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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오래된 거리, 다른 풍경

미국에서 손자가 왔다. 목마르게 만나길 기다렸던 손자가 내 눈앞에 서 있는 순간, 모든 햇살이 반짝 그의 존재를 비추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미국 가서 만났을 때 “할머니, 사랑해요” 하고 어눌한 한국말로 말했던 꼬마는 사라지고 길고 단단해진 몸을 가진 대학생이 서 있었다.“안녕하셨어요? 할머니!”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데, 그동안의 오래된 세월이

  • 최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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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백마강은 말이 없다

부소산성을 찾았다. 부여를 지날 때마다 한 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곳이었다. 몇 차례 먼발치로 지나친 적은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그 소망을 이루었다.야트막한 산길에는 소나무 향이 그윽했고 산새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쌓였던 피로가 조금씩 가셨다. 백제의 옛 도읍지를 걷는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문득 삼천궁녀 이야기가 떠오르자, 마음 한편이

  • 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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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오디가 익어 가는 아침

간밤에는 조금 특별한 꿈을 꾸었다. 우리 마을 밭 한가운데에 무대가 세워지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연예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나는 그들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발끝으로 언덕 같은 둔덕을 올랐다. 박수를 치고 몸을 흔들며 공연에 빠져들던 순간,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수진 엄마, 일어나야지.”남편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새

  • 김은숙(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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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스님의 군대

두 달째 박경리의 「토지」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오랫동안 읽고 싶었고, 읽어야만 할 것 같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작품이다. 2부 중반, 혜관 스님과 동학군으로 활동하던 윤도집(都執)이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1910년을 전후로 일부 불교계 인사들이 벌인 친일 활동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두 사람 다 당시 비밀 결사 항일 투쟁을 벌이던 인물들이다.

  • 한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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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샘과 우물

지난겨울 잠시 일본에 갔을 때 그곳의 한 신사에 가게 되었다. 일주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쵸즈야’라는 의식을 행하는 자그마한 옹달샘이 있었다. 12월 추운 날씨에도 참배객들은 샘 옆에 놓인 조롱박으로 물을 떠서 왼손부터 오른손을 차례로 씻고 입을 헹구고 들어들 갔다. 물때 앉은 검은 돌과 샘 주위를 보니 오랜 신사의 역사와 함께 흐른 자연 그대로의 샘물 같

  • 한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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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참새와 아이들

초등학교 시절인 1950년대 초, 고향에는 개구리며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가 지천이었고 산에는 꿩이며 산토끼며 다람쥐, 산새 등이 날고, 기며 뛰어다녔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다 그랬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런 산과 들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쏘다니며 구김살 없이 자랐다. 들에는 들쥐도 흔해서 쥐를 잡아먹고 사는 뱀이며 족제비가 집 근처까지 드나들고 가끔 먼동이

  • 정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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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맑은 숨결을 위하여

감자밭과 옥수수밭이 이어지는 들녘 사이로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며 반갑게 맞아 주는 연초였다. 5월 중순 손녀 둘을 데리고 옥천으로 주말 나들이를 나갔다. 논에는 벌써 어린 벼가 파릇파릇 숨결을 내밀며 작은 희망을 속삭인다.옥천은 금강이 아이처럼 뛰놀 듯 돌고 도는 푸른 들판의 고장이다. 봄이면 강가에 연둣빛이 번지고 햇살 머금은 물결은 은빛

  • 이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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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세월의 맛

무르익는다. 과일이나 곡식이 제대로 여물어갈 때 쓰는 말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과일은 익을수록 맛이 더해진다. 초록빛이 도는 토마토를 따서 며칠 두면 빨간빛으로 익는다. 딱딱한 감도 오래 두면 말랑말랑한 홍시가 된다. 이렇듯 수확한 후에 숙성이 되는 과일이 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맛이 높아진다. 바나나, 귤, 자두, 사과 등이 후숙 과

  • 박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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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마르다의 변

그분이 오신다는 소식이 온 마을에 날아다닌다. 자기 집으로 모시려는 마르다가 매우 분주하다. 먼저 사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스스로 닫히지 않도록 묵직한 돌멩이로 괸다. 사방에 널려 있는 농기구들을 정리한 후, 마당을 대빗자루로 쓱쓱 쓸었다. 마루에는 말라비틀어진 걸레와 바삐 벗어던진 양말짝들, 더하여 밭에서 돌아와 머리에서 벗겨진 수건 나부랭이들이 제멋대로

  • 김정자(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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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색안경

아직은 바람 끝이 매서운 계절이지만, 남녘으로부터 꽃소식이 들려온다. 봄이 저만큼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덧 얼굴에 와 닿는 햇살의 감촉도 제법 포근해졌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셔 검은 선글라스로 차단해 본다. 강렬한 태양빛이 단지 얇고 검은 유리 조각 하나에 가로막혀 힘을 잃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신기하다.세상을 바라보

  • 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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