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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를 하며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미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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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묵묵히 말없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다는 것. 마음에 상처를 가두어 숙성, 발효 과정을 거쳐 그 앙금을 쌓아놓는 일. 그리하여 어두운 터널을 자박자박 걸어 어둠을 헤쳐 나올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일이다.
빛 바랜 어둠이 내려오는 듯한 눅눅한 벽지가 눈에 거슬린다. 오늘은 기어이 도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배나 페인트칠이나 할 수 있는 것들을 손수 해온 탓에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벽지를 재단하고 풀을 발라 벽에 붙이는 이 작업을 하는 중에는 고통이 멈추듯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으므로 천태만상의 고민거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면 큰방, 작은방, 헛간에 붙은 골방까지 방마다 두 짝씩 문짝을 떼내어 창호지를 새로 발랐다. 물을 흠뻑 뿌려서 해묵은 종이가 불어나도 문살 사이에 달라붙어 있는 창호지를 제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에 곱은 손으로 문종이를 떼어내면 아버지께서는 묽게 쑤어진 밀가루 풀을 두어 번 칠하고 네 귀퉁이를 맞추어 반듯하게 창호지를 붙이셨다. 따스한 햇살에 비스듬히 누운 문짝들은 탱탱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일 년을 거뜬히 버텨주었다. 새 식구를 들일 때이면 도배를 시작했다. 벽지야 그런대로 바른다지만, 천장을 바를 때면 풀 바른 벽지를 식구 수대로 머리에 이고 일렬로 서서 법석을 떨곤 했다. 요즘이야 전문적인 도배사가 혼자 와서도 척척 해낼 일을 아마추어 초보자들이 오합지졸 모여 수선스럽기만 했다. 풀칠 당번에, 풀비나 들고 서 있던 허드렛일부터 자르고, 바르고, 붙이는 방법을 저절로 전수받게 된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먼저 낡은 벽지를 뜯어내니 회색빛 시멘트벽이 민낯을 드러낸다.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맵시가 나려면 초배지를 잘 붙여야 한다. 울퉁불퉁한 굴곡들과 습기도 막아주며 정배지와의 접착력도 좋아지게 하는 것이 초배지의 역할이다. 굴곡진 면에 초배지를 발라 겉면을 반듯하게 밑작업을 마쳐야 비로소 정배지가 발라지는 것이다. 초배지의 역할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삶과 닮아 있었다. 시멘트 덩어리의 차가운 벽을 맨몸으로 막아내듯이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진 풍파를 막아서며 초석을 깔아주신다. 고르고 다듬어 꽃길만 걷게 하고픈 심정이리라. 하지만 정배지만 던져주시는 아버지 덕택에 그리움을 가슴에 달고 내 인생은 날것 그대로와 맞서야만 했다. 초배지가 없는 삶은 실패를 덮어두기는커녕 조그만 상처가 나도 맨살이 도드라져서 아픔으로 펄럭이곤 했다.
벽지의 질감과 패턴은 최대한 단순하게 선택한다. 채도만 다른 세 가지 컬러의 벽지를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한다. 현관 출입구나 손때가 타는 곳은 톤 다운된 색을 사용하고, 묽게 쑨 풀을 흠뻑 먹여 잠시 시간을 두고 시공해야 한다. 초배지 대신 본드를 바른 부직포 위에 실크벽지를 올리는 시공은 하지 않는다.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하나 특수 가공된 PVC 재질인데다 접착제인 본드도 달갑지 않다. 친환경적인 종이 벽지가 알러지나 민감한 피부에 적합하며, 무엇보다 정겹고 편안하다. 천장 시공에는 벽지보다 가볍고 얇은 전용 천장지를 쓴다. 천장부터 붙이기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가며 붙인다. 차분하고 꼼꼼하게, 그러나 신속히 작업하도록 한다.
이제 풀칠을 시작한다. 맨 처음 붙이는 속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자리를 지키는 초배지를 단단히 붙여야 한다. 미움, 그리움, 번민들, 버려야 할 감정의 찌꺼기들을 풀비로 쓰윽 문질러서 초배지 뒷면에 바른다. 벽과 벽지 사이의 공간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응축되도록 도배용 브러시로 눌러 밀착시키고 눈물 한 방울로 봉인한다. 서러움에 찌든 내 못난 마음이 빠져 나오지 않기를, 그대로 머물러 감정 노동의 소모전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기를, 넘어지고 깨어져도 맨살이 드러나 상처가 실패로 다가서지 않기를. 고귀한 사람이고 싶다. 앙금 없는 순수한 결정체이고 싶다. 아니, 나는 이미 고귀한 사람이니까.
우마 사다리에 올라 거침없이 천장지를 바른다. 시간이 지체되면 풀 먹은 천장지는 아래로 처져 내리면서 접착력을 잃을 것이다. 무거운 것들을 가볍게 비워 내어야만 세상과 밀착해 살아갈 수 있음을 알고 있는 듯, 얇은 천장지가 수월하게 올라붙는다. 이음새 부분을 잘 맞춰야 깔끔하게 보인다. 벽지도 중심선을 잘 맞추어 붙여 나가니 신들린 듯이 속도가 붙는다. 초심을 잃지 않고 중심을 지켜 직진만 했더라면 전문직 하나쯤은 완장처럼 달고 살았을까? 묵은 앙금을 빼어내듯 기포 부분이 없도록 정배솔로 쓸어 내린다. 건조 과정에서 생긴 주름진 벽지는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펴질 것이니 마음에 두지 않는다. 기다림은 제자리를 찾는 일이다. 기다림으로써 일탈을 꿈꾸던 일상이 차분해지고 고요가 찾아올 것이다. 꼼꼼히 작업하여 미세한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문틀, 창틀, 경계선의 몰딩 부분에 남아 있는 너절한 여유 분의 정배지는 도배용 칼로 재빨리 잘라낸다. 치렁치렁 달고 살았던 너저분한 감정들도 마음이 상하기 전에 잘라내야만 한다. 모서리나 이음새 부분도 풀 자국이 마르기 전에 젖은 수건으로 닦아낸다. 벽지가 잘 마를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 공기를 순환시킨다. 숨통이 트여야 참고 견뎌내는 것도 가능한 일인 것이다.
창문을 열자 이제 가을이 온 것을 알았다. 냄새가 난다. 대답 없던 당신은 가을 바람으로 다가와 나를 적시고 있었다. 날것의 삶을 주셨지만 견디어 내는 내성도 함께 주신 당신. 초배지보다 더한 주단이라도 깔아주고픈 그 마음을 이제는 헤아린다. 황량한 벌판에 서서 외로움으로 더 가혹했을 당신. 그 처지가 아픔으로 다가선다. 나만의 무늬를 입히고 나만의 색을 더하며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이 작업은 온전한 내 모습을 찾아가는 고단한 과정일 것이다.
칙칙한 방 안, 우울한 마음을 다 걷어내고 나니 오늘 밤 풀잎 같은 싱그러움으로 달디단 꿈을 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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