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오늘도 치킨을 사 오셨다. 역시나 오늘도 술을 거나하게 드신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누르신 늦은 밤 초인종 소리보다 더 강력하게 잠을 깨우는 것은 치킨 냄새였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셔서는 신발장에서 술기운에 비틀거리시며 뒷굽이 약간 주름진 구두를 겨우 벗으셨다. 그리고 치킨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높이 들어 올리시고는 소리치셨다.“애들아! 치킨 사
- 조훈희
아버지는 오늘도 치킨을 사 오셨다. 역시나 오늘도 술을 거나하게 드신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누르신 늦은 밤 초인종 소리보다 더 강력하게 잠을 깨우는 것은 치킨 냄새였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셔서는 신발장에서 술기운에 비틀거리시며 뒷굽이 약간 주름진 구두를 겨우 벗으셨다. 그리고 치킨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높이 들어 올리시고는 소리치셨다.“애들아! 치킨 사
또르르 똑 또르르 똑…. 빗물 소리에 잠이 달아나 버렸다. 물소리 장단에 가만가만 몰입을 하다 보니 일간 소란했던 마음자리에 사부자기 평화가 깃드는가 싶다. 하마터면 이 여명의 새벽을 살아서는 경험하지 못할 뻔도 하였다.새벽 단잠에서 깨어난 나는 지금 내 친구 ‘쬐맹이’를 다시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별명이 ‘쬐맹이’였던 이 친구는 여중학교 시절 고만고만한
운명이 궁금했다보슬보슬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시이모님들이 집에 오셨다. 그날 어머님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하얀 반죽을 치댔다. 끓는 육수에 떼어낸 반죽은 목련 꽃잎처럼 포르르 떠올랐다. 이내 거실의 둥근 상은 희끗희끗한 시이모님들의 머리로 뒤덮였다. 시이모님들의 화제는 시간이 갈수록 발효된 빵 반죽처럼 며느리에 관한 이야기로 부풀어 올랐다. 이를테면 손이
제주도는 신혼여행으로 처음 갔었다. 육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남국의 정서, 이국적 풍광에 사로잡혀 신혼의 단꿈을 꾸었던 섬이다. 그 이후로 여러 번 다녀왔지만, 관광지를 돌고 올레길을 걷거나 해안도로 따라 드라이브하거나 유명한 카페 나들이하는 것으로 시간을 소일하곤 했다. 언제나 아름다운 경치 속에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겼다. 이번 여행
책을 몇 권 출간하고 다수 문학상도 받고 보니 주변 분들은 내가 글 쓰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글 한 편 쓰기 위해 끙끙거리며 애쓰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는 남편은 나의 특별한 소질이 글 쓰는 데보다는 그림 그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그리는 것이 어떠냐고 묻기에 나의 이런 대답이었다.“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
‘2025년 3월 25일 오후 4시 50분쯤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가 산불에 완전히 소실됐다’고 공중진화대가 확인한 내용이다.‘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에서 발화한 괴물 산불의 영향으로 신라 시대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의성군 단촌면에 설립된 최치원 문학관이 폐허로 변
그런 줄만 알았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함께 익어 가는 줄 알았다. 젊어 한때 성정이 호랑이같이 사납던 사람이 순한 양이 되고, 거들먹거리고 으스대던 사람이 다소곳해지며, 인색했던 사람도 너그러워지는가 하면 수다스럽던 사람도 진중해진다고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에서 그렇게 바뀌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헌데 나는 왜 이럴까? 이즘 어느 때보다 밴댕이
새벽바람이 아직은 차다. 흙바닥으로 내려앉은 바람 끝으로 느껴지는 청량함이 좋아서 새벽잠의 유혹에도 집 밖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오롯이 혼자 걷고 싶어 길들여진 습관이다.아침 고요의 가운데서 여린 바람이 실어 나르는 것은 비단 꽃향기뿐만이 아니다. 바짝 말라 더 이상 생명은 사라지고 소멸이라고 생각되었던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당신이 머문 자리는 아름답습니다.’어느 휴게소 화장실 소변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음속에 새겨 두고 여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문구다. 잠시 머무른 사람들 중 더러는 아름답지 않게 그 자리를 떠났기에 그 글귀가 대신 악취를 맡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을 심안으로 살피면 머물렀던 자리가 떠난 후에도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우리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에는
‘시속 800km 치앙마이 4-45 소요. 9:40 도착(2시간 시차) 11시 40분 우리나라. 33도 현지 날씨.’동생과 함께 떠나는 여행. 처음이다. 공항으로 가는 길, 소녀처럼 들뜬 동생의 가붓한 발걸음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나온다. 왜일까? 서로가 겪은 수많은 계절이 스치며 마음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솟아오른다.다섯 자매 중 바로 밑에 막냇동생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