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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된 주관성’, 서로를 공격하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윤성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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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우리 사회에 과연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정답’이란 것이 있을까? 만약 정말로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정답을 향해 함께 나아가며 싸움과 갈등을 뒤로한 채 하나의 방향으로 향했을 것이다. 만약 정답이 없다면, 우리는 정답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각기 다른 의견과 길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떠한 전제에도 우리가 갈등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정답이 우리 앞에 서 있는 듯 여겨진다. 우리는 똑같은 땅 위에 서 있지만, 서로 다른 꿈을 좇고 각기 다른 목표를 향해 걷는다. 한 공간에 수많은 길이 얽혀 있고, 그 길을 헤매는 수많은 발걸음이 서로 부딪히며 그 갈등의 흔적을 남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옳은지 몰라 서로의 방향이 불편하게 엇갈린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우리들은 아마 이 과정에서 본인만의 ‘진리’를 마주할 것이다. 종교, 목표, 혹은 개인의 인생을 위해 우리는 각기 다른 ‘진리’를 믿으며 살아간다. 어찌 보면 이러한 ‘진리’는 한 명의 개인이 만들어 낸 결론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에게는 그저 당연한 ‘객관적 사실’로 여겨지며 추앙받곤 한다. 마치 개인의 경험적 진리가 하나의 집단 내에서 ‘객관성’이라는 무기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경험적 진리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론적으로 생각한 나의 답은 ‘그럴 수 없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적 진리가 사회에서 조금의 객관성도 확보할 수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과 같은 분열된 현대를 맞이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더 깊게 파고들기로 했다.

경험적 진리와 객관성의 재정의
먼저 ‘경험적 진리’와 ‘객관성’의 정의를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인식론 속 경험론과 합리론의 구분을 바탕으로 경험적 진리를 먼저 정의하자면, 이는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은 증거로부터 도출된 진리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은 관찰된 경험을 통해 얻은 경험적 진리이다. 다음으로 ‘객관성’은 특정한 관점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한다. 여기서,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경험적 진리’ 자체가 아니라, ‘객관성’이라는 무기 속에 담긴 모순이다.

자연과학적 진리와 사회과학적 진리
우선, 경험적 진리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서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자연과학적 진리는 많은 경우 인류가 직접 관찰하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객관성을 확보하기 쉽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다수가 공통된 방식으로 현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중력이 작용하여 사과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그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반면, 사회과학적 진리는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수만 가지의 다른 답을 내놓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같은 주제라도 문화적 배경, 심리적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생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사회과학적 진리 속에서도 나름대로 공통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다양한 경험과 이견을 조율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의 ‘객관적 외피’를 입혔다. 그 결과가 바로 정부의 법률과 정책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를 객관적이라 여겨 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 세계에서 국가, 종교, 지역 등 모든 소규모 집단에서 반복된다.

객관성의 탈을 쓴 공통된 주관성
대한민국의 ‘법’이 대한민국 국민에게조차 주관적인 존재라 여겨진다면, 그 법은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즉,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대한민국의 법이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 각기 다른 환경의 집단에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형성된 ‘그들만의 규칙’은 집단 내에서 ‘객관성’이라는 갑옷을 입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종교, 동아리, 커뮤니티 등 다양한 집단에서 형성된 생각들은 그 집단 안에서 객관성을 지니게 되며,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높은 사회적 위치나 명성을 갖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객관성’을 견고히 다지는 데 사용한다. 본인들이 그들의 대상이라 착각하며 말이다. 그 결과 본인들의 생각이 곧 정답이 되어, 오답을 주장하는 다른 집단을 배척하고, 지금과 같은 분열된 사회가 형성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
과연 이 공통된 주관성을 무너뜨릴 수 있느냐?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도 회의적이다. 만약 이 ‘공통된 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하는 이가 집단을 계몽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이는 도전자에 의해 ‘변화된 공통된 주관성’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실패한다면 당연히, 도전자는 집단의 객관성에 부합하지 못한 부적응자로 여겨질 것이다. 결국 현재 만들어진 집단 자체가 유지되는 한, 이 집단 속 ‘객관성’이라는 무기를 뺏을 방법을 찾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서서히, 스며들기를
길 위에서 우리는 하나의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실은 각자 다른 목표를 향해 떠나고 있다. 각자의 진실을 가슴에 품은 채, 모순 속에서 길을 헤매는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수많은 정답의 가능성을 품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언젠가 이 길 위에서 서로의 발걸음을 존중하며 걷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객관성이라는 탈이 누군가의 무기가 되어 서로를 공격하게 되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가능성이, 이 따듯함을 나누어 마음의 공백을 채울 능력이, 문학 속에 있으리라 믿는다. 수많은 글이 인류의 마음속 온기를 끌어내어 모두가 서서히, 스며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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