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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노년의 풍경

모처럼 대형마트에 들렀더니 살 것이 많다. 계산을 마친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넣는데, 플라스틱병에 담긴 잡곡 1개를 넣을 수가 없다. 장바구니 카트는 끌고 잡곡이 담긴 플라스틱병은 한 손으로 안고 마트를 나왔다.한적한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가로수 옆에 카트를 세우고 잡곡 병도 그 옆에 놓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에 빠져 있다가 뭔가 이상

  • 정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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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한 권의 책 값지다

1973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어느 지인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아주 허름하고 만지면 부서질 듯한 책이었다. 책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마의태자 제4집’.문학계 대선배인 춘원 이광수 선생께서 1923년에 펴낸 책이었다.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왕자로 태어나 천고여정을 꿈꾸던 신라가 망하고 급기야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참

  • 장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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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사람의 가치

전화기 신호음이 멈추자 돌연 수화기에서 들려온 소리.“내가 췌장암 말기라 카네.”분명 송 형의 목소리다. 고유의 높은 언성으로 당혹스러우면서도 크게 절박함은 없는 투다. 뭐라고? 나의 뇌는 정리를 요했다. 그가 오래전부터 허리디스크에 문제가 있어서 근래까지 수술과 치료로 고생한 일은 알고 있었지만, 난데없이 췌장암, 그것도 말기라고.침묵, 내가 겨우 수술

  • 왕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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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한 사람의 숲

그해 여름은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입추가 지났지만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사람도 계절도 지쳐 가던 어느 날, 친구가 말없이 휴양림을 예약하고 숲으로 초대했다.숲속을 거닐며 마음껏 날숨 좀 쉬어 보라며 조건 하나를 덧붙였다. 이번엔 무조건 하루 언니가 될 예정이니 철없는 동생 역할에 빠져 보라며 웃었다.서울에서 가까운 부근이라고 했지만 휴양림은 쉽게 모습

  • 노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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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동행, 삶의 끝자락에서

얼마 전 관객 수 16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관람했다. 영화 스크린에서는 2년 전 한국문인협회에서 주최한 ‘문학인 한마당 심포지엄’ 행사로 다녀왔었던 청령포와 영월 장릉의 현장들이 방영되고 있었다.그때에는 미처 몰랐던 쓸쓸한 유배지와 슬픈 역사를 영화로 다시 한 번 마주 보니 그 비극적 현장들이 잠자던 내 감성을 두드려 흘

  • 고송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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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선택

“도레미파솔∼ 솔파미레도∼.”이십여 년 전, 나이 들어 악기 하나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모니카를 접하게 되었다. 어릴 적 하모니카 만져본 것이 전부였지만, 하모니카만큼 접하기 쉬운 악기가 없을 듯했다. 불면 바로 소리 나고, 가벼워 가지고 다니기 편리하다. 부담스럽지 않는 가격으로 살 수 있고, 폐활량을 넓히는 데 도움되는 등 좋은 면이 많다

  • 성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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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대학을 소학에서 이루다

종친회에서 보낸 회보에 문중 선조 한 분이 “자손들에게는 반드시 소학을 읽혀라”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대목이 있다.효종 임금을 가르쳤고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의 시를 쓰신 고산 선조께서 왜 소학만을, 하며 의아해했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서 선조의 그 말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정부가 바뀌거나 새해가 되면 중요한 자리들이 비어, 새로운 사람들이 그

  • 윤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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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케이팝 데몬 헌터스>, 황금빛은 상처를 품고 온다

세계가 열광한 것은 화려한 K-팝이었지만,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루미의 긴소매였다. 얼마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도 그것이었다. 왜 그녀는 늘 긴소매를 입고, 가장 가까운 헌트릭스 멤버들과도 목욕탕을 가지 않을까. 그 작은 몸짓이 처음에 마음에

  • 김낙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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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통하는 사이

‘감정은 전염된다.’옆에 있기만 해도 편안한 사람이 있다. 긍정적인 말투로 공감을 잘 해주는 사람, 표정이 밝은 사람, 남을 배려하고 존중해 주는 사람. 내게도 이런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그중에서도 한날한시 같은 직장에 발령받은 36년지기 친구들이다. 이 셋 친구들과 의기투합하여 경북 소백산 줄기에 있는 영주로 1박 2일 여행을 갔다. 대구, 여수, 강릉에

  • 구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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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천 리 길에 핀 위로

딸아이가 회사 대표의 모친상 부고를 전해왔다. 대표님의 상심이 크실 것 같다며, 포항까지 직접 조문을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서울에서 포항까지는 천 리 길. 장례 기간이 주말이긴 했지만, 고단한 직장 생활을 이어온 딸아이가 혼자 감당하기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나는 기꺼이 조수석을 자처하며 말동무가 되어 주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의 슬픔을 온전히

  • 박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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