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였으면 좋으련만….” 닳고 닳아 시멘트 가루가 날릴 것 같은 육교 계단 앞에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6차선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길 건너 우체국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 반복되었다. 어머니가 미웠다. 아버지도 지독하게 원망스러웠다. 인연을 끊는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허름한 양복 안주머니에 든 봉투를 만져보았다. 내 피와 땀방울과 허기진 배
- 김홍신
“고아였으면 좋으련만….” 닳고 닳아 시멘트 가루가 날릴 것 같은 육교 계단 앞에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6차선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길 건너 우체국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 반복되었다. 어머니가 미웠다. 아버지도 지독하게 원망스러웠다. 인연을 끊는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허름한 양복 안주머니에 든 봉투를 만져보았다. 내 피와 땀방울과 허기진 배
지난해 가을, 이곳을 지나던 소슬바람이 어딘가에서 후∼ 하 고 꽃씨를 몰아왔어요. 하필이면 그 꽃씨가 떨어진 곳은 쾨쾨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쓰레기 더미였어요. 평소에 사랑을 담뿍 받고 자라던 꽃씨는, 자신이 바람에 실려 온 이곳이 사람들이 눈 살을 찌푸리며 다니는 길임을 전혀 알지 못했어요.그때 마침, 살랑살랑 봄바람이 꽁꽁 언 땅을 훈훈하게 녹이며 재
선풍기를 싫어하는 손자 선이할머니가 부채를 부쳐준다“할미! 미풍, 약풍, 강풍! ”힘차게 바람을 일으키는데“자연풍, 수면풍! ”주문도 많다살살 부치는데“회전, 정지”선이 리모컨 덕분에할미 부채는 인공지능
햇살이 자글자글앞마당 산수유꽃이봄볕을 끌어당긴다.잎보다먼저나온샛노란 꽃망울울타리 개나리가노랑친구 여기도 있다며옴질옴질 고개를 든다.우리 집 봄은노랑빛이 깨운다고 깔깔대는데여섯살내동생유치원 노랑색 셔틀버스조잘대는 봄꽃을 태우러 왔다고빵빵거리며 달려온다.
베란다 유리문 너머로저 멀리 보이는 초저녁 하늘이 희뿌연 장막을 치고 있다.그 옛날 내 어릴 적에마당에 멍석 깔고 할아버지 무릎 베고 하나 둘 손가락 꼽으며 헤이던 그 노오란 별들은 다아어디로 숨어 버렸나저 하늘에 희뿌연 장막을 걷어 버리면 그 노오란 별들을 볼 수 있을까 난 어느 사이 그 옛날 아이가 되어 별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할아버지 집”의 높임말은 뭘까? “할아버지 아파트요.”“응? 뭐라고? ”“아닌가?그럼 주택이요.”“우와, 기발한데! ”결국 웃음보가 터진 선생님. 다문화 하솔이는 웃는 선생님이 좋아저도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프프풋 웃는다.
태평양 건너서 온 카드 한 장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해요그리고보고 싶어요눈물방울이 변해 느낌표가 되었다.
단비였어땅속을 뒤집으니 촉촉이 젖은 하루였어 풀잎도 제법 흔들렸고 나뭇가지도 고개 들어 빗방울을 바라보았지꽃을 심고 나서 물을 따로 주지 않아도 잘 자랄 수 있게 됐어.유리창에 매달린 방울방울 빗방울이 기쁨의 눈물이 되어도 좋았겠어
펄떡거린 기둥뿌리 단두대에 팽개친 채 무얼 그리 보란 듯이 어깃장 놓는 건가 그늘이 키 늘리기 전, 보폭 몰래 재고 있다숨탄것들 탈출이다, 텃새 아연 입 다물고 궂긴 자국 지운 곳에 저 독수리 침 바르다 숨 막혀 헛방치기로 지레 놀라 맴돌 즈음흔들리는 방향감각 발길 저리 어지러워 나침판이 눈을 뜨는 안테나를 판독해도 범벅된 에스오에스(SOS)에 사면팔방 꽉
비로봉 구름 아래 치악산 휘휘 돌아 아홉 계곡 고개 숙여 조아린 천년 사찰 짙어진 노란 은행잎 늦가을도 깊었다 속세에 물이 깊어 제 앞도 못 보는가보광루 종루 길목 돌계단 난간 위에 가을볕 가부좌 틀고 다 비운 채 있거늘해탈의 마음 갖기 아득히 먼 중생들 뎅그렁 풍경 소리 적막을 깰 때마다 하나둘 비워지는 걸 뉘인들 알았을까 합장한 두 손 끝이 가르친 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