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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70호 노인의 하루

수세미 머리로는 세월을 닦아내지 못했다살아온 이력서가 얼굴이 된 노인이같이 늙어버린 리어카와길에 버려진 고물을 줍는다기역자로 후들거리는 노인의 다리바람이 반쯤이나 빠진 리어카 바퀴가칭얼칭얼 투덜댄다 고물도반짝이던 한때는 마냥 그대로인 줄 알았다반질반질 닦여져시간을 먹을수록 값이 배불러지는골동품으로 모셔져 있을 줄 알았다 고봉밥으로 실린 고

  • 이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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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2025.3 70호 격포에서

물때를 만난 싱싱한 몸짓으로우리는 밤새 섬을 만들었지만가늠할 수 없는 임당수 물속결국엔 썰물 되어 서로에게밑바닥까지 다 보여 주었다 비틀거렸던 강물이 바다가 된 포구불빛은 밤샘한 듯 흐려지고어둠을 걷고 날아간 새는어느 항구로 갔을까 비릿한 젓갈처럼 절어진 아침잔을 비울 때마다하얀 파도에 발자국 쓸리고먼바다 배는 한 뼘씩 옮겨 간다.

  • 김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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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2025.3 70호 바다가 아프다

공기가 이렇게 귀한 줄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자유가 이렇게 편안한 줄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얽매이고 짜여진 삶의 진면목이만신창이 육신의 허방대는 시간의 길목파란만장한 대륙, 푸른 꿈의 창파에뿌연 안개 낀 수평선이 버티고 있다 누군가 그어 놓은 선도 아닌데욱하고 가슴이 먹먹하다울부짖는 짐승의 절규인 것 같기도 하고몸부림치는 생명체들의 하소연

  • 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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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2025.3 70호 장미, 그 사람

깜짝이야그녀의 고슴도치 호위병이 말을 걸어 왔지 하늑하늑 담벼락 허물고 있는여인의 젖꼭지에 몇 가마 피가 서려한 폭의 벽화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푸른 가지에 짙게 배어 있는 관능(官能)저토록 부시게 햇살 홀리고 있는 거라고내 굳이 발설하지 않겠네 저두요당신이 오신 날에는 미치도록 붉어져서가슴에 와락 불을 지를 수 있는 장

  • 김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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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2025.3 70호 소나무 길에서

이렇게 살아 있지요죽은 이들의 얼굴에서 숨결을 찾았지요억울했습니다그렇지요그들이 두고간 광녘의 모습에는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부끄럽고 늘 아픕니다죽음 앞에 많은 이들이 두고 간하얀 국화꽃그 꽃의 향기를 맡아 보는이를 못 보았지요그리고 눈감은 이들의 무심함 때문에꽃들은 차갑게 시들지요 오히려 그 하얀 꽃잎 속에 숨기를 바라는방황을 볼 때질릴

  • 유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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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2025.3 70호 0.68

자립 ! ! !꿋꿋이 솟구치던 너,봄빛 솟대 끝 허공 위에서 흔들리는 눈부심 떠돎숫컷은 머리깃 총각(總角)을 올리고 암컷은 꽃가마 멀미를 앓는 자목련 가지 끝 초례청하나… 둘… 셋… 열 손가락 꽃봉오리 속 심지를 꺼내어 등불 밝히고,신랑을 기다리던 나 안에 나가 층층 허물어져 갈비뼈를 쏟아내고 흰 허벅지 속살이 문드러지는자립(紫立) 자생(紫生) 자강(紫彊)

  • 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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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025.3 70호 고인돌

족장이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다귀걸이를 한 여인이 낮게 흐느끼고 있는 동안청동검을 허리에 찬 무리들이 황급하게 달려갔고남루한 삼베옷의 사내들이 농사일을 접어두고개미가 되어 바위를 끌고 있었다밧줄이 더러 끊어지기도 하였다달이 뜨면 집으로 돌아와반쯤 벗은 아낙과 함께 보리밥을 퍼 먹었다생리가 시작된 아이를 걱정하기도 하였다덮개돌이 올려지고 흙을 걷어내자영원을 기

  • 김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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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2025.3 70호 순록의 봄

사랑이었을까가늠할 수 없는 높이의 나무가 있었지덤불처럼 자란 것에서 어린 잎사귀들이제 색깔을 바꿔 가며 흔들리고 있었어분명 가시였는데남은 것을 돌아보기도 전에떠나버린 자리가 오히려 자연스러웠으니순록의 뒤를 따라 걸어갔지. 뚜벅뚜벅 살금살금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던 거야 유유한 풍경 속에고고한 한 쌍의 뿔 위로 내려와 부딪히던 햇살은소리조차 경쾌했거든.

  • 조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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