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닭서리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낙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조회수39

좋아요0

세상에는 재밌는 일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빠지면 서럽다 할 것 중 하나가 서리다. 서리란 떼를 지어서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몰래 훔쳐먹는 장난을 말한다. 콩, 고구마, 참외 등이 주된 목표물이었다. 콩은 불에 구워 먹었다. 손은 말할 것도 없고, 입 언저리와 얼굴도 온통 까매졌다. 고구마나 참외는 풀밭이나 바지에 문질러 흙을 닦아낸 다음 이빨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지금은 서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범죄로 다뤄진다. 옛날에도 붙잡히면 꾸중 듣거나 한두 대 쥐어박혔다. 그래도 장난으로 치부되었다. 이제는 나이 든 이들의 추억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피해자에게는 속상할 일이지만 서리꾼에겐 쾌감 만족의 낭만이었다.
나는 타고난 새가슴이라 그 멋진 재미를 경험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서리 무용담은 숱하게 들었다.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내가 한 일인지 들은 이야기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서리 중 단연 으뜸은 닭서리였다. 으뜸이라 말하는 까닭은 성공 확률이 매우 낮지만, 보상은 최고였기 때문이다. 어디 닭 울음소리가 웬만한가? 자칫 실수하면 한밤중에 온 동네 사람 깨우기 십상이다. 옛날에는 중국 산둥에서 우는 닭 소리를 인천에서 들었다고 한다.
내가 들은 서리 무용담 중 단연 으뜸은 내 형의 닭서리였다. 형이 고등학교 시절 셋이서 닭서리를 나섰다. 셋 중 하나가 살고 있던 작은 마을 어느 집으로 향했다. 그 친구는 정보를 제공한 대신 서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기로 했다. 형이 망을 보고 다른 친구가 행동대장으로 나섰다.
닭장은 마루 밑이었다. 한 마리만 잡기로 했다. 행동대장이 조심스럽게 마루 밑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형은 밖에서 망을 보았다. 심장 소리 에 주인이 깨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가슴이 뛰었단다. 마른침을 삼키며 안방 문과 친구를 번갈아 보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안방 문이 열리고 집주인 사내가 불쑥 마루로 나왔다. 형이 친구에게 신호를 보낼 새도 없이 말이다. 숨죽여 상황을 지켜볼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마루에서 서성이던 집주인이 마루 밑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허리를 굽혀 마루 밑을 바라보며 “누구여?”하고 물었다. 행동대장이 “가만 있어. 한 마리만 더 잡고”라고 대꾸했다. 그는 형이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던 모양이었다.
주인이 “엉?”하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형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잠시 후에 행동대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형과 다른 친구 이름을 부르며 빨리 오라는 소리였다. 붙잡힌 행동대장이 이실직고한 모양이었 다. 셋이서 손이 닳도록 빌고 정강이 몇 번 차인 다음 겨우 풀려났다.
나는 그 멋진 경험을 중학교 시절에 딱 한 번 겪어 봤다. 그것도 닭서리로.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열흘 남짓 외가에서 지냈다. 사촌, 육촌, 팔촌까지 형제가 많았다. 늘 대여섯, 많을 때는 십여 명이 어울렸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던가. 이집 저집 몰려다니며 밤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밤이 깊어 배가 고파지면 밤참을 챙겨 먹었다. 그중 가장 만만한 게 고구마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형 하나가 닭서리를 제안했다. 외가에서는 한 번도 없던 일이라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야기가 진지해졌다. 먼저 ‘뉘 집을 털 건가’가 문제였다. 맏형이 꼽꼽쟁이 외삼촌 댁을 지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부자고, 둘째 들켜도 조카를 어찌하지는 못하지 않겠냐는 것이었 다.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외가를 찾을 때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늘 꼽꼽쟁이 외삼촌 댁에서 지냈다. 내 집 같았던 곳을 한밤중에 도둑이 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서리 치고는 별난 서리였다. 다만 꿈에 그리던 로망 하나를 직접 경험한다는 점에서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집 안 사정에 밝으니 조심할 것은 큰 소리만 내지 않으면 되었다. 개도 짖지 않았다. 오히려 꼬리치며 반기는 게 부담스러웠다. 닭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닭들은 인기척에 다소 부스럭거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닭 잡는 일은 요령이 있어야 한다. 먼저 닭 등에 손이 닿는 듯 마는 듯 살짝 얹는다. 이때 닭은 가볍게 ‘꼬꼬꼬’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한다. 잠시 기다려 닭이 진정된 다음, 날개 속으로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손을 밀어 넣는다. 손이 날갯죽지에 이르면 죽지를 꼭 쥐고 조심스럽게 횃대에서 들어 올리면 된다. 서둘면 절대 안 된다.
한 사람이 한 마리씩 잡았다. 나는 이론 공부만 했을 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실수가 대사를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참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거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우리는 짜릿한 스릴과 포식을 마음껏 즐겼다.
다음 날 아침에 밥 먹으려고 외삼촌 댁에 갔다. 서리꾼 서넛이 함께 갔다. 예상한 대로 방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외삼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입에서는 온갖 악담이 쏟아졌다. 대충 ‘도둑놈의 손모가지, 발모가지가 똑 부러지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시치미를 뚝 떼고 갖가지 말로 외삼촌을 위로해 드렸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외삼촌의 험담이 계속 이어졌다.
전날 거사의 주모자인 맏형이 듣다 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삼촌, 서리해 간 사람이 누군 줄 알고 그런 악담을 계속하세요?” 맏형은 내 이종사촌으로 삼촌과는 나이 차이가 대여섯에 불과했다. “누구긴 누구여, 천하의 도둑놈이지.” 훗날 외삼촌께 그날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삼촌은 ‘말하면 잡아 줄 텐데 왜 쓸데없이 고생했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이 모르는 말씀이었다. 차려주는 음식보다 훔쳐먹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내게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어주었던 외삼촌과 이종사촌형이 올해 세상을 떠났다. 마음이 추수가 끝난 초겨울의 들녘처럼 쓸쓸하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