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2025.9 72호 보리 베는 여자

초여름밤 기온이 땀 흘린 적삼 밑으로 스며들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휘영청 쏟아지는 달빛에 누런 보리밭 들판이 밤바다처럼 검푸르다. 더러는 이미 보리를 베어버린 밭이 낡은 잠방이를 덧대 기운 낯선 천 조각처럼 생뚱맞아 보인다. 아낙은 허리를 한번 쭉 펴 올리고 나서 툭툭 등을 두드린다. 초저녁부터 베기 시작한 보리가 가난한 집 자식들처럼 바닥에 나란히 누

  • 김덕중
북마크
47
2025.9 72호 개목사 인연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김밥집에 등산객들이 줄을 서 있다. 일요일 아침이라 김밥을 사려는 사람들이다. 슬며시 뒤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앞선 사람들이 많아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르겠다. 바쁜 일이 아니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처지라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천등산은 높지 않은 산으로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해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시간이 지나

  • 이인우(안동)
북마크
33
2025.9 72호 날지 않는 새

조명을 받은 베이커리의 쇼케이스는 현란하다. 빨간 딸기로 장식된 하얀색 생크림 케이크, 달콤한 초콜릿을 잔뜩 한 입 베어 문 듯한 초콜릿 케이크, 커피 향이 은은한 모카 케이크, 푸른 빛깔의 말차 케이크, 그리고 한없이 부드러울 것만 같은 바스크 치즈 케이크까지. 소미는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먼저 눈으로 맛을 음미한다. 심호흡을 고른 뒤 쟁반에 유산지를 깔

  • 장성희(이란)
북마크
76
2025.9 72호 옆집 그녀

장대비가 노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간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새벽인데도 그치지 않았다. 더 강하게 뿌려져서 길가의 가로등은 희미하게 빗속에 묻혀 버렸다. 새벽녘의 밝음과 동시에 잠에서 깨었다. 출근을 위해 빵과 우유로 아침 끼니를 해결하고 출근하기 위해 나섰다.비가 멈췄다. 비에 젖은 정원에 빨강, 노랑, 핑크, 흰색 색색의 꽃들이 피어서 어우러

  • 정선교
북마크
51
2025.9 72호 마지막 아버지

“꽃,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꽃과 사람을 하나씩 말해 보자.”한때 나는 신학기가 되어 첫 수업에 들어가면 간단한 내 소개와 함께 습관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일 분가량 생각 시간을 준 뒤 무작위로, 그러나 전원 한 녀석씩 일으켜 세워 발표의 기회를 준다. 그러면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꽃은 ‘장미’고 사람은 ‘여친’이다. 그리고 그

  • 이연주
북마크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