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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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 플레이오프 선수가 되고 싶었다.
플레이오프(playoff)는 정식 시즌이 끝난 후 리그 승자를 가리기 위해 치르는 경기다. 진정한 승자를 가리기 위한 경기여서 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플레이오프 참여가 결정된 선수나 팀이 명성을 떨치며 명예를 얻는 이유다. 스포츠에서는 정규 시즌 중 상위 승점을 받은 팀을 추려 플레이오프에 임하지만, 인생의 플레이오프 참가 여부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정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자신이 정한 시간에 시작하면 된다. 인생의 정규 시즌은 주로 가정 경제를 책임지기 위한 의무 활동 기간이다. 시즌 내내 밤낮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하지만, 성취감을 느끼며 만족해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 자신이 좋아서 결정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업 은퇴 후 새로운 항로를 선택하는 ‘인생 플레이오프’를 계획하는 일은 인생의 마무리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인생 역전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사례는 주위에 흔하다. 일본의 평범한 할머니 시바타 도요는 98세에 시집을 펴내 160만 부가 팔리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녀는 92세 때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2024학년도 대학 수능시험에 응시한 84세의 김정자 할머니! 마침내 꿈꾸던 숙명여대 학생이 되어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일흔에 이르러 인생의 플레이오프 참여를 결정했다. 은퇴하고 한참이 지난 후, 그러니까 재물과 건강 모두 잃고, 희망도 꿈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시점이다. 오대산 기슭에 있는 암 환우 휴양소를 오가며 인생의 정리를 생각하던 어느 날, 휴양소 가까운 곳에서 칡소폭포를 만났다. 계곡을 가득 채운 거대한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 폭탄의 기세에 압도된 산천초목이 몸을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다. 아니다! 불가능을 뛰어넘는, 장쾌한 도전을 시도하는 용감한 장수들도 보인다. 열목어 무리다. 그들은 폭포수 아래 웅덩이에서 한가한 유영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결연한 자세를 갖춘 용사 하나가 폭포수를 향해 전력으로 치닫는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두세 놈이 뒤따른다. 폭포수가 쏟아지는 지점에 이른 장수는 곧바로 폭포 상단을 향해 뛰어오른다. 높이의 절반도 못 올라가고 이내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친다. 뒤를 이어 높이뛰기를 감행한 놈들은 1/3도 채 못 오르고 자기 몸뚱이를 내동댕이치고 만다. 얼핏 보기에 자기 몸길이의 100배나 되어 보이는 폭포를 뛰어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 같았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오르다 떨어지고, 넘으려다 미끄러지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되지도 않을 일에 몰두하여 에너지를 낭비하는 열목어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저들도 경험을 통해 안 되는 일이란 걸 알 텐데, 어쩌자고 무모한 행동을 계속하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칠 즈음, 두뇌 신경의 명령이 채 전달되기도 전에 두 눈이 번쩍 떠진다. 날렵한 몸맵시의 꼬마 장수 하나가 마른번개를 치며 보란 듯이 폭포 상단에 성큼 올라선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딴생각으로 넋을 팔고 있던 머리를 무언가가 사정없이 후려치고 지나간 느낌이다. ‘그래! 할 수 있어! 무언가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 해!’ 눈 깜빡할 사이에 생각이 바뀌고, 머릿속은 또 하나의 인생을 설계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정규시즌(현업)이 아닌 새로운 세상! 인생의 플레이오프다.
플레이오프 경기를 소화하는 요즈음의 일과는 그야말로 ‘메뚜기 유월한철’이다.
지역 노인대학의 학기별 커리큘럼을 고안하고 직접 강좌를 맡아 봉사한다. 이웃과 함께 소통하고 즐거운 시간을 나누는 짜릿한 시간이다. 시니어 극단 배우로서 연기 연습 클래스에 참여하며 정기 발표회 공연을 이어간다. 대사를 외우고 배역의 캐릭터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늘 생각하고 배우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독서와 아울러 글쓰기에 매진하며, 문학지 편집 활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산수의 마루터기까지 쉼 없이 달려온 롤러코스터 인생에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정리하여 작은 책자로 묶어내는 소박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사색의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틈틈이 영상 편집 작업에 열중하여 가족·친지·동료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보관하는 일은 기쁜 감정의 순간을 연장하는 마법의 구현이다. 내 인생 최초의 악기, 우쿨렐레 수업 및 연습 시간은 세파에 찌들어버린 나의 영혼을 다시 맑고 푸르게 가꾸어주는 특별한 겨를을 가져다준다.
할 일이 많아 늘 바쁘고, 항상 바쁘니 시간을 아껴 쓰는 성실함이 창의력과 결합한다.
내 인생의 새 마당, 플레이오프! 욕심껏 벌여 놓았으니 다 잘할 수는 없을 터. 찬란한 햇빛, 꽃길만 기대하지는 않는다. 때론 구름 낀 날도 찾아오고, 또 비바람도 불겠지.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결정으로 플레이오프 그라운드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그냥 매일매일 마주하는 경기를 즐기기로 작정한다. 금메달을 거머쥐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플레이오프 경기에 참여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자랑스럽고 신나는 일이다.
아직도 이웃과 나눌 수 있음에 그저 행복하다. 나 스스로에게 감격의 포옹을 선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