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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고응남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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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40분. 빗방울이 굵게 쏟아 내리고 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흠뻑 젖은 채 헐레벌떡 뛰어들어 온다. 그녀는 키가 작고 가냘픈 모습이다. 여기는 하남 덕풍교 아래 당정 뜰 공터에 텐트로 친 임시 막사로 된 보급소(Check Point, CP)이다. 그녀는 들어오자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후 바로 책상 위 등록 명부에 서명하고 있다. 운영진도 시계를 보고 등 번호와 이름 서명 옆에 기록 시간을 적는다. 그 옆에 '제한시간(cut-off time) 오전 10시, 하남 당정 뜰 공터, 100km CP'라고 쓰여진 간판이 세워져 있다. 그 옆에서 기록 사진을 찍었다.
오전 9시 50분. 여전히 비는 좍좍 더 굵게 쏟아지고 있다.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 시간 내에 들어오지 못하면 중도 탈락이다. 몇 분 늦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울트라 마라톤 대회이다. 최서단 강화도에서 최동단 강릉까지 308km를 3박 4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완주해야 한다. 50km, 100km, 150km, 200km, 250km에서는 CP가 설치되어 있으며, 각각 제한시간이 있다. 제한시간 안에 못 들어가면 중도에 탈락이 된다. 어제 저녁 5시에 강화도에서 출발한 고교 동창생 최종섭.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극한 상황과 체력 안배, 자기와의 순간순간 싸움을 하고 있다. 날씨는 그를 도와주지 않고 밤새 쏟아 내렸다. 50km CP에서 제한시간 10분 남겨 놓고 겨우 들어갔다는 그. 다른 마라토너들 일부는 10분 후에 들어가서 탈락했다는 짧은 카톡 메시지만 남겼다.
나는 어젯밤에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 한 곳에 우울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뒤척이다 오늘 새벽 1시에 겨우 잠들었다. 탁상 시계의 자명 소리에 새벽 4시 30분에 겨우 눈을 떴다. 밖을 보니 비는 밤부터 지금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잘 뛰고 있겠지? 밤새 걱정이 앞섰다. 그 전에 간혹 마라톤 뛰다가 죽은 마라토너의 뉴스가 문득 기억이 났다. 어제 저녁 우울했던 기분이 오늘 새벽 지금까지 이어진다. 새벽 전철 5시 37분 겨우 첫차를 탔다. 카카오지하철 앱에서 마포구청에서 하남 검단산 역까지 출발지와 도착지를 찍어보니 1시간 23분 걸린다. 종섭이가 예정했던 시간은 오늘 아침 8시였다. 제한시간 10시, 2시간 전이다. 나와 다른 동창생 2명이 만나는 시간은 7시 20분이었다. 오전 7시쯤 하남 검단산역에 도착했다. 덕풍교 아래 당정 뜰 앞 공터까지 가려면 걸어서 20분쯤 걸린다.
그때 카톡 메시지를 그로부터 급하게 받았다. '현재 잠실이며, 후시딘 연고 2개와 드라이 기기를 급히 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용인에서 승용차로 출발한 다른 동창에게 급히 전화로 연락했다. 되돌아가서 드라이기를 갖고 오기에는 늦기 때문에 아내에게 집에서 갖고 오게 하고, 판교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와 또 다른 동창은 후시딘 연고를 구해서 하남 덕풍교 아래 당정 뜰 공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시간에 후시딘 연고를 어떻게 구하지? 이 시간에 문을 연 약국은 없을 텐데. 24시간 약국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찾아봐도 8시 30분 이후에나 문을 연다고 검색된다. 번뜩 든 생각은 가까운 데에 있는 24시 마트를 찾자는 생각이었다. 겨우 찾았는데, 후시딘 연고는 없고 마데카솔 연고 2개가 남아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샀다. 하남 덕풍교 아래 당정 뜰 공터에서 동창생 3명이 만났다.
지금쯤 어디 와 있을까? 위치 추적 앱이나 카카오맵 위치 공유를 사용해도 종섭이의 위치 추적이 되지 않는다. 나와 응원 나온 경동고 동창생 2명은 저 먼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두 손을 모은다. 띄엄띄엄 저 멀리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는 점처럼 보이다 점점 커진다. 그의 얼굴로 보이다가, 가까이 오면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달리고 있는 종섭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종섭이면 좋겠는데, 마음속으로 애가 끓는다. 고교 동창생인 그는 제 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중간에 포기하지는 않았겠지? 어디쯤 와 있을까? 위치 공유 앱을 설치하여 보고 있지만, 오류가 났는지 위치 추적이 되지 않고 있다.
9시 53분, 9시 54분, 9시 55분, 9시 56분, 9시 57분, 9시 58분. 진입 장소에 뚫어지게 쳐다보다 동창생 두 명은 “포기하자”라고 말하면서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나는 얼굴을 돌리지도 않은 채 “그 친구, 반드시 10시 안에 들어올 거야”라고 말했다. 저 멀리 응시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10미터쯤 거리에서 종섭이 얼굴이 보였다. 착각한 건가. 다시 쳐다봐도 그의 얼굴이다. 시계를 보니 9시 59분이다.
“와, 종섭이다. 빨리 와.” 내가 크게 소리쳤다. 등록대를 향하여 “3100번 들어왔어요. 3100번” 헉헉거리며 사색이 된 그의 외침. 허겁지겁 들어오자마자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후 바로 책상 위 등록 명부에 서명하고 있다. 운영진도 시계를 보고 이름 서명 옆에 기록 시간을 적는다. ‘3100번 최종섭. 오전 10시.’ 절망에서 희망을 맛본 최고의 기쁜 순간, 진입의 기적이었다.
그는 한숨 돌린 후 임시로 차린 샤워장으로 함께 갔다. 동창생 3명이 우산을 받치고, 그는 드라이기로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쪽을 말렸다. 그 다음에 마데카솔을 발랐다. 테이블 파라솔에서 잠깐 쉬는 동안에 “동창생 1명만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2명이 더 나와 있어 더욱 기쁘고 힘이 난다”고 그는 말한다. 나와 동창생 1명이 예고 없이 여기에 왔다. 나는 그에게 “끝까지 완주도 중요하지만 멈춤도 지혜로운 결단”이라고 조언하였다. 다른 2명 동창생은 말이 없다. 더 뛰라고 조언하는 것이 맞는지, 멈추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극한 도전을 하는 멋진 동창생을 보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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