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밭을 일구다가 백자 파편이 눈에 띄어 한두 개씩 모은 것이 큰 바구니에 가득 찼다. 산성(山城) 밑의 이곳이 옛날 집터 자리인지 기와 조각도 잡힌다. 대숲이나 풀숲, 논둑, 물 흐른 도랑에도 파편은 엎드려 있다. 전에도 절터에서 가끔 백자 파편을 보아왔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요사이는 그 파편들의 빛깔에 이끌리어 모으기 시작했다. 은은한 빛깔을 보고 있
- 최은정
도라지밭을 일구다가 백자 파편이 눈에 띄어 한두 개씩 모은 것이 큰 바구니에 가득 찼다. 산성(山城) 밑의 이곳이 옛날 집터 자리인지 기와 조각도 잡힌다. 대숲이나 풀숲, 논둑, 물 흐른 도랑에도 파편은 엎드려 있다. 전에도 절터에서 가끔 백자 파편을 보아왔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요사이는 그 파편들의 빛깔에 이끌리어 모으기 시작했다. 은은한 빛깔을 보고 있
-논문은 검증받기 위해 쓰는 것 아닙니까?미친놈. 누가 그걸 모르나? 순진한 건지, 답답한 건지, 미련한 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바로 이런 놈이다. 나는 정의로운 척하거나, 순수한 척하거나, 양심적인 척하는 인간이 싫다. 세상이란 특히 군대란 상식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조직이다.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져도‘돌격! 앞으로!’라는 명령
모든 사내가 사랑스러워. 돈이 떨어져 13시간 동안이나 굶은 담배의 첫 모금 맛과 함께 문득 그걸 깨달아. 아직 벌어지지 않은 앞 대문니 사이로 뛰쳐나가지도 않는 침을 입가로 질질 흘리며 생각하면 어떤 때는 귀여워 죽겠어. 어쨌거나 세상 사내들은 내게 제법 많은 것을 가져다주니까. 엄마 아빠가 죽었다 깨어나도 해주지 못할 것을 그들은 거저 주었으니
또 한 사람 환자가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은 환자는 오랜 병마에 시달린 듯, 고개를 모로 박고 미동도 없었다. 여명 시간이 얼마일까, 환자를 보는 순간 떠올려진다. 여명 시간이 짧은 순서대로 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차례가 되기 전에 운명을 하기도 한단다.이곳 호스피스병동으로 오는 환자 대부분이 치료가 무의미하고 연명, 즉 모르핀이나
참극의 체르노빌프리페트강이 벨로루시 평원을 거쳐 우크라이나 국경에 접어드는 곳에 체르노빌이 나타난다. 체르노빌은 원래 리(里) 소재지 정도였으나, 소련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원전이 들어서면서 조상 대대로 이 바닥에 살던 원주민인 코사크족의 후예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일부는 남아 조상의 땅을 지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는 거야."혼잣소리를 중얼거리며 또 한 번 편의점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바람만이 쌩하고 안으로 치고 들어온다. 새벽 6시 30분. 아직 교대시간은 10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안절부절이다. 거의 한 달 만에야 다시 시작한 아르바이트. 어제 저녁, 처음 출근을 하느라 대충 입고 나온 가을 점퍼로 파고드는 찬 기
"당장 차 세워."엄마가 운전석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지선이 핸들을 꽉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엄마,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여긴 고속도로라고.""고속도로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당장 차 세워. 난 집에 갈 거야."평소에는 어눌해서 알아듣기 힘들던 엄마의 발음이 이럴 때는 정확하다."대체 어쩌라고 이러는 건데? 조용히 운전 좀 하자고.""
"오랜만에 뵈니 더 젊어지셨어요. 두 분 다."영숙 씨가 코리아노 석 잔을 탁자 위에다 내려놓으면서 수인사를 건넨다."헛말인 줄 알면서도 듣기 좋은 건 젊다는 말이죠. 그만치 젊음이 소중하고 보배롭다는 얘기 아니겠어요?""아쉽고 안타까워도 이미 가버린 청춘. 이제 와서 안타까워한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영숙 씨의 인사에 상수가 화답하고, 이어서 내가 추임새
소녀는 세월의 깊이만큼 태초의 고독을 온몸에 드리우고 있었다.나는 그 모습을 언제나 타는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내 젊음을 아프게 무너뜨린 유년의 겨울처럼 그 해의 겨울은 내내 가슴을 앓아야 했다.내가 그 소녀를 처음 본 날은 11월의 마지막 남은 달력이 함박눈 때문에 고독의 매듭을 풀고 있을 때였다.용인의 전셋집을 비워두고 수원의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는
동그란 손거울이 바다에 빠져산호언덕에 엇비스듬히 기대어 있네요. 먹어도 먹어도 늘 배고픈 아구제 몸집보다 더 큰 입 벌려 삼키려다가깜짝 놀라서 도망을 쳤어요. 숨어서 지켜보던 아기 꽃게,살금살금 거울 앞에 다가가 보곤 하는 혼잣말.-우리 중에도 힘센 친구가 있는 줄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