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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방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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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학산을 두르고 있는 이 마을은 시시때때로 내게 눈요깃감을 내어준다. 나는 몸을 돌려 산봉우리 가득 피어오른 산 안개를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타버릴 것 같은 더위가 유난히 길어지고 있었지만 요란하게 달려와 와르르 쏟아붓고 가버린 소나기 덕분에 쓰러질 듯 길가로 엎드리던 노란 금계국들이 제법 싱그러워 보였다.
나는 큰길로 곧장 나가지 않고 언덕길로 들어섰다. 먼발치의 밭에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들깨 향을 맡으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와 오른쪽 사잇길로 걸어갔다. 전나무 묘목 울타리 너머로 N아파트의 뒷마당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 간이 탁자 위에는 소나기를 피하느라 비닐을 씌워 놓은 플라스틱 채반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나란히 자리를 한 운동기구들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다.
눈인사를 주고받을 만큼 퇴근길에 자주 마주치던 그녀가 한 운동기구 앞에 서서 원형기구에 달린 손잡이를 양손에 각각 움켜쥔 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여고로 올라가는 동네에 사는 작은 체구의 그녀는 80대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항상 부지런하게 살고 있었다. 오전에는 환경 지킴이 조끼 차림으로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다른 한 손에는 집게를 들고 길가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줍고 있었고 저녁 무렵에는 유모차에 폐지와 종이 상자를 싣고 내 앞을 지나가곤 했다. 유모차에 매달린 비닐봉지 속 알루미늄 캔들은 그녀의 발걸음을 좇아가며 딸랑거렸다.
나는 계수나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계수나무의 동글동글한 잎사귀에 코를 대고 달짝지근한 향을 맡고 있을 때 그녀는 다른 기구의 사각 판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남은 한 발을 마저 판 위로 올리려는 순간 잠시 휘청거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얼른 양팔을 벌려 몸의 중심을 잡았다. 그녀는 앞쪽에 더 높이 놓인 판으로 그렇게 다시 올라섰다. 허공으로 두 팔을 휘두르며 자세를 잡은 그녀가 이번에는 아래에 놓인 판을 향해 한 발을 들었다.
“아이쿠.” 순간 그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울타리를 돌아 그녀에게 뛰어갔다.
“괜찮으세요?” 나는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일으켰다. 그녀의 바지는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치신 데 없어요? 다리 괜찮아요?” 나는 그녀의 허리며 다리를 여기저기 만져보았다. 괜찮다며 계속 손사래를 치던 그녀가 사각 판 위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이더니 이내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징검다리. 크크크, 내 친구랑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그때도 비가 와서 개울이 이만큼 불었는데, 으흐흐, 잘 건너다가, 걔가 미끄덩하더니 개울로 넘어졌어. 그걸 보구 웃는 바람에 나도 발랑 자빠졌지, 푸하하핫. 둘 다 홀딱 젖었는데 서로 쳐다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내가 흐흐흐, 여기서 그 생각을 하다가 헛발을, 하하핫…”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그 기구에는 ‘스텝 바’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고 일곱 개의 사각판을 높낮이가 다르게 이어 놓은 모양새가 그녀 말대로 개울에 듬성듬성 놓인 징검다리 돌과도 같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징검다리를 직접 건너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장난기가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과 징검다리가 놓인 개울가의 풍경이 눈에 선했다. 징검다리 돌로 여긴 사각판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한참을 웃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모차로 걸어갔다. 그녀가 밀고 다니는 낡은 유모차 위에는 알루미늄 캔이 가득 들어있는 봉지가 올려져 있었다. 누군가 빈 캔을 납작하게 밟아 모아두었다가 그녀에게 건넨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만 가야지. 고마워.” 웃는 얼굴로 유모차를 밀고 가는 그녀의 굽은 등이 오늘따라 힘차보였다. 그녀는 집으로 올라가는 길 내내 그 친구를 그리워할 게 분명했다.
그녀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 덕분에 나 역시 가볍게 발길을 옮겼다. 문득 내가 다니던 H중학교의 아카시아 숲에서 훤히 보이던 긴 돌다리가 떠올랐다. 역사 시간에 학급 친구들과 조를 짜서 유적지 탐방을 했던 살곶이 다리였다. 나는 반달음박질을 하여서 아름드리로 우뚝 서 있는 산딸나무 앞에 멈춰 섰다.
유월의 어느 날, 큼직한 꽃잎을 나무 가득 펼치고 있어서 단숨에 내 눈길을 잡아챘던 나무가 있었다. 나는 하얀 꽃 포들을 머리핀처럼 빼곡하게 꽂고 있는 나무의 해맑은 모습에 한 눈이 팔려 한동안 그 앞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탐스럽게 열린 꽃 포는 보면 볼수록 명랑한 웃음소리와 닮아 있었고 그 진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었다. 나무 가득 모여서 밝게 웃고 있던 하얀 꽃 포들은 영락없는 나의 학창 시절 단발머리 친구들의 얼굴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까르륵 웃음보를 터뜨리던 친구들에게 이끌렸고 어슴푸레한 기억 저편에 있던 그네들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나 보다.
9월의 산딸나무는 꽃잎 같던 하얀 포들을 말끔히 떨구어 내고 여물어 붉어진 동그란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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