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문을 두드린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더위를 돌려보내려 애쓰는 햇살의 결이 사뭇 다르다. 산허리를 감싼 햇살은 고요하다. 은은하게 비껴드는 가을 햇살은 우리 보고 어서 가라며 손짓하는 아버지를 닮았다.“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안 가.”몇 달째 아버지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올케가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한 뒤부터는 그 실랑이가 더 잦아졌다. 딸처럼
- 김정심(안산)
가을이 문을 두드린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더위를 돌려보내려 애쓰는 햇살의 결이 사뭇 다르다. 산허리를 감싼 햇살은 고요하다. 은은하게 비껴드는 가을 햇살은 우리 보고 어서 가라며 손짓하는 아버지를 닮았다.“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안 가.”몇 달째 아버지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올케가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한 뒤부터는 그 실랑이가 더 잦아졌다. 딸처럼
은퇴한 지 어느덧 아홉 해가 되었다. 직장을 떠나면 비로소 느긋한 삶이 시작될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은퇴하고 보니 나는 여전히 무엇엔가 쫓기듯 살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 일정을 확인했고, 저녁이 되면 다음 날 계획을 세웠다. 직장은 떠났지만 분주함은 퇴직하지 못한 셈이었다.은퇴 무렵, 한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가 내게 ‘초은(樵隱)’이라는 호를
오늘은 상현달이 조각배처럼 남쪽 하늘에 떠 있다. 상현달을 바라보는 시인은 어떤 시상이 떠오를까. 화가가 바라보는 상현달은 어떤 그림으로 묘사되어 나올까.오래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백 년의 신화>를 관람했다. 전시실 벽에는 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굵은 선으로 그려진 그 소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으나, 그러면서도 끝내 무너
모퉁이를 앞두면 걸음이 느려진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은 때론 두려움이 되지만 뜻밖의 경이로움을 감추고 있기에, 나는 그 꺾임의 지점에서 늘 숨을 고른다.오래전 고향 마을 끝에는 산허리를 굽어 도는 흙길이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야만 다음 풍경이 비로소 열리던 길. 그 앞에 서면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그 너머에서 내가
동화책을 읽고 난 후 손녀는 내 손을 잡아 끈다. 손녀는 동화책 내용의 「부풀어오른 빵」으로 아빠를 만나고자 한다.“할머니, 아빠 얼굴처럼 부푼 빵 사러 가요.” 엄마가 출근하자, 아이는 책꽂이를 살펴보다가 『행복합니다』라는 동화책을 가져왔다.“이 책 읽어 주세요.”책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책 속의 하루도 오늘처럼 비가 오고 있었다. 아
델로스섬으로 향하는 첫 배에 올랐다. 오렌지색 양산을 든 해설사가 동행했다. 은퇴할 나이가 한참 지났을 것으로 보이는 여성 가이드는 깡마른 몸에 꽤 큰 토트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어폰이 연결된 무선 수신기를 가방에서 꺼내 나눠 주었다.배가 섬에 다다랐을 때, 햇빛은 눈부셨고 물고기 떼가 헤엄치며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바닥에 보일 정도로 바다는
강원도 양구는 국토 최북단이자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다. 민통선과 DMZ 지역을 품은 접경지역으로 평화·안보, 관광과 더불어 생태 관광지로도 주목받는 곳이다.60년 전 군인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그곳을 다녀온 추억을 회상하며 양구 나들이에 나섰다. 그때는 서울에서 그곳까지 가는데 비포장 국도 길을 8시간이나 걸려서 도달할 수 있는 먼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를 등교시키고, 구청 문화센터 헬스장에 운동하러 간다. 올해 1년은 그리해야 할 것 같다. 학교에서 문화센터 가는 길 어느 건물 앞에 대나무가 있는 3∼4평 되는 자그마한 화단이 있다. 아이들 팔뚝만 한 대나무 26그루가 서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면 활기차고 사람에게도 힘을 주는 듯하다. 화단 바닥에는 키가 매우 작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축축해진다.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훔친다. 좋아하는 작가의 가슴 아린 어릴 적 이야기를 읽으며, 어느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긴 숨을 천천히 내쉰다. 아직 끝까지 다 읽지는 않았지만, 잠시 책을 덮어둔다.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간다. 처음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한다. 또 눈물이 나오고 만다.마지막
나이 들어가면서 공짜를 자주 접한다. 대표적인 게 지하철 요금 안 내고 타기와 고궁에 들어갈 때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런 곳만 공짜인가. 보건소에 가 간단한 진료를 받을 때도 공짜는 성립된다. 돈 안 들어 좋긴 한데 때론 미안하기도 하고 때론 난처하기도 하다.어느 날 작은 일을 보러 가 생긴 공짜는 잊을 수 없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앞사람이 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