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2025.10 680호 계단참에서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의 어느 날 오후,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7층 계단참을 막 디디려던 순간, 발밑에 흑갈색의 곤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자, 몸이 휘청하며 소름이 돋았다. 하마터면 내 발에 밟혀 압사할 뻔한 곤충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사슴벌레였다.산이나 풀숲에서 겨우

  • 조명숙
북마크
65
2025.10 680호 이십 년 걸렸다

어머님을 모시고 한의원에 왔다. 오래된 듯 삐걱대며 소리를 내는 낡은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접수를 받아 주는 직원 뒤로 벽면 가득 누렇게 바랜 종이 묶음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 한의원을 다녀간 이들의 흔적이지 싶다.어머님이 이 한의원에 드나든 지도 어언 오십 년은 넘었다지. 혼사를 치르고 몇 해가 지나도록 애가 생기지 않아 다니기 시작했다는 한의원

  • 신미선
북마크
65
2025.10 680호

오만원권 지폐 이미지는 신사임당이다. 마트에서 신사임당 그림이 에어컨 바람에 걸어간다. 느릿느릿 가다가 빨리 도망간다. 앗! 돈이다. 눈이 확 떠지며, 갑자기 주울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마네킹 셋이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우리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며 안 본 듯이 외면한다.신사임당이 말씀하신다.“너, 나를 빨리 잡아라! 쓰레기통에 들어가면 나란 가치가 없어진

  • 강덕두
북마크
66
2025.10 680호 풀과의 전쟁과 사랑

새벽부터 텃밭에 나가 주저앉아 엉덩이로 밭을 뭉개고 다닌다. 밭을 엉덩이로 매는 건지 호미로 매는 것인지…. 자고 나면 잡풀이 쑥쑥 자라기 때문에 그 풀을 뽑아 주려고 꼬질꼬질한 목장갑을 끼고 챙 달린 모자를 쓰고 그렇게 하루 일을 시작한다. 텃밭은 있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무릎마저 수술하여 지팡이 짚고 겨우 걷는다. 자

  • 박희우
북마크
56
2025.10 680호 감나무가 있던 자리

어느 집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감나무 가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윤이 나는 잎사귀 사이로 동글동글 풋감이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감나무라면 가을볕에 발갛게 불 밝히듯 익어가는 풍경이 먼저일 테지만 어려서부터 늘 보고 자라서인지 풋감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은 내게 친근한 풍경이다. 잠시 눈 맞추는 사이 감나무의 사계절이 스쳐 갔다.고향 집 뒤꼍에는 두 그루의

  • 김순남(제천)
북마크
66
2025.10 680호 봄비는 길을 기억한다

며칠째 봄비가 오락가락 내리고 있다. 잠깐 개나 싶으면 어느새 다시 내리고, 또 어느새 그친 듯하더니, 다시 조용히 스며든다.대지는 젖고, 생각도 젖는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걷고 싶어진다. 이 비는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어쩌면 내 안의 침묵을 흔드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말없이 쓰다듬으며 멈춰 있었던 사유를 다시 흐르게 만

  • 신경용
북마크
55
2025.10 680호 전망대에서 조강(祖江)을 보면서

김포시 서북단에는 몇 년 전까지 크리스마스 때면 북쪽 개풍군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 불을 밝히던 애기봉이 있다. 한동안은 이산가족의 설움을 달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정상에는 지금도 애기봉비(愛妓峰碑)가 서 있다. 전직 대통령의 친필이란 기록도 있다. 누군가의 아기를 애타게 그리던 사연이 담긴 봉우리는 확인 안 된 야사도 있다. 병자

  • 윤백중
북마크
79
2025.10 680호 수필가의 이름으로

2008년 2월에 계간지 『시와 수필』에 「소장수 선생님」으로 등단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를 고심하게 되었다. 또한 문인의 내실을 갖추려면 남의 글을 많이 읽고 자신의 문장력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과 현실에서 일어난 소재를 바탕으로 부지런하게 글을 쓰기로 다짐하였다.등단의 첫 단초를 만들어 준 고교 선배가 문예지의 발행인이어서

  • 양동근
북마크
65
2025.10 680호 등대의 문장들

안개등이 흔들리며 새롭게 분주해지는 섬/ 조금 전 등불이 켜진 골목길에서/ 이방의 꽃잎을 주웠다/ 조리개를 오므리자 천연덕스러워진 나와 마주친다// (중략)// 고단한 흔적을 끌어안은 바다는 잔잔해지고(자작시 「홍도」 일부) 어두운 바다를 응시하는 한 점의 불빛이 있다. 그것은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

  • 백승희
북마크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