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의 어느 날 오후,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7층 계단참을 막 디디려던 순간, 발밑에 흑갈색의 곤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자, 몸이 휘청하며 소름이 돋았다. 하마터면 내 발에 밟혀 압사할 뻔한 곤충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사슴벌레였다.산이나 풀숲에서 겨우
- 조명숙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의 어느 날 오후,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7층 계단참을 막 디디려던 순간, 발밑에 흑갈색의 곤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자, 몸이 휘청하며 소름이 돋았다. 하마터면 내 발에 밟혀 압사할 뻔한 곤충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사슴벌레였다.산이나 풀숲에서 겨우
어머님을 모시고 한의원에 왔다. 오래된 듯 삐걱대며 소리를 내는 낡은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접수를 받아 주는 직원 뒤로 벽면 가득 누렇게 바랜 종이 묶음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 한의원을 다녀간 이들의 흔적이지 싶다.어머님이 이 한의원에 드나든 지도 어언 오십 년은 넘었다지. 혼사를 치르고 몇 해가 지나도록 애가 생기지 않아 다니기 시작했다는 한의원
오만원권 지폐 이미지는 신사임당이다. 마트에서 신사임당 그림이 에어컨 바람에 걸어간다. 느릿느릿 가다가 빨리 도망간다. 앗! 돈이다. 눈이 확 떠지며, 갑자기 주울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마네킹 셋이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우리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며 안 본 듯이 외면한다.신사임당이 말씀하신다.“너, 나를 빨리 잡아라! 쓰레기통에 들어가면 나란 가치가 없어진
새벽부터 텃밭에 나가 주저앉아 엉덩이로 밭을 뭉개고 다닌다. 밭을 엉덩이로 매는 건지 호미로 매는 것인지…. 자고 나면 잡풀이 쑥쑥 자라기 때문에 그 풀을 뽑아 주려고 꼬질꼬질한 목장갑을 끼고 챙 달린 모자를 쓰고 그렇게 하루 일을 시작한다. 텃밭은 있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무릎마저 수술하여 지팡이 짚고 겨우 걷는다. 자
어느 집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감나무 가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윤이 나는 잎사귀 사이로 동글동글 풋감이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감나무라면 가을볕에 발갛게 불 밝히듯 익어가는 풍경이 먼저일 테지만 어려서부터 늘 보고 자라서인지 풋감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은 내게 친근한 풍경이다. 잠시 눈 맞추는 사이 감나무의 사계절이 스쳐 갔다.고향 집 뒤꼍에는 두 그루의
동양인인 나는 지구인이다. 그러므로 평등할 권리가 있다. 미국에서 흑인 봉제사 파크스(Rosa Parks)는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요구를 단호하게 “No!” 하고 거부했다. 불평등을 마다한 이 언동으로 그녀는 14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1955년의 일이다. 5년 뒤, 흑인 목사 킹(Martin Ruther King)은 애틀
며칠째 봄비가 오락가락 내리고 있다. 잠깐 개나 싶으면 어느새 다시 내리고, 또 어느새 그친 듯하더니, 다시 조용히 스며든다.대지는 젖고, 생각도 젖는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걷고 싶어진다. 이 비는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어쩌면 내 안의 침묵을 흔드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말없이 쓰다듬으며 멈춰 있었던 사유를 다시 흐르게 만
김포시 서북단에는 몇 년 전까지 크리스마스 때면 북쪽 개풍군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 불을 밝히던 애기봉이 있다. 한동안은 이산가족의 설움을 달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정상에는 지금도 애기봉비(愛妓峰碑)가 서 있다. 전직 대통령의 친필이란 기록도 있다. 누군가의 아기를 애타게 그리던 사연이 담긴 봉우리는 확인 안 된 야사도 있다. 병자
2008년 2월에 계간지 『시와 수필』에 「소장수 선생님」으로 등단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를 고심하게 되었다. 또한 문인의 내실을 갖추려면 남의 글을 많이 읽고 자신의 문장력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과 현실에서 일어난 소재를 바탕으로 부지런하게 글을 쓰기로 다짐하였다.등단의 첫 단초를 만들어 준 고교 선배가 문예지의 발행인이어서
안개등이 흔들리며 새롭게 분주해지는 섬/ 조금 전 등불이 켜진 골목길에서/ 이방의 꽃잎을 주웠다/ 조리개를 오므리자 천연덕스러워진 나와 마주친다// (중략)// 고단한 흔적을 끌어안은 바다는 잔잔해지고(자작시 「홍도」 일부) 어두운 바다를 응시하는 한 점의 불빛이 있다. 그것은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