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눈이 내렸다. 두물머리로 산책을 갔다. 양 볼이 얼얼하도록 춥긴 했지만 쨍한 겨울의 냄새가 상쾌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연못가는 호젓했다. 여름 내내 푸르던 자리에는 갈색 연방들이 고개를 숙인 채 얼어 있었다. 벌집 모양처럼 생긴 껍질 위로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연못 한쪽은 아직 얼지 않은 곳이 남아 있어 발길을 옮겼다. 가장자리에 숫눈을 밟은 새
- 전경미
간밤에 눈이 내렸다. 두물머리로 산책을 갔다. 양 볼이 얼얼하도록 춥긴 했지만 쨍한 겨울의 냄새가 상쾌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연못가는 호젓했다. 여름 내내 푸르던 자리에는 갈색 연방들이 고개를 숙인 채 얼어 있었다. 벌집 모양처럼 생긴 껍질 위로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연못 한쪽은 아직 얼지 않은 곳이 남아 있어 발길을 옮겼다. 가장자리에 숫눈을 밟은 새
2026년 1월 인천공항에서 인도항공(Air India)을 타고 델리(Delhi)로 향했다. 짙은 안개를 뚫고 힘차게 이륙한 비행기는 서해를 건너 중국 영공을 통과한 후 광활한 몽골고원을 지나 히말라야 산맥 위를 날아간다. 기내에서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을 내려다보기 위해 미리 항공기 오른쪽 창가 좌석을 예약했었다. 인도 북부 영공으로 진입한 항공기는 서에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가족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삶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어린 시절 자라던 고향은 가난이 일상이던 농촌이었다. 부모님은 영세농으로 작은 논밭을 일구며 육 남매를 키우셨다. 먹고살기조차 힘든 형편 속에서도 아버지는 “큰아들만은 꼭 공부시켜야 한다”는 굳은 집념을 가지셨다. 그 뜻
병원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강남대로로 나왔다. 차들의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이 눈부셨다. 유턴 신호를 받고 나서야 중요한 전화 약속이 떠올랐다. 이미 두 시간을 넘긴 뒤였다. 급히 전화를 걸어 선생님께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는 괜찮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나 했어요. 좋은 일 했네요. 아무렇지도 않아요.낮에 오래전부터 알던
배식 일을 하지 않게 된 지도 벌써 넉 달이 지나가는데 아침 식사를 하며 탁상시계를 바라보는 습관은 여전하다. 작년 9월 10일부터 올해 1월 6일까지 B초등학교에서 아이들 급식을 돕는 일을 했다. 주말과 공휴일은 쉬고 평일에는 어린이들을 볼 수 있어서 마음이 뿌듯하고 행복했다.작년 5월 어느 날 딸과 함께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치매센터 앞을
해거름에 동네 공원을 찾는다. 으늑한 뜨락에는 오늘따라 지나는 이들이 눈에 띄지 않아 휑하기만 하다. 무시로 지나는 실바람만 스르륵 다가와 말없이 옷깃을 스치고 간다. 눈에 보이는 정경이 마치 사진 속 장면처럼 고요 속에 머물러 있다. 흐르던 시간마저도 흠칫 멈춰선 듯하다.공원 의자에 기대앉아 망연히 건너편을 바라본다. 때마침 떨어져 가는 해님이 얼굴을 붉
아침에 일어나 유리문을 열면 제일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를 찾는다. 해의 위치를 보면 대략 시간을 알 수 있다. 언덕 위 나무들 아래 소나무가 담을 치고 개나리 담장이 있다.아랫지방에서 홍매가 피었다고 하고, 아파트 입구에는 산수유가 피고 매화나무에도 흰 꽃봉오리가 올망졸망 달려 있는데 개나리 담장은 줄기만 덩굴져 있다. 아침마다 꽃을 기다리며 겨울 동
순천에 산 지도 어느덧 30년이다. 이렇게 오래 머물 줄은 미처 몰랐다. 앞으로의 삶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퇴직 이후의 시간 또한 이곳에서 이어질 것만 같다. 그만큼 순천은 내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에서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마음을 나눌 인연을 얻었다.요즘도 ‘동사연’(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의 약칭)의 ‘순천길 따라 걷기'(하늘 따라 길 걷기)
칠월의 달력에 눈길이 머물렀다. 계절의 결을 미처 느끼지 못한 채, 나는 어느새 여름 한복판에 서 있었다. 예전에는 바쁠수록 세월이 빠르게 흘렀지만, 요즘은 바쁘지 않아도 바람에 밀려가는 듯한데, 어쩌면 내가 자연에 무심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나무와 풀, 꽃의 생장을 비롯해 곳곳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겨울을 견딘 나무가 새순을 틔우
내 낡은 일기장을 펼친다.거기 유년의 기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봄날의 아련한 기억이다. 어린 시절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냇가에 자주 나갔다. 특히, 매서운 겨울이 끝나가는 이른 봄날이면 제일 먼저 냇가로 달려나갔다. 그곳에서 나는 한 생명을 만나는 기쁨을 느꼈다. 바로 버들강아지다.아직 바람은 차고, 햇살도 완전히 풀리지 않은 이른 봄날. 진분홍 가