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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의 추억 - 사랑한다는 말도 연습이 필요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종섭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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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시골 부잣집 10남매 중 넷째딸로 태어났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중매로 산골 마을로 시집을 갔다. 당시 남편은 스물다섯. 그때가 1947년으로 6·25를 3년 앞둔 시점이었다. 시댁은 시부모 두 분과 시누이 둘, 시동생 둘과 조카들까지 있는 대가족이었다. 결혼 다음 날부터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빨래를 했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빨래는 더운물에 손을 녹여 가며 빨랫방망이로 두드려 빨아야 했다. 허리 한 번 펴고 쉴 날이 없었다. 그러다 근처 자그마한 초가집으로 분가했다. 그 후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을 낳았다. 큰딸이 두 살 되던 해 살림도 한창 일궈 나갈 즈음 난리가 났다. 북한군이 남쪽을 향해 탱크를 몰고 밀물처럼 쳐들어온 것이다. 1950년 6·25전쟁이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전쟁 소식이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산골 마을까지 불안이 점점 엄습해 왔다. 그러는 사이 큰애는 네 살, 작은애는 두 살, 그리고 뱃속에 셋째까지 임신하였다. 그때 가정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소식이 날아왔다. 남편에 대한 입대 통지서였다. 토끼 같은 어린 자녀가 셋이나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남편도 없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다. 남은 처자식도 그렇지만 이들을 두고 죽을지 살지 모르는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수많은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그때 남편은 구사일생으로 운 좋게 살아남아 전역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가정으로 돌아온 후 어느덧 식구는 아들딸 여섯 식구가 되었다. 부부는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잠시도 쉴 틈 없이 땀 흘려 일했다. 아이들이 더 크기 전 땅도 사고 먹고살 것을 마련해야 했다. 하루하루 아껴 쓰고 남보다 두세 배 더 열심히 노력한 결과 밭도 사고 논도 사고 살림이 늘어났다. 그동안 아이들도 무사히 잘 크고 동네에서는 제법 알부자 소리를 들으며 살게 되었다.
자녀들이 커서 하나둘 출가하고 먹고 살 만하게 되었을 때 또다시 위기가 닥쳐왔다. 남편이 위암 판정을 받았다. 돈도 써보지 못하고 땀 흘려 일해 온 것밖에 없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다. 남편은 위암 수술을 받고 불과 1년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남편의 나이는 65세였다. 자녀들이 모두 출가나 취업을 위해 도심으로 떠나고 이제 집에는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
자녀들이 살다 나간 시골집은 새끼들이 떠난 빈 둥지 그 자체였다. 방을 늘이고 규모를 키운 큰 집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 썰렁한 집이었다. 게다가 오래된 건물은 바람이 부는 밤에는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와 가끔 낡은 건축물이 찌그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뜩이나 무서를 잘 타시던 어머니는 가끔 자식들에게 고통을 호소하시곤 했다.
“글쎄, 내가 밤에 잠을 자려 하는데, 귀신들이 문을 열고 밖에 서 있는 거야! 내가 소리를 냅다 질러도 안 나가고….”
그러면 시골집으로 내려올 수 없는 우리의 대답은 똑같았다.
“요즘 귀신이 어디 있어요? 다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정말 귀신 봤다 는 사람 못 봤어요!”
“아니 얘들 좀 봐! 내가 분명히 봤다고. 내가 호통을 치고 막 야단을 치니까 갔다니까.”
늘 대화는 이랬다. 정말 어머니는 혼자 사시는 게 무섭고 외로우셨던 거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났을까? 어머니는 결국 시골집을 버리고 딸네 집으로 올라오셨다. 그 뒤로 시골집은 집 마당에 잡풀이 자라고 폐허가 되듯 했다. 어쩌다 우리 형제들이 내려가면 옛날 살던 집인데도 영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어머니는 90세를 넘기면서는 건망증도 심해지고 약간의 치매 현상도 나타났다. 금방 한 이야기를 또 하고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시곤 했다. 그래도 우리 자식들과 며느리는 잘 기억하셨다. 그래도 치매 초기인 어머니는 늘 긍정적인 말씀을 하셨다. 특히 며느리 손을 잡고는
“아이고 우리 며느리. 사랑한다! 고맙다”를 연발하셨다.
아내도 그러는 시어머니가 싫지 않은지 어머니를 자주 뵈러 가자고 했다. 어느덧 94세가 되던 시점에 기력이 약해지셨다. 결국 거의 의식을 잃어 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노환이라 손쓸 곳이 없다 했다. 병원에서는 호스를 꽂아 연명치료를 하자고 했다. 이런 상태로 연명치료를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형제들 의견이 모아져, 안타깝지만 집으로 모셨다가 자연스럽게 보내드리기로 했다.
집으로 모시기로 하고 퇴원 수속을 밟는 동안 나는 이동침대 위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시더니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계셨다. 뭔가 눈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늘 그랬듯이‘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어머니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어머니에게‘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마음으로 눈으로 그 말을 전하고 있었으나 막상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 많이 써보지 않아서 그런지 어색해 목구멍에서 맴돌고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 대단하세요. 그 아프고 힘든 걸 견디어 내시고요”하며 엉뚱한 위로의 말만 했다.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평소 습관이 안 된 사랑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퇴원하여 어머니는 다시 함께 살던 막내딸네 집으로 모셨다. 이제 잘 해야 1년 아니 빠르면 몇 개월, 우리는 그런 각오로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와 사흘째 되는 날, 어머니가 숨을 안 쉰다는 긴급 연락이 왔다. 최소한 몇 달은 더 사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먼저 도착한 남동생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마치 천사처럼 평온하셨다고 말했다. 장례 절차가 이루어졌고 어머니는 화장하여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유골함은 먼저 가신 아버지가 계신 괴산 호국원에 나란히 모셔졌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서는 귓전에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 아들 사랑한다! 우리 착한 며느리 사랑한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사랑해요. 어머니! ’라는 말이 목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연습이 필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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