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를 떠나온 물은 호수에서 맞이하는 물과 함께 몸을 섞으며 흘러간다. 운 좋은 날엔 내 고향 호수에서 여느 날과 다르게 심연에서 물꽃을 끌어올리는 온천수처럼, 때론 오빠의 철없이 만들어 내던 담배 연기의 모양처럼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호수가 물꽃을 피워 올리는 시간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다. 저수지를 가까이에 두고 자랐다. 잔잔한 호수에 일렁이는
- 김사랑
골짜기를 떠나온 물은 호수에서 맞이하는 물과 함께 몸을 섞으며 흘러간다. 운 좋은 날엔 내 고향 호수에서 여느 날과 다르게 심연에서 물꽃을 끌어올리는 온천수처럼, 때론 오빠의 철없이 만들어 내던 담배 연기의 모양처럼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호수가 물꽃을 피워 올리는 시간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다. 저수지를 가까이에 두고 자랐다. 잔잔한 호수에 일렁이는
젊은 아내와 어린 딸들을 남겨 두고 떠난 그도 정녕 가고 싶은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고 싶을 때마다 힘들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는 나를 분명 그는 보았을 것이다. 어쩌다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그리도 반가웠는데, 너무도 짧은 만남은 아쉬움으로 끝나 가슴이 먹먹해 왔다. 1965년 여름, 그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던 날은 달맞이꽃이 흐드러
가을빛이 짙다. 공원에는 꽃무릇이 지천이다. 활활 타올라 사방으로 불꽃이 튀던 시기는 살짝 지난 듯하다.여자 셋 앞서거니 뒤서거니 숲길로 들어선다. 분명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가 높았는데 치솟는 불길 앞에서 웃음기를 싹 거둔다. 하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닌가. 검은 선글라스의 여자, 눈 화장이 짙은 여자, 입술 연지가 붉은 여자가 꽃 속으로
“이얍! 이얍! 나가고 싶어!”용쓰고 나온 세상너무 눈부시고 아름다워두 날개 팔랑팔랑드높이 날아보네. 해님이 살포시 들판에 내려앉은 봄날, 노랑나비와 흰나비는 세상에 나왔어요.“아이, 눈부셔!”“너무 신기하다!”엄마나비가 말했어요.“애들아, 마음껏 날아보렴. 많은 꽃들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단다. 좋은 친구들을 만나 세상을 멋지게 살아보렴.”노랑나비
“야! 세례. 수학 30점.”“푸하하, 그러게 다섯례라고 지었음 50점인데….”“세례, 네례, 다섯례, 하하하.”친구들은 특이한 이름 ‘세례’를 놀리기 좋아했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가끔 도가 지나쳐서 화가 날 만한데, 세례가 항상 배시시 웃고 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듣다 못한 반장 총명이가 한마디 했다.“세례야, 그냥 넘어가자. 죄
“에스프레소 좋아해요?”“네?”“에스프레소 좋아하시냐고요. 좋아하시면 타드릴까 싶어서….”공문 발송을 앞두고 서둘러 계획서를 작성하던 나는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왔을까. 쉬이 남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교실의 단단한 문은 휑하니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둥근 얼굴이 빼꼼 내밀어지며 나를 보곤 싱긋 웃고
토머스 강 노인은 이따금 벙긋거렸다. 병에서 벗어나는 기쁨 같기도 했고 새 세상을 기대하는 설렘 같기도 했다. 지화는 링거에 주입할 심장마비제 용량을 확인했다. 20cc. 적으면 예정된 시간보다 안락사가 지체되고 많으면 사망 시 통증이 따른다. 병상 맞은편에서 백인 수간호사가 사납게 눈짓했다. 빨리 주사제를 넣으라고 독촉하듯이. 그녀는 왜소한 데다가 남자치
그날 낮 11시경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경림의 오빠 경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이민 갔거나 죽은 줄 알았는데, 한국에 계시우?”경림이 빈정거리듯 말문을 젖혔다.“그러잖아도 너 보기 싫어서 이민을 생각했었지. 그나저나 농담할 때가 아니고….”“왜? 무슨 일?”“방금 너네 아파트단지에 있는 삼화상가 있지?”“그래서?”“너 혹시 칙칙폭폭 팻말이라는 말 들어봤니?
액자 속 ‘나의 이야기’가 열심히 수다 중이다. 더러는 앉고 더러는 빼딱이 서고, 또 더러는 흩날리며 첫눈의 설렘을 풀어내고 있다. 사춘기 소녀마냥 웃음꽃 분분히 피우고 있는 우리들의 작품들. 오늘은 전시 첫날, 내 안의 나를 만나는 날이다.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아카데미 대표 하춘근 작가의 설치미술품 하
“손이 걸어온 길을 본다. 손이 늘 먼저 걸어왔다. 손이 먼저 움직여 글을 쓴다. 손끝이 마음 뒤끝과 닿아, 잇다. 아니 글손〔客〕이 내 마음을 돌아다니다 온 길을 둘러본다.” 이렇게 쓰여 있다. 무얼 쓰려고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질 않는다. 이 글귀를 남겼을 때는 무언가 쓸 게 있었을 텐데, 도무지 한 가닥도 찾아낼 수 없다. 더욱이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