 하트(I’ve an ecclesia in my heart).” 이딴 말은 하지 말자. 내 마음속에 있는 교회를 백번 말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혼자 내상(內傷)을 치료하면서 살자. 아니다, 그럴 수 는 없다. 내가 무념무상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지만 머릿속은 항상 소음으로 왁자지껄 차있다. 흐름의 개념으로 시작과 끝은 잊어버리자. 빛나는 인문학도여,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가 없구나. 이 시대 화초 명사들이여, 그대의 정의는 무늬요 포니(phony)일 뿐이다. 연달아 눅:22:44. 요:8:12, 막:13:33을 읽었다.
지금은 오늘이 노루꼬리만큼 남아있는 시각이다. 한데 이 무슨 횡재인가. 머릿속에 갑자기 질펀한 백짓장이 펼쳐지고 의식이 금화처럼 초롱초롱해졌다. 톡톡 튀는 감각으로 느낌과 생각을 패대기치고 싶다.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언어로 막치(daub)를 그리고 싶다. 뜻밖의 아포리즘(aphorism)과 에피그램(epigram)이 몰려와서 소리쳤다. 환 혹은 막치는 일종의 데포르메(deformer)다. 똘레랑스도 좋고 중용도 좋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마구 소리치고 싶다. 소리치는 대로 적어보았다.
달빛의 기척과 이슬이 내리는 소리 말고는 사방이 죽은 듯이 조용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경으로 세 번이나 제자들 있는 곳으로 와 보았으나 그들은 모두 잠에 떨어져 있었다. 그 소외감 그 외로움, 바
로 예수의 고뇌였다. 저 농염한 sexy 댄싱을 보라. 그것도 군무다. 예술은 개성이 생명인데 저 군무 속 어디에서 개성을 찾을 것인가. 때론 집단교예가 연상되어서 소름이 끼쳤다. 노래가 춤에 깔려 죽어갔다. 그림같이, 고즈넉이 서서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다. Woe to dance music.
공부는 혼자 할 때 가장 독창적이고 경쟁력이 있다. 남에게 배우면 다소 효율적이고 진도가 좀 빠를 뿐이다. 남에게 배워서는 유클리드는 될 수 있어도 셰익스피어는 될 수 없다. “할리우드영화는 phony다.”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하던 내 친구 Dave가 45년 전에 한 말이다. 소설이나 드라마는 허구지만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픽션과 리얼리티를 혼동하지 말라. 드라마의 사회적 책임은 허구 속에서 진실을 찾아주는 것이다. 시가 쉽다는 것은 좋은 덕목이 아니다. 어렵다, 난해한 것이 당연하다. 며칠 밤 뜬눈으로, 아니 몇 달을 생각하고 생각하여 써놓은 글이, 그 시가 어찌 꼭 쉽기만 하겠는가. 인내 각고(刻苦) 탁마(琢磨), 바로 시다. 1미터 깊이 구멍 속에 있는 공을 50cm 길이의 막대기로 꺼내려다가 안 되니까 공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시와 소설의 비유에서 특히 보조관념을 vehicle(탈것)이라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교에서 중생을 구원하는 것, nirvana(열반)로 데려가는 승(乘)도 소승 대승이란 말을 쓰고 있지 않은가.
