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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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운의 풍경 소리에 암자 경내 분위기는 한층 경건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산사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새해를 맞은 갑진년(甲辰年) 첫날 아침. 강원도 홍천군 첩첩산중, 사방이 산마루에 둘러막혀 파아란 하늘만 빼꼼이 쳐다보일 뿐, 매서운 칼바람도 숨죽인 듯 적막감이 감돈다. 눈보라가 몰고 온 강추위에 기온은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졌고, 며칠간 쏟아진 폭설로 주변은 백설애애(白雪皚皚)하다.
요사채 황토방에서 사시예불(巳時禮佛) 의식 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그 시각, 두 아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새해가 되시길 빕니다.”
새해 인사 전화다.
“오냐, 아들. 새해도 건강하고 좋은 일만 있길 바란다.”
묵직한 톤의 아들들 전화를 건네받은 아내는 만면에 웃음 가득, “복 많이 받고 건강해라.” 훈훈한 덕담을 건넨 뒤에도 건강, 건강을 되풀이 강조하며 전화가 길어진다.
“아버님, 어머님,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워킹맘으로 회사에서 중책을 맡아 연말 정신없이 바빴던 며느리의 전화다. 이어, 모처럼 어미 애비가 출근하지 않아 기분이 좋을 대로 좋아진 손녀의 전화가 걸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하세요. 그런데 이제 저 일곱 살이에요, 일곱 살….”
일곱 살을 소리 높여 외친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이렇게 좋다니.
“축하한다, 일곱 살…. 사랑한다, 우리 손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다오.”
자립한 아들들은 설에는 부모 곁에 와 함께 명절을 쇠지만, 신년 새해에는 전화로 덕담을 나누며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이날 아침, 아들들은 우리 부부가 산사에서 전화를 받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잠시 뒤, 서울서 공직을 마치고 귀향해 10여 년 넘게 고향을 지키는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이어 서울과 부산의 친척 조카들, 춘천의 친척 동생, 옛 직장 후배로부터 새해 인사 전화를 받았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나에게 결코 편안할 수 없는 사찰 요사채 좁은 방에서 받은 이들의 전화는 커다란 위로요, 격려였다. 특히 아들과 며느리, 손녀와의 통화 때 우리 부부는 무한한 행복감에 빠져들었고, 이날 아침 체험한 이 행복감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은 감회였다.
아내와 산사를 찾게 된 건 갑작스러운 나의 어지럼증으로 보행도 스틱에 의지하게 되자 신경이 예민해져, 며칠간이라도 휴식을 취해 보려는 의중이었다. 평소 자신만만하던 건강을 갑자기 잃게 되자 한순간 체내로 고독감이 비집고 들어온 듯, 고도(孤島)에 혼자 남은 기분이었다.
이 상황에서 받은 새해 아침, 아들, 며느리, 손녀, 동생들과 조카들의 전화는 나의 행복감을 한층 자극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게 됐다. 존경과 애정 가득 담아 전화를 걸어 주는 건강한 자식들이 있고, 동생들이 있고, 조카들이 있고, 후배들이 있는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서로 사랑하고 화목한 우리 가정은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사실을. 나야말로 행복한 존재임을 확인했다.
얼마 전에 읽은 원로 학자 김형석(金亨錫)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떠올랐다.
“여생은 남이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도움 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글로, 강연으로 많은 사람을 행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원로 학자에 견주어, 망팔(望八)의 나이에 지식도 식견도 부족하고 명성도 업적도 없음은 물론, 뭐 하나 성취하지 못한 나로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라 피식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내가 받은 새해 덕담 전화로,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따뜻한 정이 우러나고, 진솔한 마음을 전화로 전하며 소통하고, 행복을 선물하자.
누군가 행복해지는 데 내가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고, 그래서 나 역시 행복해질 수 있음을 확인한 그날 아침, 조용한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하고 또 절하며, 방하착(放下着)의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행복 나누기를 다짐했다.
누군가에게 전화 한 통 하는 데 너무나 인색한 세태. 지치고 힘겨운 현실 앞에 지난날을 회상하며 외로움만 쌓아 가는 이들. 이국땅으로 이민 가 고국을 그리워하는 친구와 친지들. 자식들은 성장해 둥지를 떠났고, 생의 반려자도 먼 나라로 먼저 보내 삶의 궤적이 흐트러진 친구들. 나이 들면서 건강을 잃은 어른들. 모두 전화 한 통이 그립고 소통에 목마른지 모른다.
사찰에서 귀가한 뒤, 치료 끝에 어지럼증이 호전되면서 지난 한 해 주위 많은 분들을 향해 전화 번호판을 눌렀다.
자주 연락드리지 못했던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외숙모님과 구순을 훌쩍 넘기신 이모님. 소멸해 가는 고향 마을을 지키시는 망백의 어르신. 50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간 팔순의 친척 누님.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함께 고생한 조강지처를 여윈 친구. 언론사에 근무하며 동고동락했으나 몸이 불편해진 선배를 비롯해, 친인척 어른들, 학교 선후배들, 고향 친구들, 직장의 선후배들, 지난날을 공유한 인연 있는 많은 분들과 소통하기 위해 줄곧 노력한 1년이었다.
안부를 묻고, 건강을 걱정하고, 슬픔을 위로하고, 경사는 축하하며, 계절과 자연을 노래하고, 때론 풍월을 읊었다. 예술과 철학을 논하기도 하고, 음식과 술을 품평하며, 좋은 정보를 주고받는 행복한 통화 시간을 가졌다. 말이나 주고받는 문자에 정성을 담고 사랑을 실어 마음을 전했다. 그것이 ‘행복 나눔’이라 확신하면서….
필자가 즐겨 사용하는 말 중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말이 있다. 불교 『잡보장경(雜寶藏經)』이라는 경전(經典)에 나오는 말로, ‘가진 재물이 없어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라는 의미다. 이 일곱 가지 보시(布施) 중 언사시(言辭施)는 정겨운 사랑의 말과 격려, 위로, 칭찬 등 아름다운 말로 베풀 수 있다는 뜻이다. 전화로도 쉽게 할 수 있는 보시이다.
보시의 실천. 이는 곧 불교 최고의 덕목인 자비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수많은 인류 지도자가 정의하고 언급하며, 숱한 담론이 쏟아져 오히려 의미가 헷갈리는 ‘행복’이라는 단어. 누가 뭐래도 ‘행복’은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데 전화 한 통화로 도움을 주고, 나도 행복해진다면? 한 번의 전화로 가난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 한 통의 전화는 아주 ‘위대한 창조적 행위’라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