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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 72호 네가 필요해

크레파스 상자에 여러 색깔의 크레파스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심심했습니다.“얘들아, 우리 재미있는 놀이 할까?”빨간색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그래, 뭐 할까?”주황색이 얼른 말을 받았습니다.“무지개 놀이 어때?”노란색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그래, 그게 좋겠다. 무지개에 들어갈 색깔은 모두 밖으로 나가자.

  • 김영자(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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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2025.9 72호 해바라기

두리번두리번길가에 우뚝 서서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아아니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같아동쪽에서 남쪽으로 조금씩 고개 운동을 하기도 해 어라?해가 없어도 항상 웃고 있어길거리가 환해지기도 해빨갛게 타오르다 주홍빛으로 변한 해바라기해님처럼 거리를 밝혀주기도 하지 긴 밤 지나고 비가 개이면 다시 환한 얼굴해님이 뽀뽀해주길 항상 기다리고 있나 봐태양이

  • 김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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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2025.9 72호 사랑니 단상

턱이 좁다. 태생적으로 협소한 구강 내에 어떻게든 비집고 나오려는 이빨 탓에 치열이 틀어지고, 악관절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 더불어 시작된 만성적인 통증은 발작적으로 종종 심해져, 나를 수십 분은 괴롭히고서야 잦아든다. 둥둥 떠다니던 산만한 정신을 육체에 지긋이 꽂아 놓을 정도만큼 아프다.사랑을 알 나이에 자라며 그 아픔을 닮았기에 사랑니라 일컫는다고 한

  •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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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 72호 댕기 하나에 스민 역사

어머니의 열네 살, 아직 댕기도 풀기 전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땅은 소녀에게 사춘기보다 망국을 먼저 가르쳤다. 왜군의 발굽이 골목마다 짓밟고 다니던 나날, 정조보다 생존이 절실했고, 꽃보다 피난이 먼저 피어나야 했다. 외할아버지는 그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어둔 만주의 밤길을 걸었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짓밟히지 않기 위해, 눈물과 침묵을 등에 진

  •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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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5.9 72호 하늘 냄새가 나는 친구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가 날 때가 있다. 그런 사람과 함께할 때면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고, 눈빛이 먼저 문을 두드린다. 깊은 산골짜기에 스쳐 가는 바람에 실려 아득한 향이 코끝에 맴돈다. 비 온 뒤 능선을 감도는 바람 냄새, 갓 피어난 들꽃에 맺힌 첫 이슬의 향기. 그런 향기를 지닌 사람이 있다. 하늘 냄새란, 스스로 맑은 영혼을 품은 사람에게서 맡을 수

  • 김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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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5.9 72호 압축 풀기

날렵함이 눈에 보인다. 활짝 열고 있는 귀는 끝이 쭉 빠진 모양으로 위로 솟구쳤다. 작은 얼굴에 비해 유독 귀가 크니 숲속의 무슨 소린들 듣지 못할까. 커다랗게 빛을 발하는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목덜미에서 꼬리 부분까지 뻗은 짙은 줄무늬가 예사롭지 않은 몸짓을 말해준다. 짧은 앞다리에 비해 제법 긴 뒷다리는 몸의 균형을 잡는 데 요긴할 듯하다. 털 속

  • 김은숙(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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