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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 72호 봉투 속 엄마

첫눈이 폭설처럼 내렸다당신의 부재도 마흔아홉 번째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엄마가 주는 마지막 돈이야”언니 손에서 건네받은 작은 봉투 학창 시절 수업료 봉투 하나가기억 너머에서 다시 손에 쥐어졌다 여름의 모서리들이 붉게 타들어 가면당신은 그 계절을 담아 빈 살림을 채우곤 했다 찬밥으로 허기를 달래던 밭고랑의 오후 붉

  • 최현숙(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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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 72호 맨발로 걷다

늘 하늘이 내려다보았겠으나나는 내려다보지 않고 걷던 길아무렇지도 않게 제 안전만 생각하며땅을 시끄럽게 하는 데 익숙한 발이겸손하게 맨발로 걸어보기로 했다발 아래를 찬찬히 내려다보며 걷는다평소 아주 무시하고 지나쳤을 세상낮게 엎드려 걸어가는 작은 생명들 보이고작은 돌조각 사소한 이파리며 가지들 보인다 사소한 것들이 불편하게 발을 만난다귀를 기울이기보

  • 이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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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 72호 주목나무

태백산에 가면 바람이 세차다갈 때마다 황소바람이 뺨을 휘몰아친다.바람 부는 날에만 간 것도 아닌데정상에 오르면 날아갈 것처럼 돌개바람이다.그 세찬바람〔風〕에 오래된 주목나무 잔가지는바람맞은 데로 볼썽사납게 휘어져 있지만그 의연함을 볼 때마다 천년의 몸매는 미소로 답한다. 사계절 불어오는 바람 눈〔眼〕이 지켜보고 있어서일까 변절하는 잡초들에

  • 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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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 72호 난독증과 틀니

넘어가지 않는 시를 꾸역꾸역 삼키다가책을 덮어버린다소화제를 삼키고 가슴을 치며폭염보다 무거운 페이지를 다시 넘긴다잘근잘근 씹어 삼키려면 틀니를 해야 하나 이모의 오독거림을 보고 처음으로족발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오독거리는 소리가 틀니에서 비롯된 것을 알았을 때틀니를 자랑하던 이모는 떠나고 없었다 기름진 뼈를 발라내듯읽히지 않는 책을 들

  • 이영선(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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