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2024.6 664호 붉은 인주 자국

“고아였으면 좋으련만….” 닳고 닳아 시멘트 가루가 날릴 것 같은 육교 계단 앞에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6차선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길 건너 우체국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 반복되었다. 어머니가 미웠다. 아버지도 지독하게 원망스러웠다. 인연을 끊는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허름한 양복 안주머니에 든 봉투를 만져보았다. 내 피와 땀방울과 허기진 배

  • 김홍신
북마크
199
2024.6 664호 길 잃은 어린 꽃씨

지난해 가을, 이곳을 지나던 소슬바람이 어딘가에서 후∼ 하 고 꽃씨를 몰아왔어요. 하필이면 그 꽃씨가 떨어진 곳은 쾨쾨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쓰레기 더미였어요. 평소에 사랑을 담뿍 받고 자라던 꽃씨는, 자신이 바람에 실려 온 이곳이 사람들이 눈 살을 찌푸리며 다니는 길임을 전혀 알지 못했어요.그때 마침, 살랑살랑 봄바람이 꽁꽁 언 땅을 훈훈하게 녹이며 재

  • 진수영
북마크
134
2024.6 664호 응어리진 주파수

펄떡거린 기둥뿌리 단두대에 팽개친 채 무얼 그리 보란 듯이 어깃장 놓는 건가 그늘이 키 늘리기 전, 보폭 몰래 재고 있다숨탄것들 탈출이다, 텃새 아연 입 다물고 궂긴 자국 지운 곳에 저 독수리 침 바르다 숨 막혀 헛방치기로 지레 놀라 맴돌 즈음흔들리는 방향감각 발길 저리 어지러워 나침판이 눈을 뜨는 안테나를 판독해도 범벅된 에스오에스(SOS)에 사면팔방 꽉

  • 정황수
북마크
145
2024.6 664호 구룡사

비로봉 구름 아래 치악산 휘휘 돌아 아홉 계곡 고개 숙여 조아린 천년 사찰 짙어진 노란 은행잎 늦가을도 깊었다 속세에 물이 깊어 제 앞도 못 보는가보광루 종루 길목 돌계단 난간 위에 가을볕 가부좌 틀고 다 비운 채 있거늘해탈의 마음 갖기 아득히 먼 중생들 뎅그렁 풍경 소리 적막을 깰 때마다 하나둘 비워지는 걸 뉘인들 알았을까 합장한 두 손 끝이 가르친 처마

  • 최승관
북마크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