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누나들 말에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찬바람 쏘이는데 찬바람 들어온다며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내 눈썹이 하얗게 변했다는 누나의 말에 덜컥 겁이나 눈을 떠보니 아직도 화롯가에 둘러앉아 저고리에 동정 달고 조끼에 단추 달고 삵바느질 설빔을 짓고 있네.
- 박영길
섣달 그믐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누나들 말에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찬바람 쏘이는데 찬바람 들어온다며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내 눈썹이 하얗게 변했다는 누나의 말에 덜컥 겁이나 눈을 떠보니 아직도 화롯가에 둘러앉아 저고리에 동정 달고 조끼에 단추 달고 삵바느질 설빔을 짓고 있네.
꽃이 아무리 어여쁘다 한들웃음꽃만 하랴광명학당연필과 지우개가고통을 호소한다아직 늦지 않았다며 우리글을 배우는늦깎이 학생들이들과 함께뼈를 깎는 고통을 함께 겪는 연필살을 에는 아픔을 고스란히 체험하는 지우개받아쓰기 시간은 아예 책을 펴놓고눈이 침침하다는 핑계로웃음이 만발하다연필 탓하며 지우개로 팍팍 지우니책상 위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작아지는 지우개의 모습에서
돌확 속에 연꽃 한 송이 박혀있다 어느 석공의 해탈이 저처럼 우아한 연꽃을 꺼냈을까 올려다보는 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하필이면 돌절구에,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차가운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진다 얼음 같은 시간이 밀려가고 드디어 연(蓮)의 시간 칙칙한 먼지가 걷히고 돌확에 흠뻑 피어나는 염화미소 그 연의 미소에 한동안 마음을 빼앗긴다 돌보다 암담했던
‘내 마음이 왜 이리 스산한가?’ 나직나직 <파우스트>의 아리아를 부르며 걷는 앞산 자락길 마른 낙엽들 흩날려 스산한데 계절을 역행한 꽃무릇이 회색으로 바랜 길섶을 생명의 빛깔로 채색한다. 꽃대마저 말라버린 10월의 어느 날 환생하여 만추의 한기에도 청청히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여린 몸이지만 살을 에는 동지섣달 칼바람도 꿋꿋이 버틴다.
우리 동네는 온통 함박웃음이다 천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벚꽃이 몽글몽글 찬란하게 웃고 복사꽃이 화사하게 웃고 황매화가 환하게 웃고 살구꽃이 활짝 웃고 개나리 민들레 제비꽃 등 함박웃음이 온통 지천이다 나는 이 웃음들을 차곡차곡 내 마음 속에 쌓아 두고 일 년 내내 꺼내 써야겠다 그러면 나의 일 년은 온통 함박웃음일게다
바람은 너블거리는 옷자락을 잡고 서럽게 울고 저만치 그리움은 봄꽃으로 오고 있다 유년의 봄날은 주마등처럼 안겨 오고 숙제를 못한 어린아이처럼 일요일 저녁 가슴만 욱신거리고 그렇게 2월의 동백꽃은 무심히 떨어지고 있다.
가진 것은 엄청난 시간과 약간의 뱃살이 객기 부리고 악산을 타고 놀던 다리는 무시로 경고장 난발하니 배짱 없어 자중하는 신세요 조석으로 헛기침하며 초근목피도 음미하던 치아 이젠 단체로 몽니 부리며 산해진미도 사양해 난감하오 이런저런 핑계로 나태한 일상 속에서 파뿌리는 모자로 변장하고 자식자랑 배추 잎 자랑에 경로당은 고슴도치 풍년이요 자동차 타이어는 하품하
저 엄중한 바위 한 채, 어느 손에 다듬어졌을까? 꿈틀거리는 눈썹이며, 지긋한 눈매며 우뚝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 두둑한 귓밥 목에 걸린 염주까지 저녁노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장삼 자락 길게 바닥까지 펼쳐진 위로 한 손은 가슴에 또 한 손은 무릎에 어느 손길일까? 손가락 마디, 사이까지 세밀하다 촛불 밝혀놓고 절 올리고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앉아계셨
맛있게 먹다 목에 걸린 생선 뼈다귀같이 일차선 도로를 폭주하는 광란의 오토바이야 만용의 그물에 걸려 일생을 불사르는 넌 도대체 누구냐
시선엔 보이지 않는 문이 있다 적막이 푸른 숲, 소리는 고향처럼 침묵울 찾아가고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흩어진다 꽃들의 뒷모습이 활짝 핀다 그들의 고독은 진자(振子)처럼 왔다 갔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오고가는 ‘운동방정식’을 풀고 있다 바람은 조용하면 죽는다 습관으로 길을 낸다 누군가, 화가의 물감처럼 여름을 짜내 숲에 바른다 여름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