고전은 인내다. 읽기가 쉽지 않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마치 단단하고 질긴 음식과 같다. 오래 씹어야 맛이 나고 때론 이가 아프도록 깨물어야 한다. 고전을 읽으면서 내가 배우고 익힌 것은 인내였다. 고
전은 완상(玩賞)하는 골동품이다. “도시를 디자인하고 있다”문화와 전통이 배어들고 쌓여야지, 도시를 유리제품처럼 디자인을 하다니, 영혼이 없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문득 안중근 의사를 두고 소설가 김승옥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어떤 의미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여자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 시인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다. 시인은 청백하고 견개한 선비 같았다. 하객 중에는 그 흔한 문인들도 잘 눈에 띄지 않았다. 한승헌 변호사가 주례를 맡았는데 왜소하고 깡마른 체구
였지만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그의 주례사는 빛나는 인생독본이었다. 식이 끝나고 나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인사를 주고받으며 대화도 나눴다. 결혼식은 경건하고 소박했다. 축가를 부르는 신랑 친구가 신랑 어머니에게 꽃 한 송이를 전할 땐 가슴이 뭉클했다. 두어 시간 뒤에 다른 시인의 아들 결혼식에 갔다. 서울대호암회관에서 열린 결혼식은 완전히 북새통이었다.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어쩌면 같은 시인의 결혼식인데 그 분위기가 이렇게 판이할까. 단연 첫 번째 결혼식이 감동적이었다. 두 번째 결혼식장에서는 신랑 아버지의 화려한 시집(詩集) 장정과 서울대학교 교수 직함만 떠올랐다.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하는 시인마저도 어쩐지 생뚱맞고 데면데면하게 느껴져서 그냥 자리를 떠버렸다. 남북회담이 물꼬를 트자 국민의 감성을 건드리는 이야기들이 떴다. ‘DMZ 안의 어머니 산소에 죽기 전에 가볼 수 없을까’나는 철새들이 몰리고 있는 내 고향 순천만에 가고 싶다. 나여 나여, 평생 타향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당신은 무엇으로 후세에 남을 것인가. 횡보(橫步) 혹은 게걸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설을 쓰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잠꼬대 같은 소리라도 하지 않으면견뎌배길수가없었다. 「파파노인(皤皤老人)의 섬어집」은 이렇게 태 어났다. 어딘가 막혀 있고 악혈이 맺혀 있고, 무궁무진한 술(術
)과사 (詐)와 악이 숨어서 준동하고 있는 나라, 중국이 그랬다. 요컨대 시노 (Sino)는 막히고 끊긴 데가 너무 많다. 민주주의가 자취를 감추고, 인권을 비롯해 짓밟히는 것이 너무 많은 나라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넓은 바다를 표류하고 깊은 숲속을 헤맸다. 세계문학전집은 바다였고 한국문학전집은 숲속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좋은 글을 느꼈고, 감동을 받았고 문체를 체득했다. 그 시절 문학수업
은 그랬다. 오늘날은 작품 몇 개를 샘플로 떼어내어 찢고 발기고 부수고 붙이고 맞추고 별짓을 다하면서‘좋다는 것’만 가르친다. 학생들은 좋다고 하니까 좋아하게 되고 좋은 것만 배운다. 문학교육은 작품에 대 한 편견과 선입견만 길러주었다. 이리하여 문체는 사라져버렸다. 어느 문학모임에서 내가 했던 작가의 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작가로서‘성공하는 조건’으로 6P를 들었다. 6P는 각각 prodigy, pioneer, patron, phony, parody, pedantry에서 따온 이니셜을 가리키는 것이다.
prodigy, pioneer, patron는 반드시 갖춰야 할 바람직한 것이고 phony, parody, pedantry는 삼가야 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딱 한 가지, 나의 경우엔 patron이 없어서 늘 고달팠다. 그리고‘과연 나에게
prodigy(비범한 재능)가 있을까’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골드하겐의『히틀러를 따른 처형자들』, 실반의『유태인 학살에 대한 사회학적분석』을 읽었다. 미친 독재자 뒤에는 어김없이 미친 국민이 있었다.
나쁜 국민(mob, ochlos)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이념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유는 늘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한다. 한국은 ‘사교육 천국’이요 빛나는‘일류의 나라’이다. 그 무성한 사교육과 일류대교육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생은 유클리드 기하학은 증명할 수는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같은 작품을 창작할 수는 없다. 우리 교육이 빠져 있는 함정이요 수렁이다.
꽃을 사러 아내와 구파발 꽃시장을 찾아갔는데 그곳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있는 것은 북한산밖에 없었다. 굽이굽이에서 만났던 풍물과 정취는, 그 옛날의 아기자기했던 삶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꽃시장도 온데간데없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아파트밀림 너머로 북한산만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이단(heresy)이라는 말에는 원래‘선택’의 뜻도 포함돼 있다. 기독교처럼 선택해야 할 기로가 많은 종교는 없다. 이단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장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었다. 한 자락을 깔고 사람을 보지 말
라. 그 한 자락이 바로 상대방을 깔보는 오만이다. 분노와 증오심이 끓어오를 때마다 떠올리는‘말씀’이있다.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정의를 베풀 것이다.”(사:42:1∼3) 이로써“비록 비판하고 분노하고 질책할지라도, 증오하고 저주하고 박해하지는 말라”는 교훈으로 삼았다. 젊었을 때 사랑, 낭만, 열정, 환락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 때마다 입버릇 처럼 뇌까리는 말이 있었다. 낙이불음(樂而不淫)“즐기기는 하되 지나치게 탐닉하지 말라.”시절이 하 어수선해서 요즘 부쩍 이 말을 심장을 향해 자주 던지고 있다. 베란다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깊은 물속 같았다.
국화 제라늄 베고니아, 가을꽃 향기가 진동했다. 지고지순한 순간이었다.
오늘도 구약의 스물한 번째인 전도서를 영어로‘Ecclesiastes’라고 거뜬히 댈 수 있었다. 어려워서 애를 먹고 있는 것은 여전했다. 제목뿐만 아니라 내용도 그랬다. 특히 나를 실망시킨 것은“아들아, 한 가지 당부 할말이있다. 책을쓰는것은끝이없고너무책에빠지면몸에해롭다”라는 대목이었다.(전:12:12) 그러나 나는 오늘도 해질녘까지 전도서를 읽었다. 말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특히 노후에 행복
한 삶의 비결이다. 때때로 인간은 말하기 위해,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많은 이런저런 토론회에 나온 인사들을 보고 마음이 심란한 것은 웬일일까. 나이 들면 관록이나 유세하면서 벌이는 자리마다 자기를 챙겨 넣어달라고 볼썽사납게 투정이나 부리는 화초부인(花草夫人)이, 화초명사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고은 시인을 보고 생각했다. “예술이 devilism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의『바람의 사상』을 즐겨 읽었다. 그의 시의 태반은 주정(酒精) 속에서 태란습화(胎卵濕化)인가?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 견뎌낸 것이 그의 문학보다 더 위대하다. 매일같이 장주(長酒), 대취, 고주망태다. 이문구송기숙 이시영, 창비 쪽 주당들 똘마니들을 몽땅 데리고 술타령을 했다. 가끔 PP에게 독설 저주 비방이나 쏟아내고 시대의 우울을 양심처럼? 뿌리면서 악마의 주신(酒神)을 만났던, bacchanalian의 그 발칙하고 오만불손한 은유를 고스란히 기록해 놓았다. 조용기 목사를 보고 생각했다.“종교가 cultism으로 가서는 안 된다.”어찌 그리 치기만만하고 허술하냐. 안 돼, 안 돼. 간밤에 써놓은『풍경 속에 사는 법』을 읽어보고 깊이 탄식했다. 스탕달의 유서가 생각났을 때, 내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왜 스탕달을 읽기 시작했는지, 그를 만나게 된 사연을 새삼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동병상련 때문이었다. 1842년 5월 파리 어느 거리에서 그가 졸도했을 때 그의 포켓에서 발견된 유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나는 100년 후에야 유명해질 것이다’그의 유서대로 그는 사후 100년이 지나자 단 두 편의 소설로써 발자크가 100여 편의 소설로써 얻은 것과 맞먹을 만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세기를 뛰어넘어 현대독자들의 영혼에까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불가지론자가 되어갔다. 분명히 뭔가가 있는데 자꾸만 기력이 쇠퇴하여 그 뭔가를 모르겠다. 영어로 Gnosticism(靈知主義) 반대말이 agnosticism(불가지론)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안락한 삶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뜬금없이 역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를 실망시킨 등신(等神) 들이 좀 많았는가. 불법적으로 말뚝을 박는 것은 법치이고, 말뚝을 뽑는 것은 불법이다? ‘선동적 포퓰리즘과 떼법촛불시위’한국법률가대회에서 대법원장이 한 축사다. “먹을 것만 주면 혼자 잘 놀고 있는 아이.” 이 시대의 앞자리(fore)를 차지하고 있는 저 빛나는 율사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이 엎어지든지 거꾸로 가든지 그들은 개의치 않고 제 지분과 명성만 유지할 수 있으면 소리 없이 잘 놀고 있다. 일테면 양심과 의식을 거세해야 가능한 믿음 같은 것, ‘정신적 환관(宦官)들의 종교’바로 이 시대 기득권자들의 종교가 그런 것이다.
‘보수와 진보 단색구도로 색칠하기’단순화 속에 다양화와 정체성은 실종되었다. 단순화된 보수와 진보의 우산 속으로 숨어들어서 부도덕한전비(前非)와 본색을 감추고 있는 배신자들을 찾아서 축출해야 한다.
그것은 시대정신과 양심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책무다. 독재자는 통치에 실패하고 국민의 지지를 잃으면 자신의 보루와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성난 파도 위에서 구명보트를 찾듯이 분열을 조장하고, 편을 가르고 지분 챙기기를 일삼는다. 두 국민정치, 분열마케팅이란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국민을 위한 정부라 할 수 있겠는가.
붉은달 십일월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죽음으로 정죄(定罪)한 많은 사람들이 사슬에 묶인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일부는 사람들이 보는 데서 매일 죽임을 당하고 남은 사람
들은 공포와 절망 속에서 그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이렇듯 인간에 대해 황폐한 묘사를 한 파스칼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저토록 갑자기 얼굴에 평화와 기쁨이 넘치고 있으니 웬일일까. 그 비밀은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코트 안쪽에 꿰매어진 채 발견된 종이쪽지에서 밝혀졌다. 그 쪽지엔“은혜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성 클레멘트의 축일. 불(火),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만났다. 확신, 기쁨, 평화”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십일월 성 클레멘트 축일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 회심(conversion)한 것이다.
클라멘토는“철학은 헬라인의 정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주는 교사로서 그리스인들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터툴리안이 클라멘토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했다.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토아주의적이고 플라톤주의적인 혼합물로 된 잡종(雜種)기독교를 만들어 내려는 모든 시도들을 없애라.”터툴리안. 두 사람의 주장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나여 나여, 어설픈 인문학도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릴없이“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입니다”라는 루터의 말을 되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녹여서 비단결 같은 글을 써내야 하는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친 말들, 역동적인 언어를 보고 왜 도올이 생각날까. 미당의 도제들이『동천화사집』을 냈을 때「자화상」「푸르른 날」「국화 옆에서」
「귀촉도」사자주의(師資主義)는 빛났지만 그림자 속에 보이는 것은 독창성과 개성의 무덤뿐이었다. 바야흐로 정치교수의 전성시대다. 논객이냐 세객이냐. 여론의 허망함을 알까. 침묵하는 국민의 선택을 알까.
정치공작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말라. 권력자에게 달려가서 애걸하고 매달리고, 저 철부지 같은 처신들을 보라.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정치무상,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깨달을 것인가. 아버지의 흔적을, 윤척없 이살지않은그의수택(手澤)을 보라. 한줄기 맑은 바람, 한 움큼의 햇살처럼 살았다. 김향안 부부를 향한 정체모를 적개심은 李箱에 대한 짝사랑 때문일까? 아내와 동네에 있는 김환기 화랑에 갔다가 그냥 돌아 오고 말았다. Degas의 실명과 그의 조각이 떠올랐다. 드가는 울부짖고 있었다.“지금 나의 시력이 나를 떠나고 있다. 나는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공예를 해야 한다.”아아, 천재여.
대통령의 도덕성을 다른 능력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설문하는 것 은 잘못이다. “도덕성이냐 경제회복 능력이냐”도덕성을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능력으로 생각하지 말라. 도덕성은 절대적인 것, 대통령 그
자체다. 진실은 어김없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숨이 턱턱 막혀서 심약한 사람은 기사도 제대로 읽지 못할 것 같다. 신문지에 손이 베고 심장이 찔릴 것 같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몽둥이로 세 번 맞았고 돌로 한번 맞았고 세 번 파선하여 하루 밤낮을 바다에서 표류했고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만났다. 부득불 내가 자랑할진대 내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하기 때문이니라.”바울을 털끝만큼만 닮았어도 그깟 신문기사를 보고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속에서 곧잘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그러느라고 내 몸의 산소를 모두 소비해 버리기 일쑤다. 이 모든 것이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하고 순수한 정신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걸 뼈저리게 느꼈다. 철학은, 이성적 사유는 늘 나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코앞의 기회를 놓치게 했다. 난쟁이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때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너는 거인의 어깨 위에 있는 난쟁이다. 그러므로 거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내 분노와 절규가, 그 좌절과 탄식이 죽어가는 의식과 총기에 뜨거운 생명을 불어넣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렇다.
“거인을 올라타고 호령하는 난쟁이여, 이제 너는 결코 작은 거인이 아니다. 인류의 빛을 위해 약진하라.”
벼락 치는 소리에 나는 잠이 깼다. 시간은 새벽으로 줄달음